(설교열기)(예화)명절을 맞이해 시골에 갔다가 곧바로 돌아왔습니다.
코로나 19가 창궐한 까닭이었죠.
집에 돌아온 다음날 입암산에 올라가 한바퀴를 돌았습니다.
그리고는 내려오는데 묘지에 배와 사과와 귤을 올려놓은 걸 봤습니다.
제사를 지냈겠구나 싶었죠.
그런데 더 유심히 들여다보니까 그 제수품을 새 한 마리가 쪼아먹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 새 이름이 무엇인지, 까치인지, 까마귀인지, 아니면 다른 새인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명확한 것은 그 새 한 마리가 조금씩 조금씩 배를 찍어먹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제 핸드폰 카메라에 영상으로 담았습니다.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산소의 제사상에 올린 배와 사과는 귀신이 먹는 게 아니라 새들이 쫓아 먹는 것임을 알려주고자 함이었습니다.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까?
조상의 묘지를 찾아 조상 묘에 제수품을 올렸는데, 다음에 다시 와서 그걸 봤을 때 모두 사라졌다면 아떤 생각을 할까요?
정말로 조상 귀신이 와서 먹었다고 생각할 사람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새들이 와서 쪼아 먹는 걸 제가 보여준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요?
저를 불경스럽다고 여길까요?
아니면 조상 귀신이 새가 되어 찾아와서 먹었다고 생각을 할까요?
중요한 것은 죽은 영혼은 다시는 이 땅에 되돌아오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그것이죠.
부자는 이 땅에 호위호식하져 잘 살다가 죽었고 나사로는 거지처럼 살다가 죽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거지 나사로는 낙원에 이르렀고 부자는 음부에 떨어졌죠.
그때 너무나 고통스러운 부자가 나사로에게 물 한 방울 찍어달라고 이야기를 하죠.
하지만 음부와 낙원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갈 수없다고 말한 장면이 나옵니다.
이 세상을 떠난 영혼은 죽은 귀신이 되어 돌아오는 게 절대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조상 묘지에 가서 음식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내는 일은 죽은 조상이 아니라 귀신을 부르는 일일 뿐이란 사실이죠.
그렇기에 크리스천인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부모에게 효도하고 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적용)그런데도 조상님들을 위해 제수 음식을 장만하고, 부적을 사고, 조상의 위폐를 모셔야 한다고 하는 이들은 누구일까요?
다들 장사치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장사치들 중에는 귀신과 관련된 일을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귀신과 상관없이 오직 돈에만 눈먼 이들도 있겠죠.
그런데 제수용품과 부적과 위폐와 또 묘지의 비석과 관련된 이들 중에 과연 귀신을 좇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귀신을 좇는 이들은 무당이나 하는 짓이고, 제수 용품과 부적과 위폐와 비석은 다들 장사치들이 돈벌이로 하는 일이죠.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는 아무리 위용찬 비석을 세우고 화려한 제수용품을 차리고 부적을 쓴다 해도 그것이 살아 있는게 아니란 사실 말입니다.
제수용품은 새들이 쫓아 먹는 것들이고, 우상은 눈도 코도 생각도 할 없는 돌조각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역배) 바울은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 살고 있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집에 살면서 복음을 전했죠.
3개월간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마음이 굳은 사람들의 방해로 인해 더는 복음을 전하지 못했죠.
그러자 티란노스의 스콜레를 빌려 주님의 제자들과 함께 점심 잠자는 시간에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죠.
2년간 그 삶을 살 때 천막 만들 때 사용하던 천조각과 거적떼기를 병든 자와 귀신 들린 자에게 얹을 때 병이 떠나가고 귀신이 떠나가는 역사가 일어났죠.
그 일은 에베소 시민들이 보기에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결코 이례적인 일이 아니엇죠.
주님은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그런 일들은 주님 편에서는 손쉬운 일이기 때문이죠.
그런데도 그 일을 바울을 통해 행하게 하신 목적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 이례적인 사건의 주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인으로 모셔 들이도록 하라는 뜻이었죠.
사실 에베소라는 도시가 어떤 도시인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인구 25만 명이 살고 있는 에베소는 고대세계의 불가사의로 알려진 아데미 신전이 있는 곳이죠.
아데미 신전은 유방이 24개나 달려 있어서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아데미 여신상이 있는 곳이죠.
아데미 신전에는 3천명에 달하는 여사제들이 일하고 있었고, 신전의 노예들도 셀 수 없이 많았죠.
그러니 아데미 신전의 참배객들을 상대로 숙소를 운영하는 사람, 또 식음료를 판매하는 사람도 많았죠.
에베소의 구리세공업자들은 그 신상 모형의 작은 부적을 만들어서 시민들과 상인들을 상대로 판매하여 돈을 벌고 있었죠.
그만큼 에베소 시민들은 아데미 신전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에베소에서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생명의 주인이시고,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전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천막 만들 때 사용하던 손수건과 앞치마만으로도 귀신들린 자의 귀신이 떠나가고 병든 자의 병이 고침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의 일곱 아들이 바울의 흉내를 냈는데, 오히려 그들은 귀신들린 사람에게 제압당하고 쫓겨나는 일도 벌어졌죠.
그러나 그런 광경을 바라보는 에베소의 마술사들은 은전 5만이나 되는 책값의 책을 모두 불태운 채 주님께 돌아온 일도 있었죠.
(깨달음)그와 같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고,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권세를 깨트리신 생명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이죠.
바로 그분의 말씀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죠.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40:8)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4:12)
바울은 그 무렵 에베소의 사역을 마치고 이제 로마까지 갈 비전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당장 에베소를 떠난 게 아니라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먼저 마게도냐로 또 아가야로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할때까지 에베소의 성도들을 돌보고 복음을 전하는데 최선을 다했죠.
그만큼 지금 사랑하고 섬겨야 할 자를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섬긴 바울이었습니다.
(본문) 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증언해주는 말씀입니다.
2년 넘게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남과 동시에 복음을 방해하는 일도 일어난 사건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복음의 방해꾼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 곧 구리세공업자가 동종업계의 사람들을 부추겨서 복음을 훼방을 놓는 모습입니다.
에베소는 아데미 신전이 있고, 그곳에 24개의 유방이 달린 아데미 신상이 있다고 했죠.
그 신상 앞에 수많은 시민들과 상인들이 빌고 빈다고 했죠.
그 아데미 신전에서 수종드는 여사제만해도 3천명이 있고, 노예들도 수없이 많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신상을 본떠서 작은 부적상을 만들어 파는 구리세공업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작은 신상모양의 부적상을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집안이나 상점에 모셔놓도록 만들어 판 것이죠.
그런 구리세공업자들이 에베소에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이 여러 사람을 부추긴 것입니다.
그가 보기에 바울이란 자가 에베소 온 도시에 난동을 피운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본문 25절을 보면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깨달음) 무슨 말씀입니까?
데메드리오는 바울이란 자가 나타나서 에베소와 전 아시아를 어지럽힌다는 것입니다.
바울이란 자는 아데미 신상도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일 뿐 결코 신이 아니라고 떠들며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바울이란 자가 자기 신을 전하고 다니는가보다 하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자신들이 만들어 파는 부적상이 팔리지 않게 될 것을 내다본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여태껏 그 부적상을 만들어 팔면서 풍족한 생활을 해 왔는데, 그 수입원이 끊길 걸 내다본 것이죠.
그것이 본문 25절 말씀에 나옵니다.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깨달음)그렇다면 왜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이 여러 동종업자들을 부추겨서 난동을 피우는지 알 수 있습니다.
부적상을 만들어 팔던 수입원이 끊기면 그 부적상 때문에 여태껏 풍족한 생활을 해 왔는데, 이제는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이죠.
바로 그것 때문에 그가 나서서 동종업계 사람들을 부추겨 난동을 피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본문 28절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분노가 가득차서 다들 외치기도 합니다.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하고 말입니다.
29절에서는 “온 시내가 요란”할 정도로 그 거리에 있는 에베소 사람들까지 덩달아 들고 일어난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데메드리오와 동종업계의 구리세공업자들이 믿는 아데미 신 때문에 그런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내세운 아데미 신상은 허울 뿐이고, 실질적으로 그들의 수입 곧 돈벌이가 끊길 것을 생각한 것 때문이죠.
그래서 그들이 들고 일어나자 아데미 신상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에베소 시민들이 덩달아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그만큼 에베소 시민들은 영적인 분별력을 잃고 산 것이었습니다.
참된 신이 누구인지, 인간의 손으로 만든 부적상은 허것이란 사실을 전혀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주문)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영적인 분별력을 지니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인간의 손으로 만든 부적은 아무런 것도 아님을 분별할 수 있는 은혜말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도 예전에는 영적인 분별력이 없을 때는 사람들이 섬기는 대로 인간의 손을 만든 조각상과 형상을 숭배하지 않았더냐?”
“에베소 사람들이 아데미 신상을 섬기며 풍요와 번영을 바라던 모습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 신상과 부적상들은 모두가 인간의 손으로 빚어만든 것들이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참된 하나님과 인간의 손으로 만든 부적을 분별하는 영적인 분별력을 상실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이 아데미신을 떠받드는 것 같지만 실은 자기 돈벌이가 떨어질까봐 사람들을 선동한 것 아니더냐?”
“너도 군중심리에 이끌린 채 이리저리 휘둘리지 말고 오직 네 마음 중시에 하나님을 신실하게 모셨으면 좋겠구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다면서 차려놓은 음식도 조상신이 먹는 게 아니라 새들이 쫓아 먹는다는 걸 잊지 말도록 해라.”
“네가 진정으로 섬겨야 할 분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조각상이나 돌상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찬양)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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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C.S.루이스(C. S. Lewis)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는 사탄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는지 알려줍니다.
어느 날 영국의 어떤 노신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습관적으로 도서관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도서관에서 책을 뒤지다가 수많은 책 중에 우연히 신앙에 관한 책을 한 권 집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책을 읽다가 마음에 갑자기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은 어떤 분일까?
나는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노신사에게 그 순간 사단이 찾아와 그의 마음에 이렇게 말합니다.
“점심 시간이야 배고픈데 뭘 그렇게 생각하나? 골치 아프게.”
그 순간 그는 마음에 생긴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누르고 식당으로 갔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배가 고파서 식사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점심을 먹다가 또다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마음에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은 도대체 어떤 분일까?
나는 그분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이때 사단은 노신 사의 마음에 다시 찾아와 방해를 했습니다.
노신사는 사단의 말대로 ‘밥 먹는데 뭘 골치 아프게 쓸데 없는 생각을 하지? 우선 식사를 끝내고 보자’하면서 우선 식사를 끝냈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하나님 생각이 어렴풋이 나오려 했지만 사단의 방해 때문에 노신사는 이렇게 단념했습니다.
‘그거. 뭐 있을 수 있는 생각이지. 오늘은 너무 바빠. 집에 가서 할 일이 너무 많은데 지금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라고 마음에 솟아오르는 생각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이제 그 노신사는 밖으로 나와 버스를 탔습니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아 신문을 읽으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런 자극도 아무런 변화도 경험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때 마치 자신에게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며 버스를 타고 가는 노신사의 뒤에서는 사단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하는 이야기 같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갈망하고 싶고, 하나님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그 마음조차도, 사단은 방해꾼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하나님 생각이 떠오르고, 하나님을 더 알고 싶고, 더욱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때도, 사탄은 끊임없이 그런 생각을 지우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런 변화도 갈망하지 않은 사람처럼, 다른 때와 같이 행동을 하게 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지만 인간의 손으로 만든 우상까지도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도 그런 생각을 집어넣지 않겠습니까?
‘이 나무 형상을 섬기는 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이 돌부처 형상이 살아 있는 신은 아닐텐데, 내가 이걸 섬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이것은 인간이 빚어 만든 것인데 왜 내가 이런 것들조차 섬길 필요가 있나?’
그렇게 생각하며 하나님께 더 향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서고자 할 때, 사탄은 여전히 방해한다는 것이죠.
‘뭐, 어때? 돌부처 형상을 섬기는 것쯤이야. 무슨 대수겠어?’
‘뭐, 어때? 내가 아는 다른 집사님도 제사 드리고 절만 잘 하는데?’
‘뭐, 어때? 이렇게 절한다고 내가 망하기야 하겠어.’
(적용)바로 이런 생각들이 사탄이 우리의 마음 속에 집어넣고자 하는 생각이란 사실입니다.
이런 마음이 들 때 우리는 기필코 이겨내며, 더욱더 하나님의 생각에 사로잡히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음성)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제가 명절때만 되면 조상에게 제사드리고 절하는 문제로 괴로운데, 주님 선하신 길로 인도해주세요.”
“제가 집안의 장남이라면 우상을 섬기는 일을 끊어내게 하시고,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제가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하고 싶어하는데도, 자꾸 다른 생각이 밀려올 때 사탄의 세력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치게 해 주세요.”
“내가 영적인 분별력을 더 키우려고 주님을 찬양할 때, 사탄의 세력들이 방해하며 흔들어대요, 그때도 이길 수 있게 해 주세요.”
(찬양)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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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세상에 인간의 손으로 만든 우상과는 전혀 다른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눈으로 볼 수 없고 코로 숨쉴 수 없고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나무나 돌의 형상 따위가 무슨 신이 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죽은 조상의 묘지에 올린 제사상조차도 무슨 조상이 와서 먹고 마시겠습니까?
그것들은 새들이 다 쪼아 먹는 것들이요, 실은 귀신들이 설치게 만드는 꼴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손으로 빚어만든 나무나 돌이나 구리로 만든 형상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섬기고, 그 하나님과 더욱 가까이하려고할 때 사탄의 세력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핑계를 대며 돌아서게 만듭니다.
그때 저와 여러분들은 영적인 분별력을 갖고 주님을 더욱더 섬기며, 주님을 더욱 가까이 할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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