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예화)대선을 앞두고 각 후보자를 위한 지지 모임을 곳곳에서 갖기도 합니다.
어제도 지방회 모임이 있어서 목포역을 지나가는데, 그곳에서도 열띤 응원전을 펼친 모습을 봤습니다.
대선 후보자들도 지역의 거점 지역을 돌며 유세를 펼치겠죠.
그럴 때가 되면 그 후보를 지지하는 시민들은 후보자가 연설하는 곳에 모여들어 지지를 보내기도 합니다.
그것을 일컬어 군중유세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전에 박근혜 탄핵과 관련된 촛불집회도 바로 그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촛불집회와 맞물려 석방집회를 벌인 이들도 있었죠.
왜 그렇게 대신진영에서, 또 법원판결을 앞두고 양 진영에서 유세를 벌이는 것입니까?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려는 이유 때문이죠.
그 외에 달리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깨달음)우리 자신도 대한민국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선거에 참여하여 투표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더욱이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지원할 수도 있고, 사법 판결을 앞두고 정치적인 목적으로 군중유세에 참여할 수도 있죠.
하지만 하나님나라의 모임, 교회의 모임은 그와는 전혀 다르다는 점입니다.
교회의 모임은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나, 정치적인 이권 때문에 나오는 게 아니죠.
눈보라가 치는 날 차를 몰고 엉금엉금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새벽에 눈에 쌓여 있어도 그 눈길을 밟으며 예배당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주간 동안 그토록 피곤하게 일하고 주일이면 쉬고 싶은데도 예배당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해주셔서 주님께 온전히 경배하기 위함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을 경배하는 그 예배를 통해 주신 말씀과 감동과 도전을 갖고 한 주간을 승리하고자 함이죠.
그것은 세상의 이해득실이나 정치권력을 얻고자 하는 게 아니죠.
오직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감사드리는 것이요, 이 세상 속에서 주님의 자녀답게 살고자 하는 자발적인 결단의 모임입니다.
(적용)그렇기에 세상의 정치적인 유세나 법원판결의 유세 등은 수많은 지지자를 동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세의 결집이 강하다고 판단하죠.
하지만 교회의 모임은 그 수가 많든 적든, 비록 두 세 사람이 모인 가운데 주님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죠.
그만큼 세상의 모임과 교회의 모임은 절대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은 수로 가늠할지 모르지만 교회의 모임은 예수님의 이름이면 충분하다는 점이죠.
71회기 전남서지방회에 71개 교회가 있고, 하나의 기도처가 있다고 하는데 박지도 기도원이 있다고 하죠.
그 박지도 기도원도 나이든 장로님 부부가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로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그 교회의 모임이야말로 이 세상의 어떤 정치적인 유세의 모임보다 주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모임인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서 3년 가까이 머물고 있는 상황입니다.
에베소의 브리스길라 부부의 집을 예배당 삼아 주일예배를 드렸고, 평일이면 천막을 만들면서도 점심 시간에 복음을 전했죠.
티란노스의 스콜레, 곧 주인 두란노의 상가를 빌려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던 것이죠.
그때 천막 만들 때 사용하던 천조각과 앞치마 격의 보자기로 병든 자와 귀신 들린 자에게 얹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죠.
그것은 에베소 시민들이 아데미 신전에 올라가 아르테미스 신을 숭배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건지 주님께서 보여주신 거죠.
아데미 신은 단지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신상일 뿐 그 신상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다는 걸 일깨워주신 역사였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병든 자가 고침받고 귀신이 떠나가는 그 일을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 보여주신 목적이 그것이었죠.
그 일로 많은 사람이 주님께 돌아왔지만, 호사다마라고 아데미의 신상을 본떠서 부적상을 만들어 팔던 자들이 들고 일어났죠.
이른바 에베소의 구리세공업자인 데메드리오라는 자가 동종 업계 사람들을 부추겨서 연극장으로 달려들어간 게 그것이었죠.
그의 명분은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에베소의 시민들이 섬기는 아르테미스 신이 위태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겉으로 내세운 명분일 뿐,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속 논리는 자기 수업이 끊기고 소득이 줄어들 것을 염려한 것이었죠.
그때 에베소 시민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 채 단지 아르테미스 신이 위태하는 것 때문에 다들 연극장으로 함께 들어갔죠.
그때 바울의 동역자 두 사람 곧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 그들이 끌고 갔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본 바울이 직접 나서서 해결코자 했는데, 바울의 동료 중에 관리의 위치에 있는 이들이 바울을 말렸죠.
지금 들어갔다가는 완전히 돌에 맞아 죽거나 집단 구타를 당할 게 뻔했기 때문이죠.
그런 상황속에서 연극장에 들어간 사람들은 집단적인 최면술에 취하기라도 하듯이 2시간 동안이나 아데미 신을 찬양했죠.
그러나 그들 가운데는 왜 그들이 그렇게 열광하는지 그 뜻을 모른 채 군중심리에 이끌려 열광하는 이들이 태반이었습니다.
이를테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12명의 정탐꾼 중에 10명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길 때 이스라엘 군중이 흥분해서 모세와 아론을 돌로 쳐죽이려던 그런 모습처럼 말이죠.
또한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는 왕으로 옹립하려 했지만 예수님께서 힘없이 체포당해 심문받는 모습 앞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아죽이라고 소리친 유대 군중과 같은 격이죠.
(깨달음)그것은 우리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분별력을 상실하면 얼마든지 이스라엘 군중들처럼 하나님을 불신하는 군중에 휩쓸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상실하면 얼마든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친 그 군중에 휩쓸릴 수 있다는 것이죠.
그만큼 에베소의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 아데미 신을 떠받드는 그들도 영적인 분별력을 상실한 군중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어떤 군중심리에도 휩쓸리지 않고 늘 주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본문)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전해주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의 연극장에 달려들어가는 수많은 군중들이 아데미 신을 떠받들고 2시간 동안 찬양하여 집회를 벌이고 있는 그때였죠.
바로 그때 에베소의 ‘서기장’, 곧 총독의 권한을 위임받은 그가 군사를 대동해 그 무리를 진정시켰습니다.
그 서기장은 왜 그들이 연극장에 들어와서 집회를 벌이고 있는지 그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죠.
그가 하는 말이 본문 35-40절까지 계속되는데 그가 하는 말의 핵심은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왜 이곳에서 군중집회를 벌이고 있는지 내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바울 때문에, 또 바울에게 협력하는 가이오와 아리스다고 때문에 이런 집회를 벌이는 걸 내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나 그 동역자들이 신전의 물건을 도적질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더욱이 그들이 우리의 아데미 여신을 비방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바울이나 동역자들을 고발할 일이 있다면, 이 일을 주도한 데메드리오나 그와 함께 한 자들이 재판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고 오늘처럼 이런 소동을 벌인다면 여기에 일어난 일의 총책임을 맡고 있는 우리가 책망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집회는 불법집회로서 총독에게 더 이상 보고할 거리가 없습니다.
바로 그렇게 서기장이 에베소에 몰려든 군중들에게 이야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이었습니까?
본문 41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원해)에베소의 서기장은 구리세공업자의 주도로 모인 에베소 군중들의 집회를 불법집회로 보고 모두 해산키셨다는 뜻입니다.
왜죠?
그들이 집회를 통해 바울과 그 동역자를 고발하려고 해도 명분도 없다는 이유입니다.
그들이 그 집회를 통해 모여든 이유는 아데미 신을 찬양코자 함인데, 그것은 신전에 가서 하면 된다는 뜻이죠.
바로 그 이유 군중심리에 이끌린 그 집회를 군사들을 동원해 모두 해산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할 때의 ‘모임’이란 단어가 헬라어로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39절의 ‘민회’라는 단어에 그래도 사용되었습니다.
‘민회’란 당시에 매달 정기적으로 열리는 시의회의 회의와 같은 성격으로 사법적인 시비비비를 가리는 모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에클레시아, 또 하나의 모임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동역자로서 에베소의 군중들이 끌고 들어가는 바람에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가이오와 아리스다고의 모임’이 그것이죠.
그들 두 사람은 연극장에 몰려든 수많은 군중들에 비하면 너무나도 초라한 두 사람 아닙니까?
더욱이 만일 민회를 벌인다면, 그야말로 시의회에서 정식으로 재펀을 연다면, 그 역시 아무런 변호도 못할 힘없는 두 사람의 모임이죠.
(깨달음)그러나 어떻습니까?
어떤 에클레시아, 어떤 모임이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모임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시의회의 사법재판의 성격을 갖는 그런 모임의 에클레시아를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지금 에베소 시민들이 연극장에 달려들어 아데미 신을 떠받들고자 모인 그런 선동적인 집회를 주님께서 기뻐하실까요?
우리 주님은 비록 초라할망정 가이오와 아리스다고의 두 사람의 모임을 가장 기뻐하시는 분이시죠.
왜 그렇습니까?
그들 두 사람의 모임은 이 세상의 사법 재판을 위한 모임도 아니고, 선동적인 군중심리의 집회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 두 사람의 모임은 오직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 모인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교회 곧 에클레시아가 지닌 참 뜻입니다.
모임을 뜻하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로부터 ‘교회’라는 말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교회란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뜻을 좇아 모인 두 세람의 모임 가운데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모임입니다.
주님께서 에클레시아를 이루게 하실 때 이 세상의 죄악된 세상에서 우리 각자를 주님의 모임으로 불러 모아 주셨기 때문이죠.
(주문)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 주님은 우리 각자를 주님의 영광된 모임, 주님의 에클레시아로 불러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주님께서 오늘 이 시간에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네가 예배시간에 기도 시간에 예배당에 모여드는 것이 세상의 모임과 다르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느냐?”
“교회의 모임은 세상 사람들의 정치적인 집회를 지지하기 위한 모임도, 사법적인 지지를 위한 모임도 아니지 않느냐?”
“교회의 모임은 오직 죄악된 세상에서 주님께로 불러냄을 받아 모인 모임이지 않더냐?”
“세상의 모임은 정치적인 권력이나 사업의 이권 때문에 모임을 갖지만 교회의 모임은 오직 주님의 영광이 목적이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본문 속에 나타난 행정과 사법을 위한 민회의 에클레시아와 교회의 에클레시아가 왜 구별되는지 알 수 있지 않느냐?”
“본문 속에 나오는 불법집회자들의 군중시위의 에클레시아와 교회의 에클레시아가 왜 다른지 알 수 있지 않느냐?”
“세상의 정치와 권력과 금권을 위한 모임과 주님께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모임이 왜 다른지 알고 있지 않느냐?”
“이 세상의 모임이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 나오고 세상 권력자와 능력자가 모임을 주선해도 거기에는 성령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에 가장 초라하고 숫자도 작더라고 그 모임이 주님을 위한 모임이라면 성령님이 가장 기뻐하지 않겠느냐?”
“오늘 네가 주님께 예배하고 찬양하고 경배하고 기도하는 이 모임이 가이오와 아리스다고의 모임처럼 가장 복된 모임이지 않겠느냐?”
(찬양)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겸손히 내 마음을 드립니다 나의 모든 것 받으소서
나의 맘 깨끗게 싰어 주사 주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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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미국 캘리포니아의 심리학자로 아주 인기 있게 활동하는 분 가운데 레오 바스칼리아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쓴 많은 책들 가운데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 한 분이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암 진단을 받은 그 날부터 그 할아버지는 매우 난폭해졌습니다.
성격이 갑자기 난폭해져 식구들을 향해 욕을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도 욕을 퍼붓습니다.
심지어는 아무도 만나려고 하지 않고 병실에 입원해서도 아무도 만나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간호사와 의사들에게까지도 포악하게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은 할아버지를 돕기 위해 할아버지의 옛날 친구들을 들여보냈습니다.
하지만 친구들도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자기 친구들이 오면 큰소리를 내면서 쫓아 버렸습니다.
이번에는 할아버지와 절친하게 지냈던 은사들을 보내보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소용이 없었죠.
그 후에 목사님을 보냈더니 그 목사님도 그 할아버지에게 욕만 먹고 쫓겨났습니다.
카운슬러 곧 위대한 상담사를 보냈는데도, 역시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그 할아버지의 태도가 변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작은 꼬마녀석 때문이었습니다.
그 꼬마는 동네의 할어버지를 가끔씩 만났는데, 그 꼬마는 할아버지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병실에 달려온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의 식구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 꼬마녀석을 보며 그렇게 말했습니다.
“꼬마야. 네가 한 번 들어가서 할아버지를 잘 만나 보렴.”
그런데 놀랍게도 20~30분 동안 어린 소년이 할아버지를 만나고 나오더니 그 이후로 그 할아버지가 완전히 변한 것이었습니다.
그 할아버지의 태도가 갑자기 누르지고 부드러워진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는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이야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이상해서 그 소년을 붙들고 물었습니다.
“꼬마야. 너 할아버지랑 무슨 이야기를 했니?”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는데요.”
“그래도 할아버지하고 20~30분 동안 함께 있었잖니. 너는 그 동안 뭘 했니?”
그랬더니 그 어린 소년이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요, 할아버지하고 같이 울었어요.”
(깨달음)그 꼬마는 할아버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느끼고 울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 할아버지는 우는 꼬마를 꼭 껴안았고, 그 순간 진정한 주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어서 마음의 상처가 치유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적용)우리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은혜가 넘쳐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모이는 모임 곧 에클레시아가 이런 모임이라면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만남,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임이 바로 그런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정치적인 모임이나 경제력을 위한 모임은 다들 자기 힘과 능력을 과시하시만 주님의 마음으로 모인 그 모임에는 주님의 위로와 긍휼이 함께 하기 때문이죠.
그 꼬마가 무슨 위로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 꼬마가 무슨 정치나 권력이나 재력을 그 할아버지에게 선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 꼬마가 할아버지에게 줄 수 있었던 것은 함께 아파하는 그 긍휼의 마음, 그것을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이죠.
그곳에 치유와 회복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내음성) 그러니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주님. 이 세상에는 수많은 모임들이 있어요.”
“정치적인 이해타산의 모임들도 있고, 경제적인 모임과 자기 지식과 가진 것을 뽐내는 모임도 많아요.”
“하지만 주님. 저희들은 아파하는 자들을 아파하고 힘든 자를 위로하는 위로자로 만나게 해 주세요.”
“그 할아버지가 아플 때 그 누구도 위로자가 되지 못했지만 동네 꼬마녀석을 통해 주님께서 위로자가 되게 해 주셨어요.”
“세상의 에클레시아는 다들 자기 정치력과 잇속을 쫓아 모이지만 저희들은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한 에클레시아가 되게 해 주세요.”
(찬양)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하소서
하나님 나의 마음 만져주소서
하나님 나의 영혼 새롭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하소서
하나님 나의 기도 들어주소서
하나님 주의 길로 인도 하소서
https://www.bookpod.co.kr/goods/goods_view.php?goodsNo=1000001130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는 수많은 모임 곧 수많은 에클레시아가 있습니다.
정치력을 위한 모임도 있고, 경제력을 과시하기 위한 모임도 있고, 자기 지식과 자기 기반을 내세우는 모임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그 어떤 위로나 격려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경쟁과 승리, 패배와 낙오자만 양산하는 모임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에클레시아 곧 교회의 모임은 근본적으로 다르죠.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의 모임은 주님의 위로가 있고, 주님의 소망이 있고, 주님의 치유가 있습니다.
에베소의 연극장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가서 아데미를 열광하지만 그 모임은 허왕된 자기 욕망의 모임뿐이었습니다.
그 속에 끌려들어간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는 초라한 두 사람의 모임이었지만 주님은 그들 속에 함께 하셨습니다.
그 꼬마가 할아버지의 아픔에 진정으로 아파할 때 그 속에 성령님의 치유가 일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오늘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에클레시아, 저와 여러분들이 모임 속에도 이런 은혜가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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