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설교열기)(논지)지금은 스마트폰 하나로 온 세계가 손안에 들어오는 시대입니다.
손 안에 든 스마트폰을 통해 지구 반대편에 일어나는 일까지 실시간으로 검색해서 알 수 있습니다.
전 세계의 온갖 뉴스와 정보가 손안에 들어 있는 셈입니다.
러시아가 우크라니아를 침략하는 모습도 볼 수 있고, 세계의 증시도 스마트폰 하나로 모두 알 수 있죠.
그런데 아무리 스마트폰이 있다고 해도 전원을 켜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전원을 켜지 않으면 스마트폰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깨달음)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이미 영으로 우리 안에 임재해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품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과 연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뜻도, 주님의 말씀도, 주님의 음성도 들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주님 앞에 독대하는 시간, 주님과 연결하는 말씀 묵상과 기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를 통해서만 하나님와 연결될 수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펼칠 수 있기 때문이죠.
(적용)이것은 주일날 말씀을 나눈 예수님의 광야도 마찬가지죠.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40일 시험을 받았는데, 그곳이 광야였죠.
왜 하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부르셨습니까?
이제까지 목수로서 살아온 자기 기술, 자기 능력을 내어 놓고 하나님만 붙잡도록 하기 위함이셨죠.
예수님은 신성을 지닌 분으로 귀신을 좇아내고 병든 자도 고치고 죽은 자도 살려낼 수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때는 인성을 지닌 모습으로서 오직 하나님만 붙잡도록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마치 애굽의 왕자로 산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불러 애굽의 지식과 능력과 힘을 모두 뺀 채 하나님만 붙잡도록 하기 위함처럼 말이죠.
34살까지 유대인 중의 유대인으로 바리새파로 율법의 수학자로 유대 지도자의 꿈을 키운 바울을 아라비아 광야로 부른 것도 그것이었죠.
우리에게도 때론 광야가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광야의 고독을 통해 하나님께 무릎꿇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듣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스마트 폰에 전원을 연결해 세상 정보를 보듯이, 주님과 연결하여 하나님의 뜻을 듣는 고독의 시간은 너무나도 중요한 거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바울이 아가야의 수도 고린도에서 육로로 아테네, 베뢰아, 데살로니가 교회를 거쳐 빌립보까지 왔습니다.
그 거리가 600km였지만 50대의 노구를 이끌고 그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은 예루살렘교회의 기근을 위해 구제헌금을 모으기 위함이었죠.
또한 그 길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향하고자 했던 것은 그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로마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놀랍게도 빌립보에 당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예비한 의사 누가를 만났고, 그때부터 로마에서 죽을 때까지 바울의 주치의가 되었죠.
그때 바울은 베뢰아교회와 데살로니가교회 그리고 빌립보교회에서 파견한 대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드로아로 건너갔죠.
그러나 2차 여행 때 드로아에서 빌립보까지는 2일이면 걸릴 거리였지만, 그때 건널때는 5일이 걸렸죠.
그만큼 파도와 풍랑 때문에 배가 표류한 것이었죠.
그렇게 바다에 장시간 표류한 끝에 그들이 드로아에 당도했을 때, 7일간 머물렀고, 그 주간의 첫날 곧 주일날 예배를 드렸죠.
그때의 예배는 밤 12시까지 계속되었는데, 그만큼 드로아의 성도들이 바울에게 복음에 대해 궁금한 것을 질문했던 것이겠죠.
그런데 한 밤 중에 다락방의 창문 틈에 앉아 있던 유두고, 노예 출신으로 주일까지 일한 그가 복음을 듣다가 졸면서 떨어져죽었죠.
그러자 바울은 주님의 마음으로 그 청년을 끌어안았고, 주님은 바울을 통해 그 청년 유두고를 살려내주셨습니다.
물론 육체적인 생명만 살려내주신 게 아니라, 그의 영혼의 생명, 곧 영생의 생명까지 살려내주신 것이었죠.
그로 인해 드로아의 성도들과 제자들이 주님 안에서 크나큰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되었습니다.
(깨달음)그래서 지난 시간에 깨닫게 된 게 무엇이었습니까?
주님 안에서 생명을 얻는 것이란 참생명 곧 죽음 너머의 영원한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그 생명을 죽어서만 사는 게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했죠.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면서 사는 것 말입니다.
드로아의 성도들과 제자들이 주님의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유두고를 통해 깨닫게 된 바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본문) 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는데, 본문 13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역본) 이 말씀을 현대인의 성경은 보다 이해하기 쉽게 번역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육지로 걸어서 앗소로 가겠다고 하므로 우리는 그의 지시에 따라 배를 타고 먼저 가서 그를 기다렸다.”
(깨달음)무슨 말씀입니까?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바울은 육로 곧 걸어서 가겠다고 한 것이고, 나머지 바울의 일행은 배를 타고 앗소까지 가서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과연 얼마나 걸릴까요?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거리는 65km인데, 목포에서 화순이 61km니까 좀 더 걸리는 거리죠.
2천년 당시의 발걸음으로 치자면, 더욱이 50이 넘은 노구의 몸으로 걷는다면, 이틀 정도 걸리는 거리였겠죠.
그렇다면 왜 바울은 일행과 함께 배를 타고 앗소까지 가지 않고 굳이 걸어서 앗소까지 갔을까요?
오직 자기 사명을 더 굳게 다지면서 주님 앞에 홀로 고독의 시간, 기도의 시간을 갖고자 함이었습니다.
드로아에서 일행과 함께 지중해 뱃길을 이용해 앗소까지 간다면 일행에 파묻혀 주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질 수 없었겠죠.
더욱이 드로아에서 앗소로 향하는 해안길은 2차전도여행 때 복음을 전한 고린도도 보이고 멀리 로마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일행에 파묻히지 않고 따로 떨어져 홀로 걸어갔던 것은 주님과 독대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 길이 60km가 넘고, 그 길이 50이 된 초로의 나이에 노구를 이끌고 이틀이 걸린다 해도, 주님의 뜻을 더 확고히 붙잡기 위해 걷고 또 걸었던 것입니다.
(성화)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십자가의 길을 받들 때도 마찬가지였죠.
그 밤에 주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돌 던질만큼의 거리를 떠나 홀로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렸죠.
처음에는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지만, 연거푸 기도하실 때는 아버지의 뜻대로 받들겠다고 기도하셨죠.
그때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기도한 게 아니셨습니다.
홀로 하나님 앞에 독대하듯이, 하나님께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 기도가 끝났을 때 대제사장의 군사와 종들이 주님을 체포하려고 할 때 어떻게 했습니까?
베드로는 단검으로 말고의 귀를 쳤지만, 주님은 그것마져 고쳐주시면서, 순순히 체포당해주셨습니다.
왜요? 그렇게 체포당하여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 독대하듯이 기도하지 않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졸면서 자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죠.
(적용)지금 바울이 드로아에서 앗소로 향하는 65km의 거리, 이틀이 걸리는 그 거리를 홀로 걸어간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죠.
그만큼 하나님 앞에 독대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며, 주님의 깊으신 뜻을 받들고자 홀로 그 길을 걸어간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필요한 독대의 시간,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어제는 김양기 집사님으로부터 문자를 받았습니다.
아내가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면서 기도부탁을 한다고 말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저도 가슴이 덜컹 내려 앉았습니다.
그러면서 위로의 말과 격려의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섭리를 바라보며 주님께 기도하자고 했죠.
우리는 그런 일을 맞이할 때 더욱더 주님 앞에 고독의 시간,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헤아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바울이 동료들과 함께 배를 타고 여행하듯 갔다면 홀로 주님과 독대하면서 기도의 시간을 가질 수가 없었겠죠.
하지만 바울이 이틀동안 하나님 앞에 독대하며 기도하며 걸었듯이, 저와 여러분들도 그런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 앞에 독대하는 시간, 기도의 시간을 갖는 은혜를 베풀어주길 원하신다는 점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이 시간에 주님께서 성령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스마트폰으로 세계 모든 정보를 너의 손 안에 다 쥘 수 있지만 전원을 켜야 되는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 독대하는 기도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 모세와 바울을 광야로 부르신 것도 그들의 자랑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독대하도록 부른 것 아니더냐?”
“예수님을 광야의 시험장소로 부르신 것도 오직 하나님 앞에 인성의 연약함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붙잡도록 한 것 아니더냐?”
“지금 바울이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65km가 넘는 곳으로, 이틀 걸리는 그곳으로 홀로 걸어간 것도 주님 앞에 독대하기 위함이지 않았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시간이 있을 때든 없을 때든 수시로 주님 앞에 독대하는 기도의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구나.”
“차를 운전할 때도, 길을 걸어갈때도, 버스를 탈 때도, 네 입술로 네 속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것 말이다.”
“나혜정 성도님에게 그런 암이 찾아왔을 때 얼마나 두렵고 놀랍겠느냐?”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알고자 한다면 그 역시 하나님 앞에 독대하는 기도의 시간이 필요치 않겠느냐?”
“아무리 스마트폰의 시대라 할지라도 전원을 켜야 알 수 있듯이, 너도 이 험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독대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겠느냐?”
(찬양)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 하시는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 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자녀삼으셨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것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예화)한국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여류 문학가 한 분 있습니다.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썼고 대학 지식층에 상당한 독자도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집사님입니다.
그런데 수년 전에 몸이 이상해서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습니다.
그만 간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앞으로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선고를 받은 것이었죠.
그분은 두 달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하다가, 우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독대하는 시간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제 인생에 남아 있는 두 달을 어떻게 살면 좋을까요”
그렇게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마음속에 사랑하지 못한 것이 제일 큰 후회가 된 걸 일깨워주셨죠.
그래서 자기가 그동안 벽을 쌓고 살아왔던 사람들의 얼굴이 스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명단을 작성했습니다.
그리고는 벽을 쌓고 지낸 사람들, 등지고 살았던 사람들, 그들을 하나씩 전화를 걸고 찾아나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한 분씩 만나 용서를 구하고 화해했습니다.
또 등진 사람은 아니지만 마땅히 사랑해야 할 만큼 사랑하지 못한 분들도 찾아가서 격려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재산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빚을 다 깨끗이 갚았습니다.
그리고는 남은 재산을 어떻게 쓸 것인가, 고민했죠.
자손들에게 남길 것을 빼놓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돈을 한 번도 가치 있게 쓰지 못한 게 후회가 됐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을 위해 선교헌금을 보내고, 구제헌금을 작정하고, 자기가 죽은 다음에 이렇게 쓰라고 말씀을 토대로 유언장도 작성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두 달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런데 몸이 그렇게 나빠지지 않았습니다.
이상하다 생각하고 다른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는데, 간암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알게 된 어떤 목사님이 그 집사님에게 이렇게 물어봤다고 합니다.
“집사님, 후회가 안 되십니까? 돈 쓰신 것 말예요.”
“아니요 목사님, 지금까지 제 전 생애를 통해 지금의 두 달처럼 의미 있고 가치있게 살았던 때가 없었어요.”
“저는 앞으로 남아 있는 인생의 시간도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 거예요.”
(깨달음) 어떻습니까?
평소에는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살아왔던 그 집사님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시고자 그런 과정을 거치게 한 것 아니었겠습니까?
하나님앞에 홀로 독대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그렇게 순종하며 살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내음성)그렇기에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도 세상에 치이고 세상 일에 너무 바쁘게 살다보면 주님께 독대할 시간이 없어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이 바쁘고 힘들고 분주하지만 그 속에서도 무시로 주님께 독대하는 시간을 갖게 해 주세요.”
“간암이라는 진단을 받아야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주님의 뜻을 경청하여 베풀고 나눈 그 집사님을 떠올려봅니다.”
“비록 오진이긴 했지만, 그런 방법을 통해서 그 집사님의 심령을 일깨워주신 주님, 저희들은 평소에 주님께 독대하며 살게 해 주시옵소서.”
“바울이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65km가 넘는 그곳을 이틀 동안 걸어가면서 주님의 뜻을 더 확고히 붙잡았던 것처럼 말예요.”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고난의 잔을 놓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앞에 독대했듯이, 저희도 그렇게 살게 해 주세요.”
(찬양)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 하시는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 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자녀삼으셨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것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과 더 깊이 독대하길 원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홀로 고독함 속에서 하나님과 독대해야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 수 있고, 순종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바울이 드로아에서 앗소로 향하는 65km의 길을 걷고 또 걸으면서 홀로 간 것은 하나님 앞에 독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과 떨어져 기도한 것도 십자가 고난의 잔을 받들고자 독대하기 위함이셨습니다.
모세와 바울을 그 광야로 부르신 것도 하나님 앞에 자기 자랑과 능력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독대하며 기도하라는 뜻이었죠.
저와 여러분들도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서 주님 앞에 홀로 독대하는 찬양과 기도의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깊으신 뜻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온전한 사명을 완수해 갈 수 있으니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그와 같은 은혜가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
'수요설교WednesdaySermon > 사도행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환란과 결박이 나를 기다린다(행20:22-24) (0) | 2022.03.30 |
---|---|
첫날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행하였는지(행20:17-21) (0) | 2022.03.23 |
생명이 그에게 있다(행20:7-12) (0) | 2022.03.08 |
우리는 닷새만에 그들에게 가서(행20:3-6) (0) | 2022.03.01 |
석달 동안 있다가(행20:1-3) (0) | 2022.02.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