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성화) 지금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고난주간의 셋째 날 수요일에 해당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려주일날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죠.
공생애 사역을 하면서 여태까지는 당신의 왕되심을 숨기셨지만 이제는 직접적으로 표명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권력자들처럼 개선장군하듯 말을 타고 가신 게 아니라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그것은 겸손의 왕이자 십자가 멍애를 매는 일 곧 유월절 어린양으로 자기 목숨을 내놓고자 입성하신 것이었습니다.
월요일날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의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 없는 것으로 보시고 저주하셨습니다.
그것은 무화과나무 자체를 말씀하신 게 아니라 영적으로 주님 앞에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한 역설적인 탄식이셨죠.
아울러 우리의 삶 가운데도 열매를 맺길 원하시는 주님의 뜻이셨습니다.
아울러 그 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성전의 장사치들을 내쫓으셨고, 환전상들의 상을 엎으면서 정화하셨죠.
그것은 공생애 사역 끝무렵에 벌인 일이었지만 그것은 그때만 행한 게 아니라 공생애 사역 시작점에서도 행한 일이셨습니다.
그만큼 성전된 우리 자신도 늘 말씀과 기도로 정화해야만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화요일날 예수님께서 논쟁의 날로 삼으셨습니다.
그 내용이 마가복음 11장 중반부터 13장까지 나온 말씀이죠.
당시의 성전관계자들 곧 권력자들은 예수님께서 무슨 권위로 성전을 정화한 것인지 따지고 물었죠.
그때 예수님은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일러주면서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에게 종들을 보냈는데 종들을 죽였고 아들도 죽였죠.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아들은 예수님이신데, 그 일꾼들이 곧 종교지도자들로서 아들까지 죽인다는 뜻이었습니다.
이어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게 옳은지 그른지 논쟁했죠.
그때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했죠.
또 형수취수제의 율법에 따라 일곱째 동생이 큰 형의 형수를 취할 때 누구의 아내인지 물었죠.
그때 예수님은 부활 때는 장가도 시집도 안가고 오직 하늘의 천사들과 같이 홀로 살게 된다고 말해 주었죠.
또 어느 계명이 큰지 예수님과 논쟁을 벌이고자 한 율법사가 있었죠.
그때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듯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죠.
그런 논쟁을 끝내시고 예수님께서 베다니로 가시는 길목에 감람산에 올라가셨을 때 제자들에게 말세에 대해 깨어 있도록 당부해주셨죠.
그렇다면 고난주간의 셋째 날인 수요일날의 예수님 행적은 어떠셨습니까?
실은 어제 저녁에 두 가지 일이 있었죠.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저녁을 잡수실 때 한 여자가 300데나리온에 향유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께 부어드렸죠.
300데나리온이란 1년치 임금인데, 그토록 고귀한 것을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쏟아부어 드린 것이었죠.
그토록 아름다운 일도 있었지만 그날 밤 가롯 유다는 남몰래 산헤드린 의원들을 만나 예수님을 팔려는 음모를 꾸렸죠.
예수님은 그걸 모를리 없으셨지만, 아무런 말도 아무런 소동도 일으키지 않고 그날 밤을 보내셨죠.
그리고서 오늘 수요일 곧 고난주간의 셋째날을 맞이한 예수님이셨습니다.
사복음서기자는 이 날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행적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행적도 행하지 않는 날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이 날을 침묵의 날로 삼고 있습니다.
물론 이날 예수님께서 아무런 행적도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다고 하지만 나름대로 준비하지 않았겠습니까?
가롯 유다와 산헤드린 의원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계속 준비하듯이,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마지막 만찬을 내다보고 있는 것 말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날 예수님은 베다니 나사로의 집, 베다니의 삼남매가 살고 있는 그 집에 머물면서 하루를 보내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깨달음)그렇기에 수요일날 예수님께서 침묵하신 모습을 통해 깨닫는 바가 무엇입니까?
가롯 유다와 산헤드린 의원들은 그들 나름대로 진리를 짓밟고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말을 맞추며 준비했다는 사실이죠.
이때 예수님은 아무런 행동도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지만, 그들의 모든 음모와 말을 맞추는 것을 모를리 없으셨죠.
그렇지만 그런 와중에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일, 곧 십자가 고난을 위해 묵묵히 준비하며 나아가셨다는 거죠.
궁극적으로 내일 있을 최후의 만찬을 내다보면서, 점점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일에 자신을 내어던지면서 침묵하신 것이죠.
(적용)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은 여전히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세력들이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고 모함하며 어그러지게 하려고 음모를 꾸밉니다.
이때 누가 그런 세력 앞에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릴 수 있겠습니까?
자기 힘과 자기 능력이나 자기 의를 내세우는 자들이 아니라 말씀 앞에 자신을 갈고 다듬는 자들이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고 하는 성전관계자들처럼 진리와 생명되는 예수님을 가차 없이 짓밟아버릴 수 있기 때문이죠.
그만큼 우리 자신은 날 말씀 앞에 나를 부인하면서, 나를 내세우기보다 침묵하면서 주님의 뜻을 받드는 자가 돼야 하는 거죠.
주일날 살펴본 것처럼,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할 때 두 말 없이 주님께 내어드렸던 그 나귀 주인처럼 말입니다.
300데나리온의 향유 옥합까지도 주님의 죽으심을 위해 기꺼이 내어드렸던 그 여인처럼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사도 바울이 일행과 함께 밀레도에 당도했습니다.
고린도를 빠져 나올 때만 해도 예루살렘교회의 기근에 대한 구제헌금을 전달하고 곧장 안디옥교회에 들어가 평안한 목회 여생을 보낼 계획이었죠.
그런데 드로아에서 앗소로 홀로 걸어가면서 단독자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찬양할 때 주님께서는 다른 감동을 주셨죠.
예루살렘에 들어가 환란과 결박을 당할 것이고, 그것은 주님의 복음을 로마에까지 전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성령님의 뜻 앞에 바울은 거부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였죠.
그래서 바울은 곧장 앗소에서 배 머리를 돌려 미둘레네로, 기오로, 사모로, 또 밀레도까지 오게 되었죠.
다만 그곳 밀레도에 당도했을 때 에베소교회 장로들 곧 에베소교회의 충성된 자들, 신앙의 먼저된 헌신자들을 불러 고별설교를 했죠.
바울은 자신이 에베소에서 3년간 눈물과 헌신으로 섬겼던 것처럼 이제는 여러분들이 그 바톤을 이어받아 섬기길 바란다고 당부했죠.
여기까지 오면서 여러 성읍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가면 환란과 결박이 기다린다고 하면서 가지 말라고 만류했지만, 나는 주님께 받은 사명을 이루는 일에는 내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설교했죠.
그러면서 자신은 에베소에서 영적인 파수꾼 역할을 다했으니 에베소의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 깨끗하다고 이야기했죠.
그만큼 이제는 에베소교회의 먼저된 여러분들, 충성되고 헌신된 여러분들이 그 소임을 이어받아 영적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해주기를 당부한 것이었습니다.
(본문)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이 오늘 읽은 말씀인데, 본문 28-30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원해)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장로들 곧 먼저되고 충성되고 헌신된 이들에게 양 떼를 위해 ‘삼가라’하고 권면합니다.
여기에 ‘삼가라’는 헬라어 ‘프로세코’(προσέχω)입니다.
‘주의하다’, ‘경계하다’는 뜻입니다.
과연 바울은 에베소교회 장로들, 에베소교회의 먼저되고 충성되고 헌신된 이들에게 무엇을 경계하고 주의하라는 겁니까?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았다는 것을 주의하라는 겁니다.
여기에 ‘감독자’란 ‘관리자’ 또는 ‘보호자’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런 감독자, 그런 관리자와 보호자로 바울이 세운 게 아니라 성령님께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니 교회를 보살피도록 하기 위함이셨다는 것이죠.
(깨달음)바울이 3년간 눈물과 헌신으로 모든 간계를 이겨내면서 교회를 섬겼고, 이제는 성령님께서 그들을 관리자로 세우셨다는 겁니다.
바울이 왜 그런 말을 고별설교로 하는 것이겠습니까?
내가 여러분들을 감독자로, 관리자와 보호자로 세웠다는 게 아니죠.
오직 성령님께서 교회를 보살피고 섬기도록 여러분들을 감독자로 세우셨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자기 주장 자기 의로움 자기 자아를 세우지말고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예요’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뜻이죠.
(원해2)그러면서 바울은 더욱 중요한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 곧 이단과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 에베소교회의 양 떼를 포획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심각한 것은 여러분 중에도, 주님의 제자들 중에 자기를 따르도록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어그러지다’는 헬라어 동사 ‘디아스렙포’(διαστρέφω)는 ‘왜곡하다’(to distort)는 뜻입니다.
에베소교회 장로들, 에베소교회 먼저되고 충성되고 헌신된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유익을 위해 왜곡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것도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말입니다.
자기 이로움, 자기 높임을 추구하기 위해 말씀을 왜곡하는 이들이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럿이 나올 것이란 말입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까?
그만큼 말씀 앞에 자기 자신을 갈고 닦지 않으면, 말씀과 기도로 자기 자신을 비우지 않으면 끊임없는 욕망에 휩쌓이게 된다는 것이죠.
가롯 유다도 300데나리온의 향유 옥합을 깨트리는 여인에게 차라리 그 돈이면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고 말하죠.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장례를 내다보지 못한 채 자신이 선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기 의로움에 사로잡힌 모습이었죠.
그것은 가롯 유다 뿐입니까?
제자들도 지금은 예수님을 환호하고 열광하면서 자신들의 겉옷을 펴서 나귀의 등에 얹으면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셨죠.
하지만 목요일날 저녁에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군사들에게 체포당할 때 다들 줄행랑쳤고, 베드로도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말았죠.
왜요?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뜻을 대변해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까닭이었죠.
제자들조차 이럴 진대, 우리 자신은 두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런데 가롯 유다나 다른 제자들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관계자들도 전혀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유대 군중들이 보기에 성스러운 직임을 맡고 있는 자들 아니었습니까?
그들은 그런 직임으로 수많은 유대 군중들이 자신들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장본인들’이었죠.
(적용)그렇기에 바울이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삼가라’고 신신당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에베소교회의 먼저된 이들, 충성되고 헌신된 이들에게 ‘경계하라’고 강조한 이유는 그것이죠.
여러분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날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면 언제든 마귀 사탄의 길을 좇을 수 있다는 것 말이죠.
여러분의 믿음이 예수님을 닮지 않으면 언제든 가롯 유다의 길과 성전관계자들의 길을 좇을 수 있다고 말이죠.
이것은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우리교회의 먼저된 이요, 충성되고 헌신된 이로서, 자타가 인정해주는 분들 아닙니까?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 자신은 늘 말씀 앞에 나 자신을 비춰서 나를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자신이 가롯유다가 될 수도 있고, 산헤드린 의원들처럼 백성들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나의 나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하면서 늘 말씀 앞에 나를 부인하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점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예수님께서 고난주간의 수요일날 침묵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않겠느냐?”
“예수님께서는 가롯 유다와 산헤드린 의원들이 음모를 꾸미는 걸 알고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침묵하지 않았더냐?”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말씀 앞에 당신 자신을 비추며 비움의 삶을 살지 않았더냐?”
“지금 바울도 에베소교회 장로들 에베소교회 먼저되고 충성되고 헌신한 이들에게 경계하고 주의하라고 당부한 것도 그렇지 않더냐?”
“오직 말씀과 기도로 자신들을 비추면서 경계해야만 성도들을 왜곡된 길로 끌어들이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오직 말씀 앞에 자신들을 비추면서 주의해야만 성도들을 진리와 생명으로 더욱 보살피고 섬기는데 성실을 다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먼저 택함받은 자요 먼저 충성하고 헌신한 자라고 너의 믿음과 의를 드러내기보다 주님처럼 묵묵히 말씀에 비춰 비우는 삶을 살아야만 하지 않겠느냐?”
“그것이 가롯 유다가 걸었던 길, 산헤드린 의원들이 말씀을 왜곡하여 백성들을 선동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말이다”
“그것이 끝까지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나의 나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하고 겸손하고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것이 골고다 언덕길에 침묵하면서 십자가를 짊어지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길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모습이지 않겠느냐?”
(찬양)주님 예수 나의 동산 내 맘속에 동녘 하늘
아침햇살 가득 안고 활짝 피는 백합 같아
그 안에서 이 생명도 피어나는 꽃 되리라
오 하나님 이 꽃 바쳐 주의 재단 밝히리니
은혜로운 사랑으로 하늘 평안 내리소서
주님 예수 나의 동산 내 맘속에 동녘 하늘
아침햇살 가득 안고 자라나는 나무 같아
그 안에서 이 생명도 귀한 재목 되겠어요
오 하나님 이 재목 바쳐 주의 재단 쌓으리니
은혜로운 사랑으로 하늘 평안 내리소서
https://www.bookpod.co.kr/goods/goods_view.php?goodsNo=1000001131
(예화)알버트 슈바이처는 독일 출신의 프랑스의 의사이자 음악가요 철학자이자 신학자였고, 루터교 목사였습니다.
그는 목사로서 대학교수로 활동했는데, 어려서부터 천부적인 파이프오르간 연주자이기도 했고, 바하를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30살 되던 해인 1905년에는 의학과정에 진학했고 1912년엔 의사 고시에도 합격을 했죠.
그런 그가 1913년에는 인류애를 실현코자 아내와 함께 흑인을 위한 의료 사업에 평생을 바치기로 적도 아프리카인 가봉 공화국으로 떠나 의료봉사를 시작하게 되죠.
목회자요 신학자요 음악가였던 그가 아프리카 의료선교로 자신을 바친 것은 말씀 앞에 비움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떠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이 차지한 지위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부러움과 영광을 받을 수 있었을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프리카로 떠나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이자, 주님의 십자가 발자취를 따르는 길이라 여긴 것이었습니다.
그가 아프리카로 떠날 때 실은 세 가지 것을 포기한 그의 삶이었습니다.
첫째는 그가 심취했던 바하의 음악을 포기하는 것이었죠.
둘째는 그가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대학교수직을 포기한 것이었습니다.
셋째는 풍요롭고 안락한 자신의 삶을 포기한 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포기한 후에 그는 아프리카 오고웨 강변 랑바레네에 병원을 설립해 병을 고쳐주고 영적인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고난 받는 자를 위한 헌신의 삶을 살도록 주님께서 이끄실 때, 묵묵히 말 없이 순종하며 따른 것이었죠.
그런데 하나님의 뜻에 자기 자신의 것들을 내려놓고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 큰 것으로 갚아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슈바이쳐는 그토록 심취했던 바하 음악을 포기했었지만 바하 협회는 모든 회원들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연주회를 아프리카에서 열어주었고 대형 오르간까지 선물해줬다고 합니다.
또한 존경과 명예가 뒤따르는 교수직을 포기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평생동안 강의할 만한 강의 시간을 단 일 년 동안에 모두 허락해 주셨다고 하죠.
안식년을 맞아 귀국한 그에게 대학마다 앞다투어 초청해서 그의 강의를 듣고자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풍요롭고 안락한 생활을 포기했지만 그가 쓴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말 할 수 없는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해 주었다는 것이죠.
(내음성)그 모두가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고 묵묵히 주님의 길을 따른 슈바이처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슈바이처도 자신의 지위와 자신의 직책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더 많은 찬사와 영광을 누렸을 거예요.”
“그러나 자칫 그 속에 안주하다보면 그도 그 성도들과 군중들을 왜곡시켰을지도 몰라요.”
“바울이 에베소교회 먼저되고 충성되고 헌신한 이들에게 경계하라고 주의하라고 한 이유도 그 때문이예요.”
“말씀 앞에 자기 자신을 경계하고 비추지 않으면 늘 내 속에 탐욕 때문에 나와 주변 사람들을 왜곡시킬 수 있어요.”
“그래도 바울도 나의 나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며 말씀앞에 자신을 비추며 주님처럼 비움의 삶을 살았잖아요.”
“슈바이처도 모든 직위와 능력과 찬사를 내려놓고 주님가신 발자취를 따라 비움과 섬김의 삶을 살았어요.”
“저도 부족하지만 늘 말씀앞에 비추며 나를 내려놓고 주님 가신 발자취를 따를 수 있도록 인도해주세요.”
“내려놓을 때 세워주시고, 비울 때 채워주시는 주님이셨습니다.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만 왕의 왕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따르게 해주세요.”
“슈바이처가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며 세 가지 것을 포기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 큰 영광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교회를 위해 나를 내려놓고 따를 때 저 영광의 천국에서는 더욱 큰 은혜로 세워주실 줄 믿습니다.”
(찬양)영광의 길 너 걷기 전에 갈보리 길 너 걸으라
네 모든 것 주께 맡긴 후 하늘 문을 바라보라
하늘 가는 다른 길 없네 오직 예수 오직 한 길
갈보리 길 걸어가신 주 그 길 따라 너 걸으라
영광의 길 너 걷기 전에 갈보리 길 너 걸으라
네 모든 것 주께 맡긴 후 하늘 문을 바라보라
방황하는 영혼을 위해 십자가의 길이 있네
죄에 빠진 영혼을 위해 주님께서 피 흘렸네
못 박힌 두 손 날개 펼치사 나로 그 그늘에 쉬게 하며
부드러운 사랑의 음성 날 오라 부르시네
방황하는 영혼을 위해 십자가의 길이 있네
죄에 빠진 영혼을 위해 주님께서 피 흘렸네
https://www.bookpod.co.kr/goods/goods_view.php?goodsNo=1000001175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고난주간의 셋째 날 수요일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가롯 유다와 대제사장들이 음모를 꾸미고 입을 맞추며 예수님을 체포하여 죽일 계획을 벌인 사실을 아셨지만, 침묵하신 날이셨습니다.
왜요?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을 이 땅에 성취하실 수 있기 때문이요, 그를 위해 묵묵히 자신을 내려놓고 십자가 길을 따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끝이 아니라 십자가 죽음을 통해 만 왕의 왕으로 부활승천하는 고귀한 영광을 누리게하셨습니다.
바울도 그 영광의 나라를 위해 주님 발자취를 따라 내려놓는 삶, 자신의 입지와 능력을 부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그런 사실을 내다보며 에베소교회 먼저되고 충성되고 헌신된 이들도 말씀 앞에 늘 경계하며 내려놓는 삶을 살도록 당부했습니다.
슈바이처도 주님의 십자가를 따르며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을 때 주님께서는 더 큰 영광을 부어주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힘들고 고달플 때 외치고 싶고 항변하고 싶지만, 주님 걸어가신 십자가를 묵묵히 침묵가운데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외롭고 힘들지만 말씀 앞에 나를 비추며 나 스스로를 경계하며 십자가를 따를 때 주님께서는 놀라운 은혜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혜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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