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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WednesdaySermon/사도행전

전도자 빌립의 집에(행21:7-9)

by 똑똑이채널 2022.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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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자 빌립의 집에.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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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나예) 월요일날 아침 일찍부터 에어컨 작업을 해서 오후 5시 경에 마쳤습니다.

그리고 화요일 날 6시 반 쯤에 광주에 있는 한국병원 장례식장으로 출발을 했죠.

이유인 즉 친구 김삼남 전도사가 소천해서 장례예배를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는 장례예배 때 기도를 했고, 김삼남 전도사의 친한 친구 이동일 목사가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설교 내용 가운데 그런 고백을 한 게 있습니다.

자신은 고등학교 때까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예수쟁이들은 어딘가 정신적으로 부족한 정신박약아들이나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랬던 그가 친구의 전도로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기도하는데, 환상 가운데 주님께서 자신을 찾아와 만나주셨다고 합니다.

바로 그때 그토록 교만한 자기 자신의 자아가 깨져서 주님을 구주로 영접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때 이후에 목회자가 되기로 서원하며, 지금껏 이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말이죠.

 

(깨달음)어떻습니까?

이 땅에는 그렇게 주님을 영접한 케이스가 많이 있지 않겠습니까?

자기 자신의 힘과 능력과 지혜만을 맹신한 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들을 무시하고 천대시하는 이들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이 어느 순간부터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그 누구보다도 신실한 주님의 제자가 된 경우가 많죠.

 

(타예)그러나 그와는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젊은 시절 그렇게도 신실하게 주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면서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끼쳤지만 나이들어 변질된 분들 말이죠.

이를테면 김진홍 목사님이나 김삼환 목사님도 그렇고 극동방송 이사장인 김장환 목사님도 그렇죠.

젊었을 땐 모든 분들에게 존경받는 목회자였지만 늙어갈수록 노욕 때문에 기독교에 욕을 끼치는 분들이 그분들이라고 말하죠.

 

(깨달음)이것은 그분들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자신도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나이들수록 주님 보시기에 선한 길을 좇아 살 수 있는 것이죠.

나이가 들어 죽어갈 때, 선한 좌표를 그려준 분이라면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그의 장례 앞에 슬퍼하고 애통하겠죠.

하지만 나이 들어 죽어갈 때 선한 좌표가 아니라 추한 모습만 보인다면 그 누구도 그의 장례식 앞에 슬퍼하지 않겠죠.

 

김삼남 전도사님의 장례식을 바라보면서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나이 때부터 서서히 천국에 가는 친구들이 하나 둘 생겨나겠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깨어 있어야 하고, 선한 좌표를 그려가는 인생을 살아가야 하겠구나,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시작은 좋지 않았을지 몰라도, 마지막으로 갈수록 더욱더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겠구나, 하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들과 헤어진 후에 곧바로 고스, 로도스, 그리고 바다라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바다라에서 지중해를 건너가는 큰 상선으로 갈아타고 하루종일 구브로를 바라보면서 급기야 두로항에 정박했습니다.

그때 바울은 일행과 함께 두로의 제자들을 찾아가 1주일간 교제하면서 선교현장에 있던 일로 설교하고 또 격려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두로에서 배를 타고 떠나려 할 때 두로의 제자들은 처자를 데리고 다 항구로 나와 바울을 배웅했습니다.

 

두로의 제자들이 그렇게 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환란과 결박이 기다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은 신념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아내와 자식들에게까지 보여주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두로의 제자들은 온 가족 식구들이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 어떤 신념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몸소 깨닫고 도전받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본문)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전해주는 말씀입니다.

바울 일행은 두로에서 배를 타고 최종 정박지인 돌레마이에 당도했습니다.

돌레마이는 두로에서 남쪽으로 30km떨어진 곳인데, 바로 그곳에서 도보로 가이사랴에 당도하여 예루살렘에 갈 생각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돌레마이에 있는 형제들과 일일이 포옹하면서 하룻밤을 묵은 후에, 이튿날 가이사랴로 걸어간 것입니다.

바로 그 사실을 본문 8-9절에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돌레마이에서 가이사랴까지는 남쪽으로 약 60km 거리입니다.

목포에서 화순까지의 거리와 비슷합니다.

바울은 일행과 함께 이틀에 걸쳐서 가이사랴에 당도한 것이었습니다.

 

가이사랴는 지중해 해안가에 위치한 곳으로 헤롯 대왕이 건설한 도시였습니다.

로마 총독이 거주하는 유대 지방의 정치적인 수도였죠.

도시 이름을 가이샤라로 명명한 것은 로마 황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를 기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 가이사랴에 당도한 바울이 누구의 집에 들어갔다고 성경이 증언합니까?

전도자 빌립의 집입니다.

 

대체 전도자 빌립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빌립은 예수님의 직계 제자 중의 한 사람이 빌립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제자와 구별하기 위해 전도자 빌립이라고 칭한 것인데,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최초의 7집사 중 한 사람입니다.

 

빌립 집사는 예루살렘의 제자들이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을 때,

그는 성령에 이끌려 예루살렘을 넘어 사마리아 땅까지 찾아가 복음을 전한 최초의 증인이 빌립 집사였습니다.

그토록 빌립 집사의 활약상이 대단한데 거기서 끝나지 않죠.

그 후에 빌립 집사는 성령에 이끌려 사마리아에서 70km 떨어진 유대 광야로 나가 마차를 타고 있던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나아갔죠.

빌립 집사는 그 내시에게 이사야서를 읽으면서 예수님을 전했고, 물이 있는 길가에 마차를 세워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죠.

 

그만큼 빌립집사는 사도들도 감당하지 못했던 일들을 모두 감당했던 입지전적인 집사였습니다.

그런데 빌립 집사의 활약상을 전해주는 사도행전 8장의 끝은 이렇게 맺고 있습니다.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빌립은 그때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고, 주님의 영에 이끌려 서로 헤어진 후에, 아소도를 거쳐 가이사랴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로부터 28년쯤 지나 그곳 가이사랴에 눌러 앉아 있게 된 상황이죠.

그래서 지금 바울 일행이 빌립 집사의 집에 들어갔다는데, 빌립 집사의 집이 꽤나 큰 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깨달음)그런데 어떻습니까?

젊은 시절, 그 누구보다도 복음의 열정이 순수했고 대단했던 30년 전의 빌립 집사의 모습과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빌립 집사의 모습은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과연 무슨 차이를 보이는 것입니까?

 

그에게 딸 넷이 있는데, 그 집에 아가보라는 대선지자가 와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막아서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때 젊은 시절의 빌립이었다면, 28년 전의 빌립집사였다면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려는 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했을지 모릅니다.

자신이 그런 모습으로 예루살렘을 넘어 사마리아와 유대 광야와 아소도와 가이사랴까지 쭉쭉 나아갔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28년이 지난 마당이고, 그의 네 딸들도 예언할 뿐만 아니라 대예언자 아가보도 말리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빌립 집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려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아서는 모습이라는 사실이죠.

 

이런 모습을 보면서 깨닫는 게 무엇입니까?

젊은 시절의 바울과 젊은 시절의 빌립 집사는 완전히 달랐는데, 28년이 지난 후에는 또다시 달라진 모습이라는 점이죠.

젊은 시절 빌립집사는 그 누구보다도 복음의 열정이 뛰어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젊은 시절의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교회를 핍박하고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폭도였습니다.

 

그런데 28년이 지나면서 둘의 상황은 완전히 정반대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바울은 여전히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 자기 몸을 던지며 나아가려는 모습니다.

그런데 빌립 집사는 그렇게 나아가려는 바울의 발걸음을 막아서는 모습이라는 사실이죠.

 

왜일까요?

빌립 집사는 네 딸이 예언하는 활동을 하고 있고, 그의 집도 대저택으로 꾀나 누릴 게 많이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죠.

젊은 시절에는 혈혈단신이었지만 나이 들어 어쩌면 노역으로 차오른 빌립집사였기에 바울이 가는 길을 막으려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주님은 우리가 늘 초심을 잃지 않고 마지막까지 노욕을 내려놓고 주님의 복음을 위해 사는 은혜를 베푸시길 원하신다는 점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처음 주님을 만난 모습은 다들 제각각일 수 있지 않겠느냐?”

바울처럼 주님의 대적자로 살다가 주님 앞에 거꾸러진 일들도 있고, 빌립집사처럼 주님의 열정이 대단한 이들도 있고 말이다.”

그러나 인생 말년에 갈수록 처음 초심과 완전히 달라진 이들도 있고, 죽음에 이를수록 선한 이정표를 그린 이들도 있지 않느냐?”

빌립 집사는 첫사랑의 감격은 너무나도 뜨거웠지만 28년이 지날수록 이 땅의 노욕에 집착한 인물로 변하지 않았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나이 들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너는 더욱더 선한 좌표를 그려가는 주님의 제자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김진홍 목사도 김삼환 목사도 김장환 목사도 처음에는 선한 영향력을 끼쳤지만 나이들수록 노욕으로 치우치지 않더냐?”

나이 들어 죽음이 임박할때까지 김삼남 전도사처럼 순수한 마음을 잃지 말고, 선한 좌표를 그려가면 좋겠구나.”

바울도 처음에는 주님의 반역자요 교회의 핍박자였지만 나이들어 목숨까지 주님께 내어드렸듯이 말이다.”

 

(찬양)주님 예수 나의 동산 내 맘속에 동녘 하늘

아침햇살 가득 안고 활짝 피는 백합 같아

그 안에서 이 생명도 피어나는 꽃 되리라

오 하나님 이 꽃 바쳐 주의 재단 밝히리니

은혜로운 사랑으로 하늘 평안 내리소서

 

주님 예수 나의 동산 내 맘속에 동녘 하늘

아침햇살 가득 안고 자라나는 나무 같아

그 안에서 이 생명도 귀한 재목 되겠어요

오 하나님 이 재목 바쳐 주의 재단 쌓으리니

은혜로운 사랑으로 하늘 평안 내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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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야긴과 보아스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BR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BR 이 책에는 사무엘서와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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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바울 사도와 빌립 집사의 모습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까?

믿음의 시작과 과정이 중요하다면 믿음의 끝은 더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마무리되지 않으면 참된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런 점에서 볼 때 믿음은 과거형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한 항상 현재진행형이어야 하죠.

언제 어느 때나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손에 나 자신을 내어 맡기는 삶 말입니다.

과거에 주님을 잘 믿었어도 지금 노욕에 사로잡혀 선한 이정표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의 삶은 죽어버린 삶과 다르지 않죠.

하지만 죽음 직전까지 선한 이정표를 그려주고 있다면, 그래서 설령 무덤에 묻힌다해도, 그의 삶은 영원히 살아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 제물이 되어 돌아가셨습니다.

그때의 모습을 누가복음 2346절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 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셨습니다.

육신의 호습이 멎는 순간, 마지막까지 아버지의 손을 붙잡았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깨달음)왜죠?

주님의 그 손이야말로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자의 손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그 손이야말로 죽음을 깨트리고 부활케 하는 생명의 손임을 믿었기 때문이죠.

 

(내음성)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언제 어떤 상황속에서도 주님의 손길에 제 생명을 의탁하며 살게 해 주세요.”

제가 가진 것이나 지식이나 능력으로는 아무런 생명도 살릴 수 없습니다.”

나이들어 주님 앞에 가까이 가는 그 순간까지 노욕이 차오르지 않게 해 주시고, 더욱더 주님 앞에 선한 좌표를 그리며 살게 해 주세요.”

나이든 빌립 집사는 노욕 때문에 주님의 손을 붙잡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마지막까지 결박과 환란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 자기 몸을 내어던지며 주님의 손을 붙잡았습니다.”

저도 마지막 생을 다하기까지 주님의 손을 붙잡고 살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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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주님 예수 나의 동산 내 맘속에 동녘 하늘

아침햇살 가득 안고 활짝 피는 백합 같아

그 안에서 이 생명도 피어나는 꽃 되리라

오 하나님 이 꽃 바쳐 주의 재단 밝히리니

은혜로운 사랑으로 하늘 평안 내리소서

 

주님 예수 나의 동산 내 맘속에 동녘 하늘

아침햇살 가득 안고 자라나는 나무 같아

그 안에서 이 생명도 귀한 재목 되겠어요

오 하나님 이 재목 바쳐 주의 재단 쌓으리니

은혜로운 사랑으로 하늘 평안 내리소서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손길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우리가 나이 들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무엇을 붙잡고 살아야 할지 더욱더 깨닫게 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마지막까지 붙잡고 살아야 할 것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손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을 붙잡고 살아가는 동안, 마지막 호습을 거둬가시는 그 순간까지 선한 좌표를 그려가며 주님 품에 안길 줄 믿습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노욕으로 가득차 있다면 우리도 빌립 집사의 전철을 밟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은 주님 부르시는 그 날까지 선한 좌표를 그려가며 주님의 손을 붙잡고 주님 품에 안길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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