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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sabeth Kübler-Ross)는 스위스 출신의 미국 정신과 의사다. 그는 최초로 임종학을 했고 죽음에 대한 수많은 강의를 했다. ‘죽음의 5단계’를 처음으로 이야기한 이도 그다. 일례로 의사가 암이라는 진단과 함께 얼마 살지 못한다고 하면 맨 먼저 부정하고, 분노하고, 이후에 협상을 하고, 그 다음엔 초연해지거나 웃음기를 잃고 하루 종일 멍한 표정을 하거나 울기도 하고,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이 지나간 후에는 피할 길이 없다면서 수용하게 된다는 게 그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로스가 암에 걸리자 감당치 못했다고 한다. 그때 그의 모습을 바라본 한 기자가 물었다고 한다. “당신은 임종하는 사람을 지켜보며 그렇게 많은 희망을 줬는데 왜 정작 당신의 죽음 앞에서는 화를 내고 있습니까?" 그때 로스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은 타인의 죽음이었어. 동물원 철장 속에 있는 호랑이였지. 지금은 아니야. 철장을 나온 호랑이가 나한테 덤벼들어. 바깥에 있던 죽음이 내 살갗을 뚫고 오지. 전혀 다른 거야.”
“내 딸 민아가 죽기 전에 정말 충만한 시간을 보냈다네. 일 년간 한국에서 내 곁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지. 죽음에 맞서지 않고 행복하게 시간을 쓴 거야. 암에 걸렸어도 영적인 힘으로. 그 아픈 4기가 지나 온 몸에 암세포가 퍼지는데도, 두세 시간 강연을 했지. 육체가 소멸하기 마지막까지 복음을 전했고, 기도드리고 쓰러져서 대여섯 시간 있다가 운명했다네.”
시대의 지성(知性)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인터뷰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 나온 이야기다. 이어령 교수는 복막암에서 시작된 암세포가 맹장과 대장과 간으로 전이된 것을 알았을 때 암과 투병치 않고 친병으로 받아들였다. 그도 부정하고 분노하고 우울할 수도 있었지만 끝내 수용한 것이다. 물론 일반 사람들처럼 수용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면 언제라도 글을 쓰다가 되돌아갈 준비를 한 것이었다.
그가 지성의 세계에서 영성의 세계로 발돋움한 계기가 뭘까? 그의 딸 때문이다. 그의 딸 이민아가 2006년 망막박리로 실명 위기를 겪을 때 처음으로 그는 주님께 간구했다. “하나님. 민아가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내일 또 볼 수 있게 해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
그런데 의술로도 안되는 그의 망막박리가 하나님의 기적으로 낫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어느 날 아침 그의 딸이 집을 나서면서 ‘아빠 다녀올게’하는데,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이어령 교수의 심령에 찾아오셨다. 똑같은 일상의 아침이었지만 전혀 다른 빛 가운데의 아침으로 말이다.
그때 비로소 그가 예수님께 회개하며 돌아왔고 지상(地上)의 세계만 구축하던 그가 영성(靈性)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다. 그래서 암세포가 장기에 전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때 그가 투병하지 않고 딸처럼 육체가 소멸할 때까지 글을 쓰면서 주님의 나라를 준비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10년 전 천국으로 떠난 그의 딸처럼 89세의 일기로 지상의 세계를 마감하고 천국의 세계로 돌아간 것이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마28:6-7)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셨다. 그러자 유대 당국자들은 안식일이 다가오기 전에 예수님의 시신을 처리코자 했다. 그때 유대 관원 중 하나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했다. 자신이 머잖아 묻히려고 준비해 놓은 새 동굴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코자 함이었다.
그렇게 해서 모든 게 끝나는 것 같았다. 유대 당국자들은 더이상 예수님의 활약상에 대해 고민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이 계획한 거짓과 불의의 음모가 진리와 생명의 빛을 완전히 차단하고 짓밟아 버렸다고 생각했다. 지난 3년 동안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가 말끔히 사라졌다고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로 시체 속에서 다시 살아나셨다. 물론 ‘부활하셨다’는 헬라어 단어 ‘아나스타시스’(ἀνάστασις, resurrection)가 있지만 사복음서 기자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네크로스’(νεκρός)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 이유가 뭘까?
2천 년 전 유대인들은 ‘부활’이라는 개념을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며 부정을 하거나, 신화 속에 있을 법한 일로 여겼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사복음서 기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단어를 선택해서 사용한 것이다.
‘죽은 자’란 말은 얼핏 보면 고상한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시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시체란 심장 박동이 멈춰버린 상태를 말한다. 시체는 부패하고 냄새나기 때문에 모든 이들로부터 격리의 대상이다. 시체를 무덤에 묻거나 화장을 해서 한 줌 재로 흩날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시체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죄와 사망을 꿰뚫고 생명의 몸으로 부활하신 것이다. 씨앗이 땅에 묻혀 썩지 않고 새싹으로 솟아오르듯 주님께서 살아 오르신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예수님의 무덤이 없다는 게 그 첫 번째 증거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증인들이 많다는 게 두 번째 증거요, 지금까지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그 삶이 변화된 사람들이 많다는 게 그 세 번째 증거다.
이어령 교수가 영성의 세계로 발돋움 한 것도 그 세 번째 증거 중 하나다. 그 사실 때문에 어어령 교수는 암세포가 점점 퍼져가는 상태 속에서도 투병하지 않고 관찰하면서 마지막 천국을 바라보며 산 것이다. 마지막 죽기 직전 호흡수가 급격하게 떨어지고, 턱을 상하로 움직이며 ‘턱 호흡’을 하고, 촛불이 꺼지기 직전 한 번 환하게 비추고 꺼지듯이 그의 동공이 마지막 환히 열릴 때, 비로소 그의 영혼이 천국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았기에 죽음에 맞서지 않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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