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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억울한 일을 당한 적이 있으십니까? 자신은 잘못하지 않았는데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다면, 그 억울함을 누군가에게 하소연이라고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만약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기를 당했다면,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면 또 어떻겠습니까?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갑작스레 고난을 겪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모든 경우에 억울하다면서 울부짖고 싶지 않겠습니까? 신문이나 뉴스를 보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기사가 약자의 억울함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만큼 억울함은 한으로 남게 됩니다. 가슴을 짓누르는 한은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며, 밤마다 눈물로 지새우게 하죠.
오늘 본문의 다윗 곧 시편 기자가 그런 상황입니다. 그는 자기 억울함에 답답해하며 하소연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과연 그가 누구에게 하소연하고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기 억울함과 통한 사정을 아뢰고 있습니다.
1절에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시인은 자신을 ‘완전한 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완전함이 무죄를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볼 때 그의 원수들보다 상대적으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자기 자신의 부당함을 호소하기 위해서 그들보다 완전한 자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며 호소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하는 호소가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부터 드리는 간절한 호소의 기도입니다.
이어서 다윗은 자신을 살피고 시험하며, 단련하시길 간구합니다. 2절에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여기에서 사용된 ‘살피다, 시험하다. 단련하다.’의 세 동사는 모두 ‘시험하다’는 뜻입니다. 이 세 동사는 단순히 겉모습만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주님 앞에 조명하고자 하는 강한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인자하심으로 자기 자신을 환히 비춰주기를 바라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3절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다윗은 자신의 인생 앞에 항상 주님의 인자하심이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다위이 주님을 인식하며 살았다는 반증입니다. 내 앞에서 나를 지켜시며, 인도하시는 그 하나님을 인식하였기에, 그의 삶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인식하는 삶은 항상 주의 진리 가운데 행하도록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3절b-5절이 이렇습니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주님을 인식하는 삶이란 당연히 주님께서 싫어하는 일들을 행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간사한 자는 두 마음을 품은 자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자들은 악한 생각의 마음을 감추고 겉으로 선인인 척 행하는 ‘외식주위자들’이죠.
시인은 자신의 정직성을 간직하며, 진리 중에 행하기 위해 허망한 자, 거짓된 자, 간사한 자와 교제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을 보호하며 지켜나갑니다.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 역시 자신을 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스스로 행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보살피시지만, 우리가 악인의 길로 행한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고, 이제 하나님 앞에 나오기 전 자신의 손을 씻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나오기 전에 손을 씻으며 타인의 악행과 상관없이 자신은 무죄함을 고백하였습니다.
6-7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예측할 수 없는 완벽한 섭리는 우리가 찬양하는 주제가 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섭리를 경험한 시인은 계속해서 그러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시인은 온전히 악의 무리에서 떠나야 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악인의 자리를 떠나 온전히 행한다는 것은 연약한 육체의 몸을 지닌 우리에겐 혼자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8-9절을 이렇게 읊조리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시인은 악인들과 함께 자신의 생명이 휩쓸리어 잃어버리지 않기를 구합니다. 그는 분명 하나님의 심판을 인식하며 이처럼 기도했을 것입니다. 악인을 미워하시는 주님께서 그의 심판 날에 모든 악인들을 쓸어버릴 것이라고 말이죠.
사실 심판의 자리, 멸망의 자리에 서 있지 않기를 간구하는 것은 매우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자신조차도 책임질 수 없고, 언제든지 주님을 배신할 수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은 자신의 죄에 대해 손을 씻지 않습니다. 그들의 사악함과 욕심은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장벽이 되어 결국 심판에 이를 것입니다.
그만큼 장벽은 너무나 높기에 스스로 악인이라는 사실조차 바라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는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악의 형벌로 자신을 끌고 가는 모습이 됩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손으로 악행을 일삼으며, 그 손으로 스스로의 목을 조이는 꼴이 되죠.
그래서 10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그들의 손에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시인은 주님 앞에서 완전히 행할 것을 다짐하며 또 다짐합니다.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겠습니다.’ 그의 다짐과 각오는 강한 의지가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의 뜻을 따라 살기를 바란다면, 이처럼 날마다 주님 앞에 다짐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소원의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굳어지지 않게 하며 주의 말씀과 은혜를 온전히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러한 자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으며, 평탄한데 거하여 날마다 주님을 찬양하는 삶이 됩니다.
그래서 12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시인은 처음에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하여 주님 앞에 섰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억울함은 한이 되지 않았고 그의 인생이 불행하게 마감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기적들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과 늘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고 그의 인생이 얼마나 복된 자의 삶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억울한 인생이 아닌, 하나님을 찬양하는 복된 자의 삶을 살고자 다짐합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는 진정으로 복된 자의 삶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어떤 형편과 처지 속에서도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에만 가능한 법입니다. 우리 모두가 늘 하나님과 동행하묘, 하나님을 인식하며,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온전한 길을 좇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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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우리는 때로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억울한 일들 때문에 가슴 아파하며 소리내어 주님 앞에 나올 때가 있습니다. 주님. 바라옵기는 그럴 때 마다, 자신이 행복한 사람임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허망하고 헛된 일에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게 하옵시고, 오직 죄의 길을 떠나 의인의 길을 선택하며 다짐하게 하옵소서. 그러 할때 우리의 인생 여정 가운데 주님께서 늘 동행하여 주시며,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의 목전에 있음을 감사로 찬양하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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