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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시편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시22:1-31)

by 똑똑이채널 2022.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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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시편 22편은 내일 살펴볼 시편23편 앞에 나온 시편입니다. 시편 23편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든지 안 다닌 사람이든지 대부분 알고 있죠. 그런데 그 23편 앞에 나오고 있는 22편은 믿는 자들 중에서도 알려지지 않는 시죠. 시편 22편이 고난받는 메시아에 관한 시로서, 그만큼 믿는 자들이 품고 있는 관심사가 이 땅의 번영과 행복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 시편 22편을 놓쳐서는 안 될 게 있죠. 이 시편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곧 고난과 직결돼 있고, 그 속에서 보다 성숙한 신앙인들이 갖춰야 할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22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1-11절까지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받은 자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고, 둘째 부분은 12-21절까지로 고통받는 내용을 설명하며 도움을 위한 기도를 드리고 있고, 셋째 부분은 22-31절까지로 하나님께 희망을 두는 고백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시편 22편이 갖는 중요한 의미 하나는 제 5복음서라고 불릴 만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일치되는 내용이 많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그리고 6-8절까지는 군중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하는 장면을 읊조리고 있습니다. 17-18절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고백입니다. 마지막 31절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하시면서 숨을 거두시는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께서 직접 십자가에서 달리셨을 때 시편22편의 성경 기자와 자신을 동일시 하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편22편을 예수님의 십자가 시선으로 살펴보면 이해하기가 쉽겠죠. 그중 첫 번째 부분의 말씀은 하나님에게 버림당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아무리 하나님께 울부짖어도 응답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내 고통을 외면하시고 계시다는 고백이죠. 거기다 6절 하반절은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조롱한다는 거죠. ‘그렇게 기도하고 하나님 신뢰하는데, 하나님이 널 구해 줄텐데, 왜 도와 주지 않는 것이지하며 조롱한다는 것이죠.

사실 인간 세상의 경쟁에서 실패하거나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되면 사정없이 짓밟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심령 속에 뿌리 박혀 있는 죄성 때문이죠. 그것은 성도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집사, 장로, 목사라고 해서 결코 다른 게 아니죠. 다들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근원에 깔려 있기는 마찬가지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손가락질 하기 마련이죠. 진실이나 정의를 아는 것에 상관없이 그냥 돌을 던짐으로서 나는 돌 맞는 너와 다르다는 걸 과시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조롱을 당하셨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 십자가 밑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군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무시했죠. 사흘 만에 성전을 짓겠다는 자여. 남은 구원한다고 하면서 너는 구원치 못하냐? 십자가에서 한 번 내려와봐라.’ 그렇게 조롱한 그들은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성전을 짓는다는 말의 진실이 무엇인지 관심이 없었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구원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았죠. 단지 그들은 이 세상의 힘에 밀려 패배하고 실패해 보이는 연약한 한 인간만 바라볼 뿐이요 동조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군사들이 때릴 때 똑같이 때렸고, 조롱할 때 똑같이 조롱한 그들이었죠.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라고 과연 다르겠습니까? 그렇지 않죠. 내가 그 상황이라면 우리도 예외없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치쳤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누군가의 연약함이나 실패나 패배가 드러나면 우리도 똑같이 조롱하고 물어뜯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나는 너보다 더 나은 인간이야하는 교만과 악함을 보였을지 모르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 위애서 조롱당하고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죠.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 외에 어떤 말씀도 없으셨고, 심지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지지 않으면 인간의 죄성과 악함이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아들 예수께서 고통당할 때 함께 고통당하신 것이죠. 맬깁슨 주연의 미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에서도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아들 예수를 어머니 마리아가 차마 눈 뜯고 보지 못한 장면이 나오죠. 그러니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어찌 그 아들이 죽는 모습을 보고만 계셨겠습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침묵 속에서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고통당한 아버지이셨죠.

 

본문 14절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자세히 설명하는 고백입니다. 피가 물 같이 쏟아지고 뼈가 어그러졌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극한 고통에 처한 상황이죠.

그런 상황 속에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19절에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무엇을 일깨워주는 고백입니까?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은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고통이 아니라는 것이죠. 예수님은 가장 극심한 영적인 고통과 실제적인 육체의 고통을 함께 당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한 고통 또한 영적인 것이자 또한 실제적인 것임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인생 속에서 직면한 고통이 기도를 열심히 하고 봉사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급속하게 사라지는 게 아니죠. 오히려 우리의 심장을 후벼팔 정도로 깊숙이 파고드는 게 고통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도 물론이요, 이스라엘의 백성들도 예외일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22절부터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22절부터는 세 번째 단락으로 들어가게 되죠. 22절에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갑자기 고통당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하는 모습입니다. 참으로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죠. 그렇게 고통 중에 신음하다가 갑자기 이런 마음의 변화를 가져오는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께서 단순히 악한 자들, 괴롭히는 자들, 그 문제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요? 십자가 상에서 고난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 속에는 그런 장면이 연출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고백을 드린 그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24절을 보면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무응답의 응답, 바로 그것이 해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울부짖을 때 무응답으로 일관하셨지만, 단 한 순간도 얼굴을 돌리지 않고 듣고 계셨다는 것이죠. 다윗이 고통으로 신음할 때나 우리가 고통 가운데 눈물을 흘릴 때 하나님께서는 결코 외면하는 분이 아니라 함께 아파하고,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고통 중에 감사할 이유라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신앙심이라는 게 우리에게 직면한 어려움을 해결하는 도깨비 방망이와 같은 것이라면 시편 22편과 같은 신앙고백을 할 수가 없죠. 시편 22편 기자는 그 고통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얼굴을 발견했고, 예수님 또한 그 십자가에서 그런 하나님을 발견하고 바라봤고 끝까지 의탁했다는 점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그렇게 하나님을 의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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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해결받는 것, 꼭 그렇게만 해결하는 방식을 원하는 것, 그것은 마치 도깨비 방망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꼴일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성숙한 신앙인들로서 그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하시옵소서. 그것이 더욱더 참된 신앙인의 자세임을 갖추는 이 시대의 다윗, 이 시대의 주님의 제자로 살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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