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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묵상LifeBible

“내 아버지는 물구덩이에 빠질 때도 옆에 계셨대요”

by 똑똑이채널 2022.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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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안 사실인데, 내가 지팡이를 짚고 대문을 나서면 아버지가 발소리를 죽여가며 저만큼 뒤에서 나를 따라오셨대요. 내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물구덩이에 빠질 때도 옆에 계셨대요. 만약 그때 아버지가 거기 위험하다, 이쪽으로 가라고 손을 잡고 이끌어주셨다면 오늘날의 저는 없을 겁니다. 아버지가 속울음을 삼키면서도 내가 혼자 설 수 있게 묵묵히 버텨주신 게 나를 온전히 성장시켜주신 겁니다.”

 

전북시각장애인 도서관장 송경태 씨의 말이다. 천석꾼의 집안에 태어나 부러울 것 없이 자란 그가 1982년 군입대 후 40일 만에 사고를 당했다. 무기고를 정리하다 수류탄 사고로 시력을 잃은 것이다. 사고 후 6개월간 세 번의 수술을 했지만 볼 수 없었다. 여섯 번 자살을 시도했고, 집 앞 저수지에 투신했고, 철길에 누워버렸다. 그때마다 동네 사람들이 건졌다. 그런 그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어느 시각 장애인의 사연을 듣고 점자책을 읽었고 지팡이를 더듬으며 대학을 다닐 때, 그때 모습을 회상한 것이다.

 

그 당시 친구들은 그가 대학에 다니는 것을 만류했다. 동네 사람들도, 혼자 다니다가 구덩이에 빠지면 황천길 간다고, 손사레를 쳤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달랐다. 장애를 극복한 사람도 많다며 오히려 아들을 북돋아 준 것이다. 다만 돌부리에 넘어질까, 물구덩이에 빠질까, 아들 몰래 뒤따라다닌 것이다. 위험할 땐 이쪽으로 가라고 손을 잡아 주고 싶었지만, 그때도 울음을 삼키며 묵묵히 격려한 것이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22:14)

 

시편 22편은 다윗이 쓴 시다. 이 시는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길 때 혹은 아들 압살롬을 피해 왕궁에서 달아날 때 읊조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대전승 미드라쉬는 이 시를 부림절에 읊조리는 것으로 보고 있다. 유대민족이 몰살할 위기 속에서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을 만나고자 마음을 졸이며 안뜰로 들어가는 그 장면을 떠올리면서 말이다.1) 기독교에서는 이 시를 메시아 수난과 영광을 예언한 시로 삼는다.

 

이 시는 다윗의 형편과 관련해 세 가지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적들이 도처에 애워싸고 있다는 점, 도와주는 이가 없어서 버림받았다는 것, 그러나 그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강한 믿음을 드러낸다는 게 그것이다. 이것은 에스더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주변 적들에게 둘러쌓인 모습, 왕 앞에 나아가지만 거절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는 모습, 그러나 그 속에서도 죽으면 죽으리라 결단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며 왕 앞에 나아가는 모습이 그것이다.2)

 

물론 이 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장면과 생생하게 겹친다. 그분의 황폐한 외침(1, 15:34), 굴욕적인 대우(68, 1213, 27:3944), 제비뽑기(18, 27:35) 등이 그렇다. 더욱이 뼈가 빠지는 고통으로 진액을 쏟는 모습(14), 기력이 소진돼 극심한 갈증을 느끼는 모습(15), 손과 발에 대못이 박히고 옆구리에 창이 찔리는 모습(16)이 그렇다. 다윗의 예언자적인 이 시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성취된 것이다.

 

그런데 죽음의 고백으로 끝날 것 같은 이 시의 후반부에 반전이 일어난다. 다윗이 찬송을 부르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대적들이 물러간 까닭일까? 바로 이 모습을 통해 십자가에서 고난 당한 예수님을 떠올릴 수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절규하는데 하나님은 못 들은 척 외면한다. 그로 인해 벌레처럼 버림받은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진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때도 무응답의 응답으로 예수님을 격려한 것이다. 그래야 인류를 향한 대속을 완성할 수 있고 부활의 영광을 이루기 때문이다. 다윗도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찬양한 것이었다.

 

시각장애인 송경씨는 20075월 아들 송원과 함께 해발 3,0004,000m고지의 칠레 아타카마 사막 250km코스를 67일에 걸쳐 완주했다. 사하라 사막, 고비 사막에 이은 세계 3대 사막이었다. 그때 어느 기자가 송 관장에게 질문했다. 산소가 희박한 그곳, 평지가 거의 없는 험난한 그 코스를 달리며 포기하고픈 유혹이 없었냐고 말이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왜 없었겠어요.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던 중요한 이유는 아들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포기하면 아들도 포기할까봐 이를 악물고 달렸습니다

 

그 고백은 그의 아들도 같았다. 처음 그 마라톤에 참여한 아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아버지의 눈인데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대회 4일째 무릎에 이상이 생겼지만 아버지가 저렇게 달리시는데하며 끝까지 달렸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은 250km 결승 지점을 통과하고 난 후  오랫동안 포옹한 것이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도 그와 같지 않겠는가? 자식이 시력을 잃었을 때 홀로 설 수 있도록 묵묵히 격려하는 모습 말이다. 자식이 인생의 마라톤을 포기하지 않도록 묵묵히 이끌어주는 모습이 그렇다. 대적의 위협으로부터 건져달라고 울부짖는 다윗을 향해 홀로 서도록 침묵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다.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절규하는 독생자의 탄식 앞에 무응답으로 응답하신 하나님의 격려하심이 그렇다. 그것이 십자가의 대속을 이루는 길이자 부활의 승리를 완성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자녀가 울부짖을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결코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다.

 

 

1)https://www.thetorah.com/article/my-god-my-god-why-have-you-forsaken-me-jesus-or-es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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