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힘들고 어려울때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나를 가장 기억에 줄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 중에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은 1%도 안될 것이고, 99.9% 사람들은 나를 모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알아주시고 가장 먼저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하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다윗이 70세의 일기로 그 수명을 다하는 시점에 쓴 고백록입니다. 말하자면, 사무엘하서가 24장으로 끝나고 열왕기상 1장으로 이어지는데, 열왕기상 2장에서 다윗이 자기 왕위를 솔로몬에게 넘겨줍니다. 그때도 마지막 유언을 남기는데, 오늘 본문에서도 그 마지막 유언과 같은 고백을 남기는 상황입니다.
다윗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왔습니까? 그는 배다른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나, 양치기에 내몰렸죠. 그렇지만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하며 살았던 그였고, 그 속에서 곰과 사자의 발톱에서 양들을 지켜내는 물맷돌의 실력 곧 자립심을 키웠죠.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로 하여금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게 했죠. 그것이 그의 나이 15살때의 일이었고, 이후 골리앗을 죽인 후에 사울의 칼날을 피해 8년 넘게 근 10년 가까이 도망자 삶을 살았죠. 그리고 사울이 죽은 뒤에 그의 나이 30살에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고, 7년 6개월간 그곳에서 살면서 위로 하나님과 연합하고 아래로 백성들과 연합하여 난공불락의 여부스 성읍을 점령한 후에 예루살렘으로 명명하여 그곳으로 천도를 해, 37살에 온 지파의 왕이 되었죠. 그 후에 10년간 이방 지역들을 정복했고, 그의 나이 47살 때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본문 마지막 절에 나오는 충직한 37명 중의 한 장수인 우리아를 적의 칼에 죽게 만든 살인죄를 저지른 다윗이었죠. 물론 사울 왕과는 달리 다윗은 죄를 지적받았을 때 ‘내가 범죄하였나이다’하면서 회개했죠. 하지만 다시는 그와 동일한 죄를 짓지 않도록 10년간 죄의 후유증에 시달리며 살았죠. 그 과정 중에 압살롬이 죽고 다시금 예루살렘 궁으로 환도했을 때, 3년간 기근에 시달렸는데, 그로부터 60대의 과정을 지나 나이 70이 된 지금, 마지막에 하나님께 고백한 상황입니다. 그야말로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는 고백과 같지 않겠습니까?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해 1절 하반절에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 부터 기름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 다윗은 자기 자신을 ‘왕’이 아니라 ‘이새의 아들’로 소개합니다. 이 표현은 자기 자신을 낮출 때 종종 쓰던 표현이었습니다. 사울 왕이 물어볼 때에도 ‘이새의 아들 다윗’입니다, 하고 이야기했던 적이 있죠. 그만큼 자기 자신의 신분을 낮추는 것, 구체적으로 말해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 참으로 비천한 신분임을 밝히는 것이죠.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 받음을 통하여 왕이 된 자요, 그렇게 자신의 능력은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 게 아니라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로 표현하는 것은 노래 잘하는 것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유일하게 잘하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임을 밝히는 고백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시골 촌뜨기에 불과한 자신을 왕으로 기름 부어 주셨는데, 어찌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는 고백입니다.
그런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밝힌 다윗이 3-7절의 시를 통해 고백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는 자의 삶과 그렇지 못한 자의 삶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3-5절에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하나님 앞에 복을 받는 자의 모습은 위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래로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라는 뜻입니다. ‘공의’란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함을 뜻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속한 속성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공의롭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나오는 성품이죠. 그래도 다윗이 공의로 나라와 백성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요, 죄를 범했어도 즉시 회개할 수 있었던 것도 그만큼 하나님을 경외한 데서 비롯된 것이요, 실은 그것이 복된 삶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런 관점으로 살아갑니까? 아닙니다. 오직 자기 소원과 자기만족을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가죠. 그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도 걱정과 근심에서 해방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더 분발하지 못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더 정성을 쏟지 못해서 그런가? 아닙니다. 5절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하죠. 하나님 앞에서, 이는 히브리어로 ‘엘임’인데, 문자적으로 ‘하나님과 함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바로 세상의 걱정과 근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생의 최고 목표가 자기만족과 자기 소원 성취가 아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것이죠. 하지만 다윗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고, 그걸 축복의 통로로 삼은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5절 하반절에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하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다윗은 이 땅에 살면서 가장 최우선으로 삼았던 게 주님과의 관계요, 주님과의 동행이요, 그걸 백성들에게 드러내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동행하지 않는 자는 어떤 모습입니까? 6-7절에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버려질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 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철과 창자루를 가져야 하리니 그것들이 당장에 불살리리로다 하니라” 사악한 자는 다 버려질 가시나무 같다고 고백합니다. 열매 맺지 못한 앙상한 가지만 붙어 있는 나무들은 실은 쓸모없게 되고 맙니다. 그런 나뭇가지는 머잖아 장작으로 불살라지기 때문이죠. 그만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는, 최후 심판의 날에 불사름을 당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본문 8-39절은 다윗과 함께 한 용사들의 이름을 밝힌 내용입니다. 다윗이 살아오면서 그와 함께 이스라엘 왕국을 위해 충성을 다한 용사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을 영원토록 기억하고자 그 명단을 기록한 것입니다. 8-12절은 첫 번째로 큰 세 용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요셉밧세벳’, 둘째는 ‘엘르아살’ 그리고 셋째는 ‘삼마’입니다. ‘요셉밧세벳’은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불렀는데, 군장의 두목인 그는 단번에 팔백 명을 죽인 용사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엘르아살’은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싸우던 중 이스라엘이 후퇴했을 때 싸움을 도운 용사로서 손이 굳어서 풀리지 않을 때까지 칼을 놓지 않고 싸운 용사로 소개합니다. 세 번째 ‘삼마’는 블레셋과 녹두밭에서 전투할 때 이스라엘이 도망하던 중 홀로 적군을 맞서 싸웠던 용사로 소개합니다.
13-23절은 두 번째로 큰 세 명의 용사들입니다. 이들 세 용사들은 추수가 시작될 때 아둘람 동굴에 있던 다윗에게 베들레헴 성문 곁의 우물물을 길어다가 마시게 할 정도였는데, 그 세 명의 부하 장수는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친 블레셋 군대를 뚫고 들어가 우물물을 길러온 자들이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그들이 길어온 물은 단순한 물이 아니라 피눈물이라면서 마시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들의 충성과 헌신을 잊을 수가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24-39절은 다윗과 전쟁터를 누빈 37인의 용사들 명단인데, 다윗은 그 한 명 한 명의 명단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바로 밧세바의 남편 곧 우리아도 포함돼 있는 것이죠.
오늘 이와 같은 말씀 속에서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다윗의 인생길에 함께 한 사람들을 다윗이 기억해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몸을 바친 이들을 어찌 하나님께서 잊을 수 있겠냐는 것이죠. 이 세상 사람들 중 나를 아는 사람은 1%도 안될지라도, 99.9%의 사람들이 나를 모른다 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해주시면 그것으로 족할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그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인정받고 살아가는 하루의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무명의 촌뜨기에 불과한 다윗을 지켜주신 아버지 하나님.
그의 인생길에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이들을 다윗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 중 99.9%는 나를 몰라줄지라도,
부족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아가는 저희들을 하나님께서는 기억해주시고 상급을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도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성령님께 묻고 성령님의 감동과 감화 속에 하루를 살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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