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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사무엘하

바르실래에게 입을 맞추고 복을 비니(삼하19:24-43)

by 권또또 2021.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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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 꽃밭 옆 복분자

사람은 자기 유불리를 따져 때때로 변신을 꾀합니다. 하지만 신실한 크리스천은 자기 유불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신실하심을 한결같이 바라보며 좇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상급받는 비결이요, 하나님과 더 깊은 소통의 장을 넓히는 길이기 때문이죠.

 

다윗이 전쟁이 끝나고 이제 예루살렘 궁으로 돌아옵니다. 그 길목에서 자기 반대편에 섰던 자들을 내치고 베어버리는 게 아니라 통큰 차원에서 수용하는 마음을 보여줬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압살롬과 쿠데타를 주도한 유다 장로들을 품었고, 압살롬의 군대장관으로 나선 ‘아마사’ 요압 장군 다음 가는 장수로 발탁하겠다고 약속했고, 그리고 요단강을 건널 대 나온 시므이라는 자, 이전에 다윗이 피난길에 오를 때 저주하고 욕하고 먼지를 날린 그 시므이마저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했죠.

다윗이 왜 그렇게 자기 반대편의 사람들에게 혜량을 베푸는 것입니까? 미물보다 못한 자기 자신이 죄를 저질렀을 때, 하나님께서 그 죄의 후유증을 겪게 하시면서도, 여전히 자기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기 때문이죠. 나의 나된 것은 주님의 은혜임을 아는 것이었죠.

 

 

오늘 본문은 어제 읽은 내용과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다윗이 유다 지파의 장로들을 품고, 압살롬의 군대장관 아마사도 품고, 또 자신을 향해 저주하고 먼지를 날린 시므이도 품고, 이제 요단강을 건넌 상황인데, 두 사람이 더 나타납니다.

첫 번째 사람이 누구입니까? 본문 24절에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 두 발이 절뚝발이인 므비보셋이죠. 그가 지금 다윗 왕 앞에 나와 절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전에 다윗 왕이 피난길에 오를 때, 자기 자신에 대해 거짓을 고한 시바의 일을 변론하고픈 마음 때문에 나온 것이죠. 그의 종 시바가 수많은 먹을거리를 가지고 왕 앞에 나와서 한 이야기가 무엇이었습니까? 다윗에게 자기 주인 므비보셋을 음해했었죠. 므비보셋이 지금 사울 왕의 왕위를 이어나가려고 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죠. 두 발이 절뚝발이인 자기 자신,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죽은 개 같은 자기 자신을 알아봐주고, 자신을 왕의 상에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었고, 또 사울의 밭을 다 자신에게 준 다윗왕인데, 어찌 왕을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시바가 피난 길에 오른 다윗 왕에게 므비보셋에 대해 거짓을 고한 것은 주인의 재산을 모두 자기 것으로 취하고자 한 욕심 때문이었죠. 므비보셋은 지금 그 사실을 다윗 왕에게 고해 바치는 것입니다. 그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왕이 피난길에 오를 때부터 지금 돌아오는 길목에 이르기까지 나는 수염도 깎지 않고, 또 옷도 빨지 않는 모습으로 왕의 슬픔에 함께 해 온 자입니다, 하고 자기 자신의 진정성을 고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 왕이 왜 그때 나와 함께 가지 않았느냐, 하고 물을 때 므비보셋은 본문 26-28절을 통해 사실대로 말하죠. 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인 나는 다리를 절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그 위에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내 종이 나를 속이고 종인 나를 내 주 왕께 모함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내 아버지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내게 아직 무슨 공의가 있어서 다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 하니라.”

므비보셋은 그때 자신도 왕과 함께 나귀를 타고 피난길에 오르려고 했지만 시바가 나를 속여서 함께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한다 한들 왕의 마음에 어찌 흡족할 수 있겠습니까? 어떠한 죄라도 물으시면 달게 받겠습니다. 저는 그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기억해주신 것만으로도 족할 뿐입니다, 하고 이야기하는 상황입니다. 그때 다윗은 므비보셋의 진심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이전에 시바에게 줬던 모든 재산의 절반을 므비보셋에 주라고 하는데, 그때 므비보셋은 그냥 시바에게 다 주도록 청을 하죠. 그만큼 자기 자신은 시바와 달리, 어떤 욕심도 없이, 왕을 위해 진정으로 아파해 왔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본문 31절에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그입니다. 32절에 그는 나이가 80세로서 다윗보다 20세는 더 어른이죠. 그는 큰 부자인데, 이전에 사무엘하 17장 끝부분에 보면 다윗이 마하나임의 피난길에 머물고 있을 때 암몬 족속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 또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 그리고 본문 속의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 그들 세 사람이 나와서 수많은 먹을거리와 침상과 대야까지 가지고 나와서 다윗을 섬겼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 다윗 왕이 요단을 건너 왕궁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지금 그 바르실래가 나와서 인사를 하는 상황이죠.

이때 다윗이 바르실래에게 함께 왕궁으로 가자고 이야기하는데, 바르실래는 34절을 통해 내가 80세인데 앞으로 살날도 많지 않으니, 내가 왕궁에 가면 왕께 오히려 누를 끼칠 수 있습니다. 그저 내 고향 땅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조상들의 묘로 돌아가겠습니다, 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다만 제 자식 김함이 있사오니 왕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보살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하고 이야기하죠. 그때 다윗은 38절을 통해 김함이 나와 함께 건너가리니 나는 네가 좋아하는 대로 그에게 베풀겠고 또 네가 내게 구하는 것은 다 너를 위하여 시행하리라 하니라.하고 약조하죠.

 

그렇게 해서 다윗은 요단강을 건너 한결같은 사람들을 배려하며 상급을 내려줬습니다. 이제 그 요단강 앞에 다윗 왕을 환영하러 나온 사람들을 소개하는 장면이 본문 41-43절 말씀입니다. 이른바 온 유다 백성들과 이스라엘 백성들 절반이 다윗 왕을 환영하러 온 모습이죠.

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 왕에게 불만을 터트리고 나서죠. 이전에 압살롬과 함께 왕을 몰아내고자 쿠데타를 벌인 이들이 유다 백성들인데, 왜 왕께서 그들을 감싸시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때 다윗은 가만히 듣고 있는데, 유다 지파 사람들이 나서서 말을 합니다. 왕께서 우리를 감싸시는 것은 왕이 우리의 종친인 까닭인데, 지금 왕궁으로 돌아오시는 왕께서 그것까지 일일이 너희 지파 사람들에게 다 고변해야 할 상황이냐, 하고 강경하게 대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왜 그들이 그렇게 강경하게 나서는 것일까요? 자신들이 이전에 압살롬과 더불어 실수한 것을 그렇게라도 해서 덮고자 한 것임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방구 뀐 놈이 성낸다는 꼴이 꼭 그 짝인 셈이죠.

 

 

오늘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의 마음은 환경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보다 한결같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다윗이 피난길에 오를 때에 다윗을 배반한 사람, 이용하려 한 사람, 저주한 사람도 있었죠. 반면에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다윗을 배반한 유다 지파 사람들, 다윗을 이용한 시바, 다윗을 욕하고 저주한 시므이도 있었죠. 그들이 이제는 다윗이 돌아온다고 하니까 다들 변신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죠.

그러나 그런 그들과는 달리 피난길에 오를 때부터 지금 왕궁으로 돌아오는 길목에까지, 한결 같이 다윗과 함께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추구한 사람들이 있죠. 왕의 피난길부터 지금까지 자기 수염도 깎지 않고 의복도 빨지 않으면서 다윗을 위해 아파한 므비보셋, 또 왕이 마하나임의 피난길에 있을 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궤한 바르실래도 있죠. 그는 부자였는데 뭔가 자신의 재산을 불리고자 왕을 도운 게 아니라, 그저 조건 없이 다윗 왕을 위해 섬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가 조건을 내세우고 다윗을 도왔다면 지금 왕궁으로 가자는 다윗의 청을 받아들여 거드름을 피웠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는 자기 잇속을 챙기고자 다윗을 섬긴 게 아니라 다윗과 함께 한 하나님의 공의를 바라보고 다윗을 섬긴 것이었습니다. 므비보셋도 바르실래도 상황과 환경에 따라, 자기 유불리에 따라 변한 게 아니라 한결같이 다윗과 함께 했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유불리를 따져 변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할 때 힘들 때나 잘 나갈 때나 한결같은 마음 자세를 견지하는 게 중요하죠. 그때 다윗이 그들을 잊지 않고 보상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실은 그것이 성령님과 교제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힘들 때는 물론이고 잘 나갈 때도 성령님께 끊임없이 묻고 나아가는 한결같은 자세 말이죠. 오늘도 그런 은혜 속에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다윗이 궁지에 몰려 피난길에 오를 때 배신하고 잇속을 챙기고 저주한 이들도 있었지만,

끝까지 함께 하고 도와 준 이들도 있었습니다.

므비보셋과 바르실래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오늘 저희들도 누군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다가 배신을 당하고 모함받고 힘들게 될때

그 곁에 함께 하는 이들로 격려하며 살게 하시옵소서.

나의 유불리를 따져 변신하기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생각하며 한결같은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시옵소서.

내가 어려울 때도, 내가 잘 나갈때도, 늘 한결같이 성령님과 교통하며, 성령님의 뜻을 묻고 살게 하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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