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바르고 옳은 말일지라도 상대편의 마음을 헤아려서 말하는 게 중요하죠.
그렇지 않는 말은 상대방의 마음에 아픔만 던져주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내주하심과 성령충만 속에 거한다는 것도 그런 것이죠.
누군가에게 뭔가를 말하고자 할때 성령님께서 기뻐하실지 먼저 성령님의 뜻을 묻고 기다리는 것이죠.
그래야 성령님께서 기뻐하시고 상대방도 마음도 상하지 않도록 인도하실 터이니 말이죠.
다윗이 피난길에 오를 때 다윗의 친구인 아렉 사람 후새가 따라나서고자 했죠. 하지만 다윗은 그에게 압살롬에게 가서 압살롬의 책사인 아히도벨의 계략을 무효화하라고 부탁하죠. 그래서 압살롬이 왕궁을 접수할 때, 맨 먼저 한 일은 아히도벨의 책략에 따라 다윗의 후궁이자 아내들을 왕궁 옥상에 올라가 모두 범했죠. 그 기세를 몰아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1만 2천명의 군사를 내주면 자신이 나서서 다윗의 군사를 죽이고, 자신이 직접 다윗의 목을 가져오겠다고 이야기했죠. 그 말을 압살롬과 모든 문무백관들이 좋아했는데, 이어서 다윗이 보낸 후새가 자기 계략을 발표하죠. 그는 말하기를, 다윗 왕은 전투 경험이 많은 자로서, 어느 동굴에 숨어서 우리 병사들을 노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차라리 날이 밝은 데로 병사들을 모집해서 벌떼처럼 다윗의 군사에게 달려들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죠. 그러자 압살롬과 모든 문무백관들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후새의 계략을 더 높이 샀죠. 후새는 그 사실을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그들은 또 자기 아들들에게, 그들은 또 요단강 나루턱에 있는 다윗에게 전달했고, 그 날 밤 다윗은 모든 피난민들을 데리고 요단강을 건너 멀리 마하나임까지 도망을 갔죠.
그렇다면 자신의 계략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걸 알게 된 아히도벨은 어떻게 합니까? 그는 그 길로 자기 고향 땅으로 돌아가 자결하고 말죠. 사실 그는 이번 기회야말로 자기 손녀딸 밧세바의 원수인 다윗을 죽일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날 밤 압살롬이 자기 말만 들어줬어도, 그래서 군사 1만2천명을 데리고 추격했어도 다윗을 죽였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자기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그만 자결하고 만 것이죠. 그러나 그의 뜻을 무효화시킨 것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성경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섭리라는 무엇입니까? 다윗이 비록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죽게 만든 살인죄를 저질렀더라도, 그가 눈물로 참회하며 회개할 때 그를 용서해주시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것 때문에 지금 아히도벨의 계략을 무효화시켰던 것이고, 후새의 계략을 압살롬과 문무백관들이 좋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만큼 다윗의 인생길을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하고 계신 증거입니다. 물론 이런 일이 있기까지 다윗은 아무런 일도 겪지 않는 게 아닙니다. 47세 곧 50대에 그런 죄를 범한 이후 60세가 되기까지 근 10년간 죄에 대한 후유증을 겪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실은 사무엘하 12장에 예고한 죄의 후유증을 17장까지 겪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12장에 다윗을 향한 죄의 후유증을 예고하셨죠. 너의 집안에 칼부림이 일어날 것이고, 너의 아내를 다른 사람이 범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죠. 그것도 백주대낮에 일어날 것이라고 예고했죠.
그래서 13장에서 큰 아들 암논이 이복 여동생 다말을 범했고, 2년 뒤에는 셋째 아들 압살롬이 그 암논을 칼로 죽여버렸죠. 그 길로 도망쳐 외조부 그술 왕 밑에 가서 3년을 살게 되죠. 14장에서 요압 장군은 다윗과 압살롬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압살롬을 왕궁으로 불러들이는데 그로부터 2년 동안 다윗은 아들의 얼굴을 보지 않자, 화가 난 압살롬이 요압을 부추겨서 아버지와 만나게 되죠.
하지만 15장에서는 압살롬이 4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송사 문제에 끼어들어 백성들의 마음을 훔쳤고 급기야 헤브론에 내려가 예루살렘 왕궁을 찬탈하고 아버지를 죽이겠다며 쿠데타를 일으켰죠. 그래서 압살롬은 왕궁을 정렴한 뒤 맨 처음 한 일이 아버지의 후궁이자 아내들을 왕궁 옥상에 올라가 모두 범하는 일이었고, 그것을 압살롬의 책사인 아히도벨이 주도한 일이었죠. 그때 이미 왕궁을 빠져나간 다윗은 피난길에 올랐고 그 길목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는 충성스런 장수들도 있었지만, 16장에 보면 자기 욕심으로 가득 찬 ‘시바’라든지, 다윗을 욕하며 저주한 ‘시므이’ 같은 사람도 만났죠. 물론 다윗의 피난길에 따라가겠다고 나선 제사장 사독이나 아비아달과 레위인들은 제 자리로 돌려보내 왕궁의 사정을 전해주도록 했고, 자기 친구이자 책사인 아렉사람 후새에게는 왕궁으로 돌아가 아히도벨의 계략을 무효화시키도록 요청했죠.
그래서 지금 다윗이 그 죄의 후유증들을 17장까지 겪어온 상황인데, 오늘 본문에서는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다윗의 충신인 후새의 계략을 더 높이 산 이후, 다윗과 그 군대를 추격하다가, 그만 압살롬이 죽게 된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1-5절까지는 다윗 휘하의 군대장관 세 사람이 각기 군사들을 이끌고 압살롬이 이끄는 부대에 맞서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때 다윗은 세 장수, 곧 요압 장군과 동생 아비새 장군 또 피난길에 따라나선 블레셋 가드의 망명자 6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온 잇대 장군에게 당부를 하죠.
그게 본문 5절에 나와 있습니다.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지휘관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다윗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자 쿠데타를 일으켰고, 또 자기 후궁이자 아내들을 범한 압살롬, 그리고 지금은 자기를 잡겠다고 추격하여 전투를 벌이고 있는 압살롬을 향해 너그럽게 봐 달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게 가당키나 할 소리입니까?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공동번역은 좀더 실감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요압과 아비새와 이때에게, 압살롬은 아직 철이 없으니 자기를 보아서라도 너무 심하게 다루지는 말라고 당부하였다.” 우리 개역개정판 성경은 ‘젊은 압살롬’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공동번역에서는 ‘아직 철부지 압살롬’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러 자료들을 조사해 볼 때 이 때 압살롬의 나이를 30세로 추정합니다. 60살의 다윗에 비해 30살인 압살롬이 아직 어리긴 하지만 누가 봐도 철부지는 아니죠. 그런데도 왜 다윗은 압살롬을 향해 너그럽게 대하도록 당부한 것일까요? 그것은 그 어떤 아버지라도 자식의 죽음을 보기는 원치 않기 때문에. 죽이지 말고 살려달라고 부탁하는 차원에서 하는 말이죠. 아무리 압살롬이 크나큰 잘못을 했더라도 다윗에게는 ‘그래도 내 아들이니까.’ ‘못나도 내 아들이요’, ‘약해도 내 아들이요’, 그리고 ‘악해도 내 아들이니까’. 그 지휘관들에게 잘 부탁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0절에 보면 그 긴 머리를 자랑하던 압살롬이 노새를 타고 가다가 그만 나뭇가지에 그 머리가 걸렸고 노새는 빠져나가 압살롬이 대롱대롱 나무에 달린 꼴이 돼 버렸습니다. 그때 다윗의 군사가 압살롬을 발견하고 요압 장군에 보고를 하는데, 요압은 아들을 너그럽게 대하라는 다윗의 명령을 받긴 했지만 지체하지 않고 그 압살롬을 찔러 죽여 버리죠.
그리고 싸움은 한 순간에 끝이 나고 말았는데, 압살롬이 죽은 사실을 이제 다윗 왕에게 고하는 장면이 본문 19-33절까지 나오는데, 이때 맨 먼저 나서서 다윗에게 압살롬의 사망 소식을 전하고자 한 이가 제사장 사독의 아들 아히마이스였죠.
하지만 요압 장군은 그에게 가지 말라고 당부하죠.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니 다윗 왕에게 전해봤자 별로 득될 게 없다는 뜻이었죠. 그래서 요압은 21절에 보면 이방 민족의 병사인 구스 사람에게 그 소식을 전하도록 하는데, 뒤늦게 아히마이스가 그 구스 사람보다 먼저 앞질러 다윗 앞에 서게 되었죠.
그런데 그가 뭐라고 보고합니까? 본문 29절입니다. “왕이 이르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하니라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참 의아한 대답이지 않습니까? 요압 장군이 가지 말라고 할 때는 참고 있다가 뒤늦게 발동이 걸려 그 구스 병사보다 더 앞질러왔다면 압살롬이 죽었다고 사실대로 보고하면 될 일 아닙니까? 그런데 왜 그는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한다고 대답을 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무엇입니까? 아히마하스는 다윗이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할 마음을 헤아리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다윗을 향한 충성스런 마음이 깃들어 있지 않으면 안 될 일이죠. 그것은 아히마하스의 마음이 선하고 아름답지 않으면 결코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이죠.
그렇기에 오늘 우리 자신들도 아무리 옳고 바른 일일지라도 상대편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 먼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 묻고, 그 분의 음성과 감동을 좇아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한 법이죠. 성령님께서는 화평의 영이시고, 진리와 생명의 영이시고, 사람의 속 심령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말입니다.
오늘도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 묻고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나아가는 하루의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요압이 다급한 전투현장에서 압살롬을 죽였습니다.
그 소식을 앞다투어 달려가 보고하려 했던 아히마하스는 정확하게 보고하기보다 무슨 일인지 모른다며 대답했습니다.
그만큼 그는 다윗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도 타인의 마음을 배려하는 사랑과 진실함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아무리 정확하고 올바른 사실일지라도 상대방의 형편과 감정을 먼저 생각하며 말할 줄 아는 지혜로운 저희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를 위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뜻을 묻고 성령님의 음성과 감동을 좇아 살아가는 하루의 삶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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