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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사무엘하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삼하19:1-23)

by 똑똑이채널 2021.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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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어려움에 처했을때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회복하게 된 사람은 알고 있죠.

그것은 자기 공로가 아니라 전적인 주님의 은혜라는 사실 말이죠.

그때 이전에 모함하고 자신과 반대편에 선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들조차도 기꺼이 품는 게 도리겠죠?

그것이야말로 나의 나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이기 때문이죠.

 

 

시편 3편 1-8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이 시는 다윗이 아들 압살롬을 피해 피난길에 오를 때 쓴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른 신하의 쿠데타도 아닌 아들의 반란을 피해 요단강을 건너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그런데 그 아들이 전쟁통에 죽어버렸습니다. 그의 머리카락이 나뭇가지에 걸려 노새는 빠져 나가고 그의 몸만 대롱대롱 매달린 꼴이 되었을 때 요압 장군이 그를 보고 칼로 죽였죠. 그리고 그 소식을 사독의 아들 아히마하스가 맨 먼저 전하고자 했지만 요압은 그 대신에 구스 사람 곧 흑인 병사를 시켜 다윗 왕에게 소식을 전달토록 했죠. 하지만 아히마아스가 뒤늦게 구스 사람보다 소식을 더 빨리 전하고자 앞질러 갔는데, 그래서 다윗 앞에 섰는데, 다윗이 그 아히마아스를 보자 자신의 아들 압살롬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죠. 그때 아히마하스는 사실 그대로를 전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큰 소동이 일어나긴 했는데, 저는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면서 얼버무리고 말았죠. 그것은 그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비통에 젖게 될 다윗의 마음을 헤아리는 차원에서 한 고백이었죠. 그래서 참된 신앙인의 자세는 상대방의 형편과 처지를 배려하며 사는 신앙인이라고 했죠.

 

 

오늘 읽은 19장 1-4절은 그 아들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해 슬픔에 처한 다윗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압 장군이 보낸 구스 병사가 압살롬의 죽음을 고했을 때, 다윗은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었더라면”(삼하18:33)하면서 슬퍼하고 통곡했는데, 본문 4절에서도 여전히 그 슬픔과 통곡을 그치지 않는 형국입니다.

모름지기 부모는 자식의 죽음을 무덤에 묻는 게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자식은 부모의 죽음을 무덤에 묻는 것으로 족할지 모르지만, 부모는 자식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서 평생토록 잊지 못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자신보다 먼저 죽은 아들 압살롬, 설령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을 죽이겠다고 칼을 겨누고 덤벼드는 아들 압살롬이었지만, 그 아들이 먼저 죽었으니, 어찌 아비된 심정으로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괴로워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슬퍼하고 탄식하는 다윗의 울부짖음 앞에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디에 계시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지금 자기 아들을 잃고 탄식하는 다윗의 아픔 가운데 함께 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다윗처럼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 때,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 것입니까? 하고 괴로워할 게 아니라, 나의 고통 속에 함께 하신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 5-8절은 그렇게 슬픔과 탄식과 눈물을 지새우고 있는 다윗 왕에게 요압 장군이 찾아옵니다. 그러면서 자기 고변을 전달하죠. 왕께서 아들 압살롬을 위해 그토록 슬픔과 탄식으로 날을 지새우고 있는데, 만약 더 길어진다면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을 향한 마음을 접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하루 속이 마음을 추스르고 이제는 백성들 앞에 나서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야 할 때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온 백성들이 등을 돌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왕이 지금까지 당한 화보다도 더욱 큰 화를 당할지도 모르게 됩니다. 그러니 제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백성들 앞에 나서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셔서, 새로운 왕권과 질서를 되찾아 나라를 안정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고 이야기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8절에 다윗 왕이 성문에 앉아 백성들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때 다윗 왕 앞에 나온 온 백성들이 왕을 알현합니다. 그러면서 본문 9-10절을 통해 백성들이 왕께 요청을 하죠.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이르되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이제 압살롬을 피하여 그 땅에서 나가셨고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서 죽었거늘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잠잠하고 있느냐 하니라.

다윗 왕을 알현한 백성들은 압살롬이 죽고 왕이 여전히 건재하시니, 이제는 예전의 왕궁으로 돌아오시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하는 상황입니다.

백성들의 말을 들은 다윗 왕은 그 뜻을 좋게 여깁니다. 그래서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에게 전갈을 보내도록 하죠. 무슨 전갈입니까? 본문 11절에 다윗 왕이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되 너희는 유다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왕의 말씀이 온 이스라엘이 왕을 왕궁으로 도로 모셔오자 하는 말이 왕께 들렸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느냐.

다윗은 백성들의 뜻대로 지금 머물고 있는 마하나임에서 요단강을 건널 것이고, 길갈을 거쳐 예루살렘 왕궁으로 환궁해야 할 뜻을 내비치죠. 그 일을 사독과 아비아달로 하여금 주선토록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뜻을 누구에게 먼저 전달하도록 합니까? ‘유다 장로들’ 곧 유다 지파의 장로들입니다. 왜 하필 그들이겠습니까? 다른 지파 백성들은 그래도 다윗을 맞이하는데 껄끄러울 게 전혀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유다 지파의 장로들은 이전에 압살롬과 함께 헤브론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주역들이죠. 그러니 그 장로들이 다윗을 두려워하거나 껄끄러워할 수도 있으니, 그들을 잘 구슬려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도록 한 것입니다. 바꿔 말해 유다 장로들이 압살롬과 함께 역모를 꾸몄다고 내가 탓하거나 책망할 것이 아니요, 이제는 서로가 다 풀고 새롭게 왕정을 펼쳐나가는데 힘을 보태도록 하라고 이야기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기별을 넣도록 한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 13절에 나오는 ‘아마사’ 장군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왜 그를 중요하게 여기는 걸까요? 아마사 장군은 압살롬이 유다 민족과 더불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군대장관을 수행했던 장수입니다. 바꿔 말하면 다윗은 압살롬의 추종세력들 가운데 가장 선봉장 역할을 했던 그 사람의 마음까지도 얻고자 한 것이죠. 그래서 그 아마사 장군에게 말하기를 어떤 벌도 내리지 않을 것이고, 당신은 요압 장군의 뒤를 이어 장수다운 장수로 세움받을 것이니, 나와 더불어 새로운 왕정을 펼쳐나가도록 하십시다, 곧 받아주시오, 하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윗이 요단강을 건너가는 상황을 본문 15절에서 전해줍니다. 그런데 그 때 다윗 왕에게 나온 세 번째 사람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다윗이 세 번째로 품은 사람이죠. 16절에 있는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는 사무엘하 16장 5절 이하에서 다윗이 피난 길에 오를 때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하고 욕하고 저주하면서 먼지를 날렸던 자죠. 그런데 이제 다윗이 왕권을 쥐고 왕궁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그가 먼저 나와 다윗 왕에게 절하며 굽신거면서 하는 말이 내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19)하는 상황입니다. 이때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자신의 피난길에 저주하고 욕하던 시므이를 다윗의 장수 아비새가 나서서 죽이겠다고 할 때 다윗은 그를 말렸는데, 이번에도 다윗은 그를 죽이지 않겠다”(23)고, 다시금 그를 품겠다고 약조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무엇입니까? 다윗은 자기 반대편에 선 자들을 향한 복수심을 버리고 더 큰 차원의 수용, 더 넓은 차원의 선대하는 마음이 가졌다는 점입니다. 왜 그렇게 다윗이 수용하고 선대할 수 있는 것입니까? 미물보다 못한 자기 자신이 죄를 저질렀을 때, 죄의 후유증을 겪게 하시면서도, 여전히 자기 자신을 수용하시고 선대해 주셔서 왕으로 세워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알기 때문이죠. 나의 나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는 사실 말이죠.

 

 

*사랑하는 주님.

우리가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채 탄식과 울음만 가득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도 성령님께서 함께 탄식하며 함께 아파하시는 사실을 몸소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한결같이 죄많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하시고 선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매일매일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회복의 은혜를 베푸실때, 나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조차 기꺼이 품고 수용하는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오늘도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의탁합니다.

성령님 환영합니다. 지금 우리의 심령을 지배하시고 통치하시옵소.

"성령님, 이 사람을, 이 일을, 어떻게 하길 원하세요?"

끊임없이 묻고,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하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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