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닫기)(성화)우리가 알고 있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조상입니다.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매사에 그가 완벽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부족하고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를 이끌어 주실 때마다 진정성을 갖고 주님을 신뢰하여 나아갔기 때문이죠.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아버지 데라를 따라 우상을 만들어 팔던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이주했습니다.
본래 아버지 데라도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가고 싶었지만 잠시 머물던 하란 땅에서 6년넘게 살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 무렵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와 고향과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했죠.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순종하며 나아갔습니다.
바로 그곳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이었죠.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아갔던 그곳 가나안에는 집도 없었고 땅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곳에 기근이 밀려들었죠.
그렇다면 응당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아브라함은 먹고 사는 것이 눈 앞의 현실이라 굶주림을 해결코자 애굽으로 내려가버렸습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연약한 아브라함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품어주셨고 오히려 양떼를 풍족하게 베풀어주셨죠.
그 후에 양 떼의 증가로 조카 롯과 갈라서야 할 때도 아브라함은 목초지를 찾아 나선 게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장소를 택했죠.
물론 그 뒤에도 의미없이 그랄 땅을 찾아 나선 적도 있었지만 그때도 하나님께서 그를 믿음으로 끌어올려주셨습니다.
그리고 99세가 되던 해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
이 명령은 75세때 하나님의 부름받은 아브라함이 24년이 지났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태어나기 1년 전에 하신 말씀이죠.
그때 하나님께서 ‘완전하라’하고 하신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수준처럼 완벽한 믿음의 소유자로 살라는 뜻이겠습니까?
‘완전하다’는 히브리어 ‘탐밈’(תָּמַם)은 ‘온전하다’, ‘진실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수준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수준에서 ‘온전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라’, ‘진정성을 갖고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뜻입니다.
1년만 있으면 이삭을 낳는데, 지난 24년간 하나님을 신뢰해 왔듯이 더욱 진정성을 갖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온전한 믿음이 어떤 상황에서 결정체를 이루게 됩니까?
아브라함이 100살 때 낳은 그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할 때, 그 때 순종한 모습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유대 전승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나이가 37살 곧 30대로 추정을 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 죽을 때의 30대와 같은 상황인 셈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이삭을 데리고 80km가 넘는 모리아 산까지 3일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산 아래에 다다랐을 때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말했죠.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자 아브라함은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해주지 못한 채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거야.”하고 말했죠.
그런 상황에서도 얼마나 아브라함은 괴로웠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인지,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성있게 믿어야 하는지 말이죠.
그러나 아브라함은 “내가 너의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창대케 할 것이다”하는 말씀을 그때도 믿고 나아갔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에 단을 쌓고 아들을 잡아 죽이려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양을 잡아드리게 해 주셨죠.
(깨달음)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완전한 믿음’, ‘온전한 믿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아브라함이 완전한 믿음, 온전한 믿음의 소유자였을지라도 한순간에 그런 믿음을 지닌 것은 결코 아니었다는 겁니다.
25년간 하나님 앞에서 넘어졌다 일어섰다 반복하면서 하나님께서 붙잡아주시고 세워주셨기에 그런 믿음이 소유자가 된 거죠.
더욱이 그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할때도 이삭을 통해 후대를 이루게 하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온전히 드렸던 거죠.
그렇다고 아브라함이 믿음이 하나님의 수준에 미치는 믿음이겠습니까?
절대적인 하나님의 수준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수준에서 이전보다 보다 나은 믿음의 단계로 올라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온전한 믿음, 완전한 믿음, 진정성 있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적용)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온전한 믿음, 진정성의 믿음을 통해 오늘 우리의 믿음 수준은 어떠한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도 온전한 믿음을 지녀야 한다’하고 말씀하신다면, 과연 어떤 믿음의 수준을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수준에 만족할만한 완벽한 믿음, 누구도 흠잡을데 없는 퍼펙트한 믿음의 수준을 말하는 걸까요?
우리에게 아브라함이나 욥이나 사도 바울과 같은 믿음을 원하시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 신앙의 수준에서 지난 25년전의 믿음보다 좀 더 온전하고 좀 더 진정성 있는 단계를 말하는 것이죠.어린아이처럼 걸음마 단계의 신앙에서 5년 10년 25년에 걸맞는 신앙단계로 나아가는 것 말하죠.
2021년의 신앙 수준보다 한 단계 더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의 선하심과 기뻐하심을 좇아 나가는 믿음의 단계를 말하는 거죠.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우리가 4주째 살펴보고 있는 로마서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고린도에 잠시 머물 때 써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의 나이가 대략 57세 곧 A.D.57년의 상황입니다.
그때는 34살의 바울이 주님을 처음 만난 때로부터 20년이 넘은 상황입니다.
그야말로 초신자로서 주님을 만난 뒤에 세월을 거치면서 보다 온전한 바울, 보다 진정성 있는 바울이 된 것입니다.
그런 완숙한 시점에 바울이 로마서를 써 보냈데, 과연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해 로마서를 써 보낸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사실 로마교회도 바울이 주님을 믿기 시작한 그 즈음에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이 주님의 부활승천 후 50일째 되는 날, 곧 오순절날에 예루살렘에 왔다가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때 그들이 로마에 다시 돌아가 각 가정 집과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면서 로마교회가 생긴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A.D.57년이 지났다면 20년 세월이 흐른 것이니, 바울이 로마서를 써 보낼 때 로마교회도 20년 역사를 지닌 거죠.
그렇다면 20년 세월이 흘렀다면 나무로 치자면 뭔가 자라고 열매를 맺는 단계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해 이제는 열매를 따 먹을 단계처럼 로마교회는 보다 온전하고 진성성 있는 교회로 발돋움하는 상태이지 않겠습니까?
어린 아이가 태어나서 기어다니다가 서서히 걷고 이제는 20살 청년기를 거치는 단계 말입니다.
그런 20년 된 로마교회를 향해 바울이 로마서를 써 보낸 것입니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어떤 이유로, 로마서를 써 보낸 것입니까?
로마교회는 대부분 할례와 같은 의식이나 절기와 같은 날짜에 대해 민감하게 지킨 유대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교회였죠.
물론 그 중에는 소수의 이방인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이 중요시하는 할례나 날짜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이방인들도 있었죠.
그러다가 A.D.50년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로마시민권이 없는 유대인들을 추방해버렸죠.
그러니 로마에 살고 있지만 로마 시민권이 없는 유대인들은 로마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를 계기로 로마교회의 다수를 차지하던 유대인들이 떠났고, 그 자리를 이방인들이 많이 들어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럴지라도 유대인들의 율법과 관습의 문제와 이방인들의 자유의 문제가 서로 충동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죠.
그만큼 유대인들은 유대인들대로, 이방인들은 이방인들대로, 서로가 어린아이 수준의 신앙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로마교회 성도들의 믿음과 신앙상태를 좀더 온전하고, 좀더 진정성 있게 이끌어주고자 바울이 로마서를 쓴 것이죠.
비록 교회 역사는 2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신생수준의 어린 아이같은 신앙상태에 빠져 있는 로마교회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워주고자 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11장까지는 이신칭의, 오직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교리적인 부분을 써 내려갔죠.
로마서 12-16장까지는 구원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교리의 실천편에 해당하는 내용을 써 보낸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이 로마서를 써 보낸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주지시켜 주기 위함입니다.
아울러 유대인이든 이방인든 구원받은 이후에는 어린아이의 믿음에서 한 단계 온전한 믿음, 곧 진정성 있는 믿음으로 나아가도록 하라는 뜻으로 권면해서 쓴 것입니다.
(전개)그 중에 우리가 4주간 살펴본 말씀은 구원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한 실천편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로마서 12장의 첫 부분이었습니다.
구원받은 자는 그의 몸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전제물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죠.
이른바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것은 이 세대의 사람들이 불나방처럼 황제의 돈과 명예와 권력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과는 달리 영원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했죠.
아무리 이 세상의 황제의 돈과 명예와 권력과 쾌락이 좋아보여도 그것은 100년 안팎에 사라질 것들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비록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도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라는 뜻이었죠.
그와 같은 하나님나라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돌과 같은 굳어버린 심령으로는 마음을 새롭게 할수도 변화받을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오직 흙처럼 그 심령을 갈아 엎은 부드러운 심령이라야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 지고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은 사람이 분별해야 할 첫 번째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분별하는 것이었죠.
내게 어떤 상황이 펼쳐지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케 하시려는 게 하나님의 뜻이죠.
그를 위해 때로 고난과 고통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옳습니다, 하는 믿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은 사람, 그 심령을 리노베이션하는 사람은 두 번째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분별해야 한다고 했죠.
하나님의 기뻐하심이란 하나님께서 흡족하게 받으실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고 했죠.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나아만이 자기 직위를 던지면서까지 하나님의 기쁨을 좇아 사는 삶이 그것이었죠.
물론 니고데모처럼 자기 직위를 던지지 않고 그 속에서 온갖 조롱을 받으면서도 그 속에서 주님의 기쁨되는 길을 택하여 사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오늘은 그 마지막 세 번째 분별하며 살아야 할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기에 분별하도록 하라는 세 번째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이죠.
(원해)여기에 ‘온전하신 뜻’, 곧 ‘온전하다’는 헬라어는 ‘텔레이오스’(τέλειος)는 ‘끝마치다’ ‘완전하다’하는 뜻입니다.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는 단계까지 이르는 그 단계에 이르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상태도 아는 분의 소개로 교회의 문턱을 넘어서는 이제는 보다 성숙한 단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원성)이 ‘온전하심’이라는 단어가 신약성경에 19번 쓰였는데, 그중에 이런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 19장 21절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고린도전서 13장 9-10절은 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에베소서 4장 13절 말씀은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깨달음) 이 말씀들이 ‘온전하다’는 단어가 각각 들어간 말씀입니다.
무엇을 깨닫게 해 주는 말씀 같습니까?
‘온전하다’는 말이 ‘완벽하다’, ‘완전하다’, 뭔가 끝마칠 정도로 퍼펙트하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처럼 온전해라, 하나님처럼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개는 주인을 잘 알아보고 주인을 잘 따르고 낯선 도둑이 오면 멍멍하고 짓는 역할을 하면 그것으로 온전한 것이죠.
하지만 그 개가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그 개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죠.
하나님의 사람이 아무리 믿음이 좋고 온전하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저 인간의 수준 안에서, 신앙안의 수준 안에서,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온전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죠.
그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것도 없이 자기 자신이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처음 주님을 영접한 그 단계의 믿음과 5년 후, 또 지금의 믿음 상태가 얼마나 성숙하고 온전해졌는지 말입니다.
아이가 아장아장 걷던 걸음마 단계를 띠는 것과 같은 신앙수준에서 이제는 보다 진실성 있는 신앙인이 된 것 말입니다.
불과 5년 전에는 그저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외우는 수준이었는데, 이제는 하루하루 주님과 교제하며 살아가는 모습 말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주님을 믿는 믿음의 단계가 보다 성숙해지고, 그 성숙을 토대로 성장하는 모습 앞에 스스로 대견해하는 것 말이죠.
(적용)그것은 서두에서 말씀드린 아브라함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의 믿음과 25년이 지나면서 믿는 그 믿음의 수준이 달라진 것 아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 이삭을 낳을 때의 믿음 수준과 이삭이 37살이 되어 번제물로 바칠 때의 믿음 수준이 성숙해진 것처럼 말이죠.
지금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전에는 로마 황제의 돈과 명예와 권력과 쾌락을 좇았던 그 삶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것 아니냐고 말이죠.
그렇다면 지금 20년된 로마교회 성도들의 신앙수준도 이전보다는 보다 온전해야 한다고, 보다 진정성 있는 신앙수준이 돼야 한다고 권면하는 것이죠.
(주문)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수준이 성숙한 신앙의 수준으로, 진정성 있는 신상수준으로 살아가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점이죠.
(주음성)이 시간에 저와 여러분들의 심령 속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네가 처음 주를 만났을 때, 주님께서 처음 너에게 찾아왔을 때 너는 감격스런 구원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더냐?”
“그로부터 1년 2년 5년 10년의 믿음생활을 살아가면서 너의 믿음은 보다 온전한 믿음, 진정성 있는 믿음의 삶을 살고 있느냐?”
“아브라함이 25년 전에 하란 땅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보다 이삭을 낳을 시점의 믿음 상태가 훨씬 온전한 것처럼 말이다.”
“로마교회 성도들이 20년이 지나오면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갈등하고 있는데 그런 유아기적 신앙상태에서 보다 온전한 신앙인들이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네 스스로 보기에도 지난 한 해보다도 더 성숙한 신앙의 발걸음을 계획하고 있느냐?”
“너는 지난 5년전보다도 네가 주님을 믿고 주님과 교제하는 신앙수준이 한층 더 성숙한 믿음의 발자취를 남기고 있느냐?”
“너는 지난 5년전보다도 네가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성도들 앞에서 유아기적 신앙상태에서 보다 온전한 신앙상태로 성장하고 있느냐?”
“주님은 너의 신앙상태가 다람쥐쳇바퀴처럼 그저 돌고도는 신앙수준이 아니라 이전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는 진정성있는 신앙상태가 되길 원하지 않겠느냐?”
(찬양)내가 처음 주를 만났을 때 외롭고도 쓸쓸한 모습
말 없이 홀로 걸어 가신 길은 영광을 다 버린 나그네
정녕 그 분이 내 형제 구원했나 나의 영혼도 구원 하려나
의심 많은 도마처럼 물었네 내가 주를 처음 만난 날
https://www.bookpod.co.kr/goods/goods_view.php?goodsNo=1000001130
(성화2) ‘온전하다’는 ‘텔레이오스’라는 단어가 구약성경에서는 ‘탐밈’(תָּמַם)으로 쓰인다고 했습니다.
이 단어가 노아에게도 사용된 예가 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6:9)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하는 말씀 같습니까?
노아가 당대에 ‘완전한 자’였다는 것은 아무 흠이 없이 퍼펙트한 믿음의 삶을 살았다는 뜻이겠습니까?
사실 노아도 연약한 인간이기는 마찬가지였죠.
그는 하나님께서 방주를 만들라고 할 때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묵묵히 방주를 만들었죠.
하지만 1년 17절의 방주속에서 삶을 마감하고 방주 밖에 나왔을 때는 모든 긴장감이 사라졌는지 술에 취해 벌거벗은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그만큼 노아도 허물이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도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노아를 ‘완전한 자’라고 평가하신 것이었을까요?
노아 스스로는 부족한 것을 알기에 순간순간 하나님과 동행하고자 하나님께 진정성 있는 믿음의 자세로 살아간 것을 말하죠.
노아가 방주를 지은 게 80년 근 100년의 세월을 지어나갔는데, 그 속에서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흔들어댔겠습니까?
그렇지만 노아는 자기 연약함을 인정하면서도 그 속에서 붙잡아 주시는 주님의 이끄심을 믿고 해마다 더한층 믿음의 단계로 진일보게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한 해 한 해 조금씩 하나님을 더 신뢰하고, 하나님께 의탁하고, 하나님께 주권을 내어맡기는 삶을 하나님께서 ‘완전한 자’라고 평가해주신 것입니다.
(적용)20년된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바울이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라’고 권면한 것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태어날때부터 온전한 믿음을 소유한 자는 한 사람도 없기에, 한 해 한 해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 말이죠.
처음 주님을 믿기 시작할 때 세상 사람들의 유혹과 핍박이 밀려들지만 그 속에서 주님을 더 신뢰하며 신앙의 단계로 올라서도록 말이죠.
처음 믿을 때나 5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다람쥐쳇바퀴처럼 돌고도는 믿음의 상태가 아니라 20년이 되었다면 보다 진정성있는 신앙의 수준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예화)네 명의 그리스도인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어느 날 야고보서를 공부하던 중에 그들은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약5:16)라는 말씀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약점에 대해서 서로가 솔직하게 고백하기로 했습니다.
그런 고백들을 통해 자신들의 약점을 고쳐보기로 다짐을 한 것입니다.
먼저 한 사람이 자기의 약점을 고백했습니다.
“나는 교회에 다니긴 하지만 줄담배를 끊을 수가 없어서 교회에 갈 때는 담배 피우고 나서 입을 닦고 간다네.”
두 번째 사람도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했습니다.
“나는 어떤 사실을 말할 때 자꾸만 거짓말이 입에서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온다네. 나도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네.”
세 번째 사람도 고백했습니다.
“나는 교인이면서도 아직 도벽을 버리지 못했어. 남의 물건만 보면 자꾸 손이 간다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있던 네 번째 사람은 전혀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세 명의 친구들이 독촉했죠.
“야, 너는 약점이 없냐? 너도 자백해야지!”
그렇게 세 친구가 모두 재촉하니까 한 참 후에야 네번째 사람이 고백을 했습니다.
“실은 말야. 나도 약점이 있어. 난 남의 약점을 알기만 하면 그걸 다 불고 다니는 거야.”
(깨달음) 어떻습니까?
교회에 다니긴 하지만 줄담배를 끊을 수 없다는 그 모습의 신앙상태, 우리 주변에 일어날 수 있는 연약한 신앙상태죠.
교회에 다니긴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이 튀어나오는 신앙상태, 내 속에도 일어날 수 있는 신앙 상태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도 남의 물건에 손이 가는 신앙상태, 그런 신앙상태 속에 머무르는 이들도 있을 수 있죠.
심지어 다른 사람의 약점을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는 신앙상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신앙 상태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신앙상태에 있는 신앙인들이 보다 온전히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보다 진정성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은혜를 베풀고자 않겠습니까?
로마교회 성도들 중에는 20년간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황제의 돈과 명예와 권력과 쾌락을 좇는 신앙상태에 머무르는 성도들도 있었을테니 말입니다.
그런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주님께서 온전한 신앙인의 단계로 올라서도록 은혜를 베풀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두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내음성)그래서 오늘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2022년 설 명절을 맞이하는 이 주간에 이전보다 한 단계 높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은혜베풀어 주세요.”
“주님을 제 주인으로 모시면서도 황제의 돈과 명예와 권력과 쾌락을 우상으로 섬겨왔다면 하나씩 내려놓는 결단을 하게 해 주세요.”
“주님을 믿는 크리스천인데도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관에 휩쓸려 살고 있다면 올해부터는 한 가지라도 구별된 삶을 결단하게 해 주세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함은 주님의 수준이 아니라 제 수준에서 온전함인 줄 믿사오니, 작년보다 올 한 해 한 가지 것이라도 좀 더 진정성을 갖고 주님을 섬길 수 있게 해 주세요.”
“아브라함도, 노아도, 바울도, 본래부터 완벽한 신앙인이 아니라 한 해 한 해 좀 더 진정성 있게 주님을 섬긴 것처럼 저도 그렇게 닮아가게 해 주세요.”
“제가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보다, 주님께서 제게 처음 찾아오셨을 때보다, 더 한 층 온전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찬양)내가 이제 주를 만남으로 죽음의 길 벗어 나려네
변찮는 은혜와 사랑 베푸신 그 분만이 나의 구세주
주 예수 따라 항상 살리로다 십자가 지고 따라가리라
할렐루야 주를 만난 이기쁨 영광의 찬송을 돌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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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주간이 설 명절이 있는 주간 아닙니까?
우리나라 달력으로 2022년이 드디어 시작됐다면 2022년 한 해에 무엇을 결단하며 사시겠습니까?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인정해주시는 온전한 믿음의 삶을 2022년 한 해 결단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께서 인정해주시는 온전한 믿음은 주님의 수준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개가 아무리 뛰어난 수준을 자랑했다고 해서 사람의 수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뛰어난 믿음의 수준을 자랑한다고 해서 어찌 아브라함처럼, 노아처럼, 바울처럼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각자는 우리 각자의 수준에서 한 단계 더 나은 수준의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걸 주님은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20년된 로마교회 성도들도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구하며 살아야 할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을 믿으면서도 5년전, 10년전, 20년전 그릇된 습성을 끊지 못했다면 2022년에는 끊어내는 온전한 신앙인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을 신뢰한다고 하면서도 5년전, 10년전, 20년 전의 신앙상태속에 있다면 좀더 진정성 있는 신앙인의 모습으로 발돋움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지난 해보다 올 해 한걸음 더 주님께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주님을 섬기고, 내 곁에 붙여준 성도들을 진정성 있게 섬기는 온전한 신앙인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런 은혜의 주인공들이 모두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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