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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느헤미야

느헤미야 1-6장 새벽기도 말씀묵상

by 권또또 2021.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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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1:1-11)

오늘부터 살펴볼 느헤미야서는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이들 가운데 3차 포로귀환이 이뤄진 것, 그 인솔자인 느헤미야의 주도로 무너진 성벽을 재건한 일을 담고 있습니다. 이른바 B.C.722년 북이스라엘 왕국이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을 당했죠. 그로부터 117년 뒤인 B.C.605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대왕의 통치 원년에 바벨론 제국은 남 유다를 정복하러 나섰고 그때 남왕국 유다의 제18대 왕 여호야김을 비롯한 젊은 인재들을 포로로 끌고갔죠. 그것이 제1차 바벨론 포로기였죠. 그때 다니엘도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로부터 8년 뒤인 B.C.597년에 바벨론의 대왕 느부갓네살이 남왕국 유다를 공격했는데 그때 제19대 왕 여호야긴 곧 여고냐와 함께 많은 방백이 포로로 끌려갔는데 그때 에스겔 선지자도 끌려갔죠. 그로부터 11년 뒤인 B.C.586년 바벨론의 대왕 느부갓네살은 남왕국 유다를 3차 공격했는데 그때 예루살렘 성읍은 물론 성전과 성벽이 완전히 초토화되었죠. 한마디로 말해 남왕국 유다가 완전 멸망당한 때였죠. 그때 바벨론 제국은 남왕국 유다의 하층민만 남겨 둔 채 시드기야 왕을 비롯한 모든 방백과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죠. 그것이 3차 바벨론 포로 유수기였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멸망당하기 2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이 회복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4428절에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하고 예언케 하셨죠. 하나님께서 페르시아의 고레스 대왕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유다 백성을 예루살렘 성읍에 다시금 돌아오게 하실 것을 약속한 말씀이죠. 그 말씀 그대로 페르시아 제국의 대왕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하여 통치한 원년인 B.C.538, 그러니까 제1차 바벨론 포로유수기인 B.C.605년으로부터 70년이 지난 시점에 제1차 포로귀환이 이뤄졌습니다. 5만 명 가량의 사람들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 성읍으로 귀환했죠. 그 인솔자가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예수아였고, 그들이 주로 한 일은 성전재건이었습니다. 물론 방해꾼들이 있어서 그 일은 20년 넘게 중단되었죠. 그 무렵 페르시아의 고레스는 죽고 그 아들 캄비세스도 죽고 새로운 다리오 왕이 즉위할 때였죠. 그렇게까지 성전재건이 중단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전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봤던 90세의 학개 선지자와 젊은 20대의 스가랴 선지자를 불러 유다 백성들에게 성전을 재건하도록 선포하게 했죠. 그런 과정을 통해 드디어 성전재건이 완공했는데 그때가 B.C.515년 일이었죠. 그 내용이 에스라서 전반부 제1-6장까지 나온 내용이었습니다.

 

에스라서 후반부 제7-10장까지는 제2차 포로귀환과 함께 그들의 무너진 심령을 말씀으로 재건하는데 초점을 맞춘 내용이었습니다. 2차 바벨론 포로귀환의 인솔자는 에스라였죠. 그때 2천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에스라와 함께 돌아왔죠. 그때는 다리오 왕이 죽고 그 아들 아하수에로 왕도 죽고 그 둘째 아들 아닥사스다 왕이 통치한 B.C.458년의 일이었죠. 그 시기는 1차 포로귀환자들이 성전을 재건한 B.C.515년으로부터 57년이 지난 시점이자, 아하수에로 왕의 통치시절에 아말렉 족속의 후예였던 하만이라는 자가 유다 민족을 몰살시키려고 할 때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심정으로 기치를 발휘애 유다 민족을 구원하던 때로부터 20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그때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해 아닥사스다 왕이 준 금과 은을 성전관계자에게 전달했고, 곧장 하나님께 감사제를 올려드렸죠. 문제는 제 1차 포로귀환자들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잊은 채 가나안 여인을 아내로 삼아 사는 혼합주의 신앙관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었죠. 그때 에스라는 그들의 죄를 유다 백성의 죄로 함께 아파하면서 여호와의 율법을 좇아 살도록 촉구했죠. 그러자 온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방 여인을 다 돌려보내는 순전한 삶을 살게 되었죠. 그것이 에스라서 후반부 내용이었습니다.

 

오늘부터 살펴 볼 느헤미야서는 역대기와 에스라서를 잇는 흐름 속에 있는 말씀입니다. 역대기가 포로귀환자들을 향한 설계도를 그린 것과 같았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그 설계도를 바탕으로 실제 시공하는 장면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죠. 그 중에서도 에스라서의 전반부에 제1차 바벨론 포로귀환과 함께 성전재건에 초점을 맞췄다면, 에스라서 후반부는 제2차 바벨론 포로귀환과 함께 그 백성들의 심령을 말씀으로 재건하는데 초점을 맞춘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읽어나갈 느헤미야서는 제 3차 바벨론 포로귀환과 함께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는데 초점을 맞춘 내용입니다. 그 옛날 에덴동산에 울타리가 있는 것처럼, 성막에도 울타리가 있는 것처럼, 유다 백성들의 영적인 울타리를 치는 모습이 성벽을 재건하는 격이죠.

느헤미야가 제3차 바벨론 포로귀환자들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 수는 극소수에 불과했죠. 그때는 아닥사스다가 통치할 무렵인 B.C.445년의 일로서, 에스라가 제2차 포로귀환자들을 이끌고 돌아온 때로부터 13년의 세월이 경과한 때였습니다.

 

느헤미야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전반부는 제1-7장인데 성벽재건을 담고 있고, 후반부는 8-13장까지인데 신앙개혁운동을 담고 있죠. 본문 1-3절에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느헤미야는 하가랴의 아들로 소개하죠. ‘하가랴주님을 기다리라는 뜻입니다. 70년간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겪으면서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줄 것을 잠잠히 기다린 아버지였던 것이죠. 그만큼 느헤미야의 가정은 경건한 신앙인의 가정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느헤미야가 수산 궁에 거하고 있을 때, 포로귀환자들 가운데 두세 사람이 그에게 찾아왔죠. 그들이 느헤미야에게 말하죠. 3절에 보면 예루살렘 성이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모두 불타버렸다고 말이죠. 1차 포로귀환자들 가운데 예루살렘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금 바벨론 땅으로 돌아온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느헤미야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셈입니다.

 

그때 느헤미야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본문 4-11절을 보면 느헤미야는 수일 동안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면서 금식하며 기도하죠.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심을 고백하고, 6절에서는 주님께 범죄한 죄악을 자복하고 있고, 그리고 모세의 율법을 불순종한 자들에게는 이방 세력에게 흩어짐을 당할 것이지만 회개하며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하늘 끝에 흩어졌을지라도 다시금 모아주신다는 사실을 고백하죠. 그리고 7-10절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죠.

그런데 11절 말씀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느헤미야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셨다는 고백입니다. 느헤미야는 당시 아닥사스다 왕의 술맡은 관원,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의 비서실장인데, 하나님께 자신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간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직책을 맡겨주셨다는 고백입니다. 그것이 왜 중요하겠습니까? 그 직책을 통해 왕에게 간청할 때 왕이 즉각적으로 들어줄 수 있기 때문이죠. 바로 그것을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에게 높은 직책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죠. 느헤미야 개인의 영달과 부와 권력을 주고자 함입니까? 아니죠.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토록 하는 데 있죠. 오늘날도 마찬가지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의 존귀한 직책과 직위를 맡길 때 그것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오늘도 그런 은혜가 충만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묵상과 기도

사랑하시는 주님.

주님께서 느헤미야처럼 우리에게 세상의 지위와 직책을 부여하실 때 그 일을 통해 나 개인의 영달보다도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며 살게 해 주시옵소서.

오늘도 우리의 현장에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게 하시옵소서.

오늘도 느헤미야의 아버지 하가랴처럼 주님의 다시오심을 대망하며 사는 하루로 삼게 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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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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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2:1-20)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의 즉위 20년 기슬르월에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인 수산 궁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에서 태어나 페르시아에서 자란 사람이죠.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 제국에 의해 1, 2, 3차에 걸쳐 공격을 받았고 3차 공격 때 완전히 멸망당해 성전도 무너졌고 성벽도 허물어졌고 하층민만 남겨 둔 채 모든 백성을 포로로 끌고 갔죠. 그러나 그 바벨론도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 대왕에 의해 멸망당했죠. 그러니 바벨론 땅에 살고 있는 유다 민족은 자연스레 페르시아의 속국민이 된 셈입니다. 그렇게 페르시아의 노예민족으로 살고 있는 유다의 부모 밑에 태어난 이가 느헤미야였습니다. 한 마디로 느헤미야는 이방 땅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유대 사회의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그저 말로만 듣고 자란 세대였죠. 다만 아버지 하가랴처럼 하나님을 은혜를 기다리는 자였죠.

그런 상황에서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의 수도 수산에 살고 있었죠. 그때 바벨론 땅에서 예루살렘으로 포로 귀환한 자들 가운데 자기 친동생 하나니와 몇몇 사람들이 수산 궁에 들러 느헤미야에게 고국의 상황을 전해주었죠.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졌고 성문도 불탔고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도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말이죠.

 

그런 이야기를 듣는 느헤미야는 어땠겠습니까? 억장이 무너졌겠죠. 그로 인해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과연 내 조국, 내 민족, 내 고향 예루살렘 성읍이 무너졌고, 성벽도 무너져 있는데, 내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말이죠. 물론 느헤미야는 그때 자기 한탄 자기 무능함을 아뢰는 기도를 한 게 아니었죠.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떠올리며 기도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언약을 떠올리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베푸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비록 죄를 범했을지라도 회개하며 돌아서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쫓겨나고 추방당한 백성들이 다시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자 하면 하늘 끝에서도 불러 모으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며 기도를 드렸죠. 그만큼 페르시아 땅에 태어나 살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그의 마음 속에 품고 살았던 사람이 느헤미야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까? 111절 마지막 부분을 통해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요셉이 감옥 속에 있을 때 바로 왕의 술맡은 관원장과 떡맡은 관원장을 만나 그들의 꿈 해몽을 통해 술맡은 관원장은 복직이 되고, 떡맡은 관원장은 죽임을 당하게 되었죠. 그처럼 느헤미야가 술 맡은 관원이 되었다는 것은 페르시아의 대왕 아닥스사다에게 엄청난 총애를 입게 된 것이죠.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의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직책이죠.

그만큼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언어와 문화와 역사 전반에 능통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알고 있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그런 직책을 자신에게 수여한 것은 단순히 그의 결정만이 아니라 그 너머에 하나님께서 그런 복을 주신 것이란 사실을 말이죠. 더욱이 그 직책은 개인의 영달과 부귀영화를 위함이 아니라 유대 민족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세우기 위해 그 직책을 주신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느헤미야가 그와 같은 은총을 입기까지 어떻게 했냐는 점이죠. 11절의 기슬르 월, 12월 달부터 오늘 본문 1절의 니산 월까지 곧 4월개월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잠잠히 기다려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어 술 맡은 관원이 되었고 왕 앞에 서게 된 것이죠.

 

그리고 2장으로 이어지는데 본문 1-3절입니다.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하니.”

느헤미야가 왕 앞에 수심이 가득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왕이 그 이유를 묻자, 느헤미야는 자신의 조상들 묘실이 있는 성읍이 황폐하고 성문도 불타 버렸다고 말하죠. 그러자 4절에 왕은 어떻게 해 주기를 원하느냐, 하고 말하고, 4절 하반절에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묵도하고다시 말해 하나님께 기도하며 5절을 통해 말하죠. 왕의 목전에 은혜를 입었거든, 유대 땅 내 조상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가서 그 성문을 건축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이죠. 그러자 왕은 6절을 통해 그 일이 얼마나 걸리겠느냐고 말하죠. 느헤미야는 내가 기한을 정해 그 성벽을 완성하고 돌아오겠사오니,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강 서쪽 총독들에게 내가 유다 땅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칙령을 내려주시고, 또 성전에 속한 문과 성벽에 쓰일 재목들을 벨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을 하죠.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느헤미야와 아닥사스다 대왕이 나눈 그 대화가 그대로 성취되도록 하나님께 은총을 베풀어 주시죠. 8절 하반절에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 그래서 군대 장관과 마병까지 함께 동행하게 되고, 왕이 써 준 조서를 그 총독들에게 보여주고, 드디어 유다 땅으로 들어가게 되죠.

물론 그때 모두가 환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는 느헤미야와 함께 유다 땅으로 들어온 3차 귀환자들을 결코 반가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죠.

어찌됐든 느헤미야는 3차 포로귀환자들 곧 극소수에 달한 유다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읍에 돌아오게 되죠. 그때 선조의 땅을 밟았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워 했겠습니까? 그리고 3일간 쉼을 얻은 후에, 4일째 되는 날에 느헤미야가 무엇을 합니까?

본문 12-16절을 보면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기도를 올린 뒤에, 몇몇 사람들과 짐승 곧 나귀를 타고 무너진 성벽을 돌아보고 왔죠. 그때 귀족들이 어디를 그렇게 다녀온 것이냐고 물었죠. 그러자 느헤미야는 17-18절을 통해 지금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져 있어서 우리가 수치를 당하고 있는데, 이제라도 성벽을 재건하도록 하십시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수치가 없도록 하십시다, 우리가 성벽을 재건하고자 하면 하나님께서 분명코 도움의 손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하고 말하죠. 그러자 모두가 감동을 받아 성벽을 재건하자고 말하죠.

물론 그때 찬물을 끼얹는 사람들이 있었죠. 이전에 느헤미야와 3차 귀환자들이 들어올 때 달가워하지 않던 이들, 곧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그랬고, 이제는 아라비아 사람 게셈까지 가세하여 그 일을 비웃기 시작했죠. 너희가 성벽을 재건코자 한 것은 아닥스사다 대왕을 배반하려는 일이라고, 엄포까지 놓고 있죠.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깨닫게 하시는 음성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느헤미야의 자세를 하나님께서 본받도록 하는 것 아닙니까? 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산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때가 임하기까지 기도하며 기다렸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실 때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실행한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한다고 하면서 기도만 하고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면 신비주의나 도피주의자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기도는 하지 않고 자기 계획만 세운다면 그는 하나님과 무관한 자기 능력만 믿는 세속적인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렇기에 저와 여러분들은 정말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좇아 기도하고 간구하되, 구체적인 계획까지 준비하여 실행에 옮기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묵상과 기도

사랑하시는 주님.

느헤미야가 3차 포로귀환자들을 인솔해 예루살렘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성벽을 재건코자 함이었습니다.

그가 돌아오기까지, 숱한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까지 기도하는 자였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던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면서 기도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계획만 난무한 교만한 삶도 문제입니다.

오늘 저희들은 더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바라고 기도하며 삶 속에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며 신실하게 책임감을 감당케 하시옵소서.

그런 저희들에게 만남의 복과 능력의 복을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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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을 건축하여(3:1-32)

오늘 읽은 느헤미야서 3장은 예루살렘 성벽 중수, 즉 성벽 보수공사에 관한 기록입니다. 예루살렘 성과 성문들의 상태는 13절에서 이미 읽은 바 있듯이, 성이 허물어지고 성문들이 불타버렸죠. 포로귀환자들 가운데 자기 친동생과 몇 몇 사람들이 그런 상태를 보고 수산 궁에 있는 느헤미야에게 와서 이야기한 내용이었죠. 그만큼 성전은 재건했지만 성과 성벽은 허물어진 상태 그대로였죠.

그런 상황을 전해 들은 느헤미야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아닥사스다 왕 앞에 섰죠. 그래서 25절을 통해 기한을 주면 성을 건축하고 돌아올 것이요, 그에 따른 통행증도 내주시고, 벌목 허가증까지 달라고 계획을 세워 보고했죠.

그래서 아닥사스다 왕의 허가를 받은 느헤미야는 3차 포로귀환자들 극소수의 귀환자들과 돌아왔고, 3일간 쉼을 얻은 후 4일째 되는 날 몇몇 사람들과 밤에 나귀를 타고 잠행에 나섰죠. 과연 성벽과 성문들이 어떤 상태인지 확인코자 말이죠. 그런데 두 눈을 뜨고는 못 볼 정도로 황폐화 되어 있었죠. 그래서 여러 방백들에게 말했죠. 우리가 이런 수치를 당하고 살 게 아니라 힘을 모아 성벽과 성문을 재건하자고 했죠. 그 말에 감동받은 이들이 모두 성벽재건에 뜻을 모으고 준행하기로 결의했죠.

 

오늘 읽은 3장 말씀은 성벽과 성문을 재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읍의 성문에 관한 언급은 구약의 역사서와 예언서 몇 곳에만 기록돼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도 두 곳만 등장하죠. 요한복음 5장의 양문과 사도행전 3장의 미문이 그렇죠. 그런데 오늘 읽은 느헤미야 3장에는 성문에 관한 언급만 9번 나오고, 29절의 동문지기까지 포함하면 총 10번 등장하죠.

물론 오늘날 존재하는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성은 솔로몬이 건축했던 예루살렘 성의 구조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더욱이 2천 년 전 예수님의 공생애 시기의 보여준 것과도 훨씬 차이가 있죠. 그때보다 훨씬 규모가 큰 성읍이 되었는데, 그 규모가 확장된 것은 예루살렘 성 안에 골고다 언덕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예루살렘 성에 있는 문은 모두 8개입니다. 예루살렘 성의 형태는 원형도 아니고 사각형도 아니지만, 둘 중 하나를 생각한다면 사각형에 가깝죠. 그 성읍의 동서남북 각 방향에 2개의 성문이 있는데, 동쪽에 있는 두 개의 문, 양문미문만 그대로의 이름을 간직하고 있죠. 그래서 예루살렘 성문들의 이름은 그들의 생활양식과 연관돼 있습니다. 이른바 양문양의 문으로서 성전 제사를 위해 양들이 들어오는 문이기에 양문으로 붙인 것이고, ‘마문은 말들이 출입하는 문, ‘어문은 바다나 호수에서 잡아온 물고기들을 주로 유입하기 때문에 어문으로, 분문이 있는데 그 이름은 성읍에 사는 백성들이 분뇨를 처리하기 위해 출구로 사용한 문이 분문입니다. 수문샘문은 성 주변에 샘물이 있기 때문에 그 물을 퍼 나르는 문으로, 그리고 골짜기 문은 골짜기로 나가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렇게 이름 한 것이죠. 그리고 모퉁이 문은 모퉁이 즉, 모서리 가까운 곳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고, 마지막으로 발음하기 어려운 문이 있는데, 31절에 나오는 함밉갓 문이 그것입니다. ‘함밉갓 문은 히브리 발음을 그대로 음역한 것인데, 관사 미프카드라는 단어가 붙어있는 형태입니다. 그 단어는 임무라는 의미도 있지만 사무엘하 427절에 쓰인 용례를 보면 인구조사소집의 의미도 있죠. 그래서 그 함밉갓 문은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백성들을 소집할 때 사용한 문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런 성벽과 문들이 대부분 무너져 황폐화된 것이죠. 그래서 성벽을 포함해 성문의 보수공사를 앞두고 느헤미야는 어제 2장을 살펴 본 것처럼 밤중에 몇 사람들을 데리고 성벽답사를 한 것이었죠. 그래서 느헤미야는 나귀를 타고 북서쪽에 위치한 골짜기 문으로 나가 남서쪽에 있는 분문을 거쳐서 동남쪽에 있는 샘문까지 잠행에 나섰던 것입니다. ‘골짜기 문에서 샘문까지는 예루살렘 성을 사각형 형태로 보았을 때 자 쓰기 순서대로 쭉 살펴본 것이었죠. 그리고 샘문에 다다랐을 때 이제 북쪽을 향해 성벽과 성문을 점검해 볼 차례였는데, 바로 그 지점부터는 각종 잔해물과 쓰레기 더미 때문에 나귀를 탈 수가 없어서 걸어서 살펴봤던 것이죠. 그렇게 해서 북쪽으로 가며 답사를 마무리하고, 다시 시작점인 골짜기 문으로 들어와 숙소로 들어간 것이었죠.

 

그렇게 답사를 끝마친 느헤미야가 오늘 3장에 이르러 본격적인 성벽 보수 공사를 진행하는 모습입니다. 느헤미야의 성벽보수 공사는 북동쪽에 위치한 양문에서부터 시작을 하죠.

1절에 나온 대로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기를 시작하여 시계 반대방향으로 성벽과 성문 보수공사를 순차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3절에 나오는 어문까지 성벽을 세워나가는데, 그 사이 곧 양문어문사이에 망대 두 개를 세우죠. 망대는 적을 관측할 수 있는 높은 타워를 칭하는데, 양문과 어문 사이에 함메아 망대와 하나넬 망대를 세운 것이죠.

 

어문다음으로 6절에 옛 문’, 13절의 골짜기 문’, 14절의 분문’, 15절의 샘문’, 26절의 수문’, 28절의 마문’, 그리고 마지막 31절의 함밉갓 문을 연결해서 짓고 세우죠. 그만큼 예루살렘 성벽과 성문 수리를 하는 이 모습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각자 정한 한 문을 기점으로 다음 연결지점까지 성벽과 성문을 세워나갔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제사장과 레위인과 상인, 그리고 일반 평민까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이 공사에 참여했다는 점이죠. 물론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자기 공사 구간만 아니라 다른 공사 구간까지 거들고 협력하기도 했지만, 그와는 달리 5절의 드고아 귀족들은 아예 자신들이 맡아야 할 공사까지도 참여치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든 함께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으면 좋은 결과를 이룰 수 있다는 점아니겠습니까? 백짓장도 받들면 낫다는 게 그런 이치죠.

그런데 느헤미야가 성벽과 성문 재건에 온 힘을 쏟은 진정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히 외형적인 건물의 벽과 문을 세우는데 집중했을까요? 아니죠. 그 성벽과 성문을 통해 백성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울타리, 곧 영적 방어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게 진정한 목적이죠.

 

비록 1차 포로귀환자들을 이끌고 온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주축이 되어 성전을 재건했다 해도, 2차 포로귀환자자들이 이끌고 온 에스라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대로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삼은 그 모습을 개혁했다고 하더라도, 성벽과 성문이 허물어진 상태로는 외부의 잦은 약탈과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죠. 그것은 단순한 약탈과 유혹을 넘어 그들의 영적 상태까지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있죠. 그래서 그런 외부의 약탈과 유혹을 차단하고, 더 나아가 백성들의 심령을 더욱더 공고히 해 줄 요량으로 성벽과 성문을 통해 영적 울타리를 든든하게 세워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에스라는 에스라서 7-10장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의 심령을 하나님의 율법으로 개혁코자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10장 이후에 에스라 선지자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지 않고, 페르시아 왕궁으로 돌아갔다고 성경학자들은 전하죠. 그러니 느헤미야로서는 성벽과 성문을 재건하는 그 일을 통해 그들의 영적 울타리를 더 확고하게 세워나갈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성전도 있고, 제사장과 레위인도 있지만, 진정한 영적 울타리를 확고히 쳐야 다시금 외부의 약탈과 유혹에 빠져들지 않고 그들의 심령을 견고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온 백성들이 나서서 자신들이 맡은 할당 부분에 모두가 참여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성벽과 성문을 재건하는 그 일을 통해 그들의 심령상태를 깨닫고 그들 모두가 영적인 울타리까지 견고하게 칠수 있도록 말이죠.

 

그렇게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음성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회복을 원한다면 교회생활을 문제 삼기보다 교회생활을 안정적으로 하지 못하게 하는 외적인 요인 곧 외부의 약탈과 유혹을 먼저 살피는 게 중요하죠. 그 일로 수치를 당하지 않고, 견고한 울타리를 세울 수 있는 방안도 간구하는 것 말이죠. 그만큼 영적인 울타리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나의 신앙생활을 침해하는 요소가 있다면 기꺼이 영적 울타리를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묵상과 기도

사랑하시는 주님.

3차 포로귀환의 인솔자인 느헤미야가 백성들에게 자신들이 사는 근처의 성벽과 성문을 세우도록 독려했습니다.

그 일에 모두가 뜻을 모아 합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성벽과 성문을 세우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를 통해 영적 울타리를 굳게 세우고 영적 신앙생활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저희들도 성벽과 성문을 보수 공사하는 심정으로 영적 방어체계를 구축하게 하시고,

세상의 사고방식과 유혹을 차단하여,

온전한 은혜의 울타리를 구축하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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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시리라(4:1-23)

3차 포로귀환 인솔자인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쉼을 얻은 후에, 몇 몇 사람들과 나귀를 타고 성 주위와 성문들을 둘러봤습니다. 이른바 잠행에 나선 것이었죠. 그런 뒤 유다 사람들과 제사장들, 귀족들과 방백들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보시는 바와 같이 우리가 당한 곤경은 참으로 황폐하기 짝이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파괴되었고, 성문은 불 타버렸습니다. 이제 우리가 예루살렘 성을 쌓아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하십시다.”(2:17)하고 말이죠.

느헤미야는 자기 민족이 처한 현실을 곤경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곤경은 히브리어로 라아인데, ‘재앙을 의미하죠.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지 않아 지금 심판을 당해 재앙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느헤미야는 지금 당하는 민족의 현실을 수치헤르파’, 다른 말로 능욕을 당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선민 이스라엘의 영광이 산산이 부서지고 사라졌음을 한탄한 것이죠. 그래서 예루살렘 성을 쌓아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하자고 여러 방백들에게 말한 것이죠. 그 말 속에는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다시는 저버리지 말자는 의도가 담겨 있는 고백이죠. 그만큼 예루살렘 성벽과 성문 재건은 단순한 건축물이나 문화재 복원차원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을 씻어내고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갈 정체성과 자부심을 각인시키는 일임을 천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읽은 3장을 통해, 각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성벽과 성문을 재건하기 시작했음을 살펴봤습니다. 그러나 그 성벽과 성문을 재건하는 일이 단순히 건물의 외벽과 문을 세우는 수준을 넘어서서, 궁극적으로는 외부 세력의 침략과 유혹에 대비하는 울타리를 치는 일이라고 했죠.

오늘 읽은 말씀은 성벽과 성문을 재거하는 일이 순탄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장에서 뭔가 치밀한 리더십 아래에 백성들의 긴밀한 협력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자기 임무를 책임감 있게 수행하는데, 그에 맞서는 대적들의 방해공작도 매우 치밀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본문 1절에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들을 비웃으며.”

여기에 산발랏이 등장합니다. 이 산발랏은 210절에 이미 등장했던 사람이죠. 그 사람은 느헤미야와 함께 3차 포로귀환하는 사람들을 환영하지 않는 사람이었죠. 그 산발랏은 호론 사람으로서, 사마리아인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입니다. 유대 나라가 바벨론에 멸망을 당하고, 또 페르시아의 소국이 될 때 북쪽 사마리아를 통치하던 실세 중의 실세였던 사람이죠. 그 뿐만이 아니라 그는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통해 이스라엘의 몇몇 지도자들과 친인척 관계를 맺어둠으로써 유대 사회에서도 영향력을 행하사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는 느헤미야와 함께 한 3차 포로귀환자들을 환영하지 않았던 것이고,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자고 할 때도 219절을 통해 비웃고 업신여겼던 사람이었죠. 그만큼 그는 예루살렘 성벽과 성문을 재건하는 일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이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의 동태를 예의주시하며 살피고 있었던 것이죠.

 

본문 2절입니다.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일러 말하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산발랏은 예루살렘 성벽과 성문을 재건하려는 이들을 향해 조롱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가 사용하는 말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 불탄 돌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등 평가절하는 말을 서슴없이 내 뱉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산발랏의 조롱이 터무니없는 유언비어가 아니라는 점이죠. 전혀 내용 없는 말이라면 개가 풀 뜯어 먹는 소리라며 그냥 넘어갈 수 있겠지만, 산발랏의 그 조롱 내용은 느헤미야와 백성들이 실제로 마주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니 산발랏의 조롱 앞에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 곧 성벽과 성문을 재건하려는 백성들의 맥이 빠져버릴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산발랏의 비방과 훼방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주변 세력을 규합하고서, 무력행사도 서슴지 않겠다고 협박을 하죠. 본문 7-8절에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허물어진 틈이 메꾸어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노하여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치고 그 곳을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

산발랏이 규합한 세력들은 이스라엘 남쪽의 아라비아 사람들, 동쪽의 암몬 사람들, 그리고 서쪽의 아스돗 사람들이었습니다. 북쪽에 세를 두고 있는 산발랏을 비롯하여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예루살렘의 회복을 원치 않던 족속들이었죠. 그래서 그들의 세를 규합하여 동서남북 사방에서 몰려들어 유다 사람들을 치겠다고 공포감을 조성한 것입니다.

그만큼 그들은 세를 규합하여 유다 사람들을 와해시켜, 깊은 좌절과 절망으로 몰아넣고, 궁극적으로 성벽과 성문 재건을 못하게 만들겠다는 심사였죠. 10-11절에 그게 나타나 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짐을 나르는 자의 힘이 다 빠졌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고 우리의 원수들은 이르기를 그들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그들 가운데 달려 들어가서 살륙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하고.”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까요? 느헤미야와 온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선한 도우심을 힘입어 성벽과 성문을 재건하고자 하는데, 그때 방해세력들이 등장해 조롱하고 비웃고, 또 위협을 가하겠다고 협박을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유다 백성들은 어떻게 할까요? 이런 상황이 비단 그들의 삶 속에만 펼쳐지는 게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동일한 모습으로 다가올 때가 있죠. 우리의 눈에 보이는 세력이든지, 눈에 보이지 않는 세력이든지 말이죠.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그런 세력들은 우리가 하나님 백성으로 사는 것 자체를 혐오하고 조롱하고, 방해공작을 펼치죠.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데 의미를 두는 것 자체를 비웃고 조롱하며, 오직 이 땅의 것에만 집착하게 만들고 유혹하고 영적인 삶을 사는 데 방해공작을 펼치죠. 그래서 우리 존재 자체를 무시하고, 또 거룩한 뜻을 거절시키고, 비난과 조롱, 심지어 죽음의 공포까지도 몰아넣고자 하죠.

 

이때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이 어떤 자세를 취합니까? 본문 14절에 보면 느헤미야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 곧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독려하죠. 그 하나님께서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해 싸우실 것이라고 말이죠. 15절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의 꾀를 폐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죠.

그런 느헤미야의 독려와 함께, 백성들이 어떤 자세를 취합니까? 16절에 보면 절반은 일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지고 대처하는 모습이죠. 더욱이 20절에서는 서로 맡은 할당 구역이 멀기 때문에 그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침투해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방해세력이 침투해 들어오면 그곳에서 나팔을 불고, 모두가 그 곳으로 몰려들어 대적들을 맞서 싸우자고 대비책도 세우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방해공작을 펼치는 세력들도 조직적으로 나서고 있고, 또 성벽과 성문을 쌓아 올리는 유다 백성들도 조직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이죠.

그러나 서로가 그렇게 조직적으로 맞서고 또 적극적으로 대비하는 모습이지만, 거기에는 큰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성벽과 성문을 못 쌓아 올리게 하는 산발랏과 연대하는 조직적인 세력들은 자신들의 인간적인 능력만 의지하는 자들이고, 그에 맞서는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의 조직력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강력하게 의지하는 자들이라는 차이 말입니다. 그래서 20절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너희는 어디서든지 나팔 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느니라.”(20)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그 길 위에 방해하는 세력들,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그 세력들이 있을 때, 그를 대비할 수 있는 조직력도 세우되, 더욱더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그때 선한 응답을 베푸실 줄 믿습니다.

 

*묵상과 기도

사랑하시는 주님.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이 땅에 심으신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믿기에 오늘 하루,

참된 하나님 백성으로 살기를 두려워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를 위해 친히 싸우시고,

우리를 끝까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 가시는 그 강한 팔을 의지하며,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를 굳게 세우는 하루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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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 년 동안은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5:1-19)

느헤미야가 자기 친동생과 동포들로부터 고국의 상황을 전해 들었죠. 예루살렘 성읍은 황폐화되었고, 성벽과 성문이 다 무너져 내렸다고 말이죠. 그때 왕 앞에 서기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금식하며 기도했는데, 4개월이 지날 때 드디어 왕 앞에 술맡은 관원이 되어 알현할 수가 있었죠. 그때 느헤미야는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모습으로 아닥사스다 왕 앞에 섰고, 왕이 필요를 묻자,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왕에게 자기 계획을 이야기했죠. 말미를 주시면 자기 고국에 돌아가 성벽과 성문을 재건하고 돌아오겠다고 말이죠. 대신에 바벨론 지역의 강을 건너 유다 땅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행증을 주시고, 또 성벽과 성문을 재건할 나무 벌목허가증까지 주라고 요청했죠. 그에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드디어 유다 땅을 밟게 되었죠. 그리고 몇 몇 사람들과 함께 잠행에 나서 무너진 성벽과 성문들을 둘러본 다음에 유다 방백들에게 우리의 수치를 면하도록 하기 위해 힘을 모아 성벽과 성문을 재건토록 하자고, 그를 위해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 왕에게 감동을 주셔서 나를 이곳으로 보냈다고 이야기했죠. 그러자 모든 방백들과 백성들이 뜻을 모아 성벽과 성문을 재건하기 사작했죠. 각각 자기들이 사는 지역의 성벽과 성문을 할당된 대로 세워나가기 시작했죠. 물론 그 성벽과 성문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그들의 영적 울타리를 세우는 일이었죠. 외부 세력의 약탈과 유혹에 방비하여 자신의 신앙심을 굳게 지키는 것,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들의 심령을 굳게 세우는, 그런 영적 울타리와 다를 바 없었죠.

하지만 그런 선한 일을 추진해 나가는데 방해세력들이 있었죠. 이전에 느헤미야가 3차 포로 인솔자들을 데리고 유다 땅을 밟을 때도 좋지 않게 여긴 이들, 이른바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예루살렘 성읍을 치겠다며, 반대하며 음해공작을 펼치고 나섰죠.

그때 느헤미야가 어떻게 합니까? 느헤미야는 성벽과 성문을 재건하고 있는 모든 방백들과 백성들을 향해 선포하죠.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들이 조직적으로 방해하는 세력들은 육신의 힘이지만, 우리를 돕는 이는 천지를 지으신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면 그들의 꾀를 폐할 것이고, 대신에 우리의 형제와 자녀들과 집을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싸워주실 것이라고 독려하죠. 그때부터 유다 방백들과 온 백성들은 반쯤 나눠서 그 일에 대응했죠. 한 쪽 부류의 사람들은 동이 틀 때부터 별이 날 때까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칼을 차며 적들을 대비하고 있고, 또 한 쪽 부류의 사람들은 성벽과 성문을 세우며 건축하는 일에 매진했죠. 그 일들을 교대로 하며 철저하게 행해나가는 모습이죠.

 

오늘 본문은 그렇게 열심히 진행하는데,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른바 성벽과 성문을 재건하려는 그 외적인 세력들의 반대가 아닌, 유대 백성들의 내부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 1절에 그 때에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양식을 얻어 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가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저당 잡히고 이 흉년에 곡식을 얻자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서 왕에게 세금을 바쳤도다.”

성벽재건 공사에 동원되느라 생계를 위한 곡식이 떨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밭과 포도원과 집을 저당 잡히게 된 것이죠. 돈이 많은 사람들은 가난한 백성들의 밭과 포도원과 집을 저당 잡아 돈을 빌려주었고, 돈을 갚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들의 밭과 포도원과 집을 빼앗게 되는 형국이죠. 심지어는 빚진 돈 때문에 자기 자녀들이 그들의 종으로 팔리는 형국이 된 거죠.

 

그렇듯 느헤미야 5장은 유대 내부의 문제, 곧 유대 사회에서 가난한 자들의 부르짖음으로 문제가 터져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5절에 원성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상황이죠.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 된 자가 있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무 힘이 없도다 하더라.”

가난한 자들이 자기 자녀들을 종으로 파는 형국인데 오죽했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부자들은 그만큼 그들을 동족으로 보기는 하지만 철저한 거래관계로 바라본 것이었죠. 형제 된 동족들의 상황과 처지는 안중에 없었고, 오직 원금과 이자 회수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이죠. 형제가 생계의 근간을 상실하고 고통을 당해도, 부자들은 그 고통과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형제가 돈이 없어 자녀를 상실하고 부르짖어도, 그들의 부르짖음과 자신들은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오직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고, 가난한 형제는 쓸모없고 무능한 존재라고 치부했던 거죠.

 

그때 느헤미야가 어떻게 합니까?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의 방백들 곧 지도자들과 부한 자들을 향해 꾸짖습니다. 본문 8-9절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그들이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행이 좋지 못하도다 우리의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

느헤미야는, 성전을 재건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거래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형제임을 분명히 말합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이죠. 그래서 정말로 방백들 곧 지도자들과 부한 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 동족들, 곧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우리 민족들, 그 중 가난한 자들을 거래의 대상, 부를 축적하는 대상이 아닌 형제애로 사랑하는 관계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진정으로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한다면, 하나님께서 형제로 살게 하신 그들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 따른 구체적인 경외 방법을 느헤미야가 제시하죠. 본문 10-11절을 통해 밝힙니다. 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양식을 백성에게 꾸어 주었거니와 우리가 그 이자 받기를 그치자 그런즉 너희는 그들에게 오늘이라도 그들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이며 너희가 꾸어 준 돈이나 양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의 백분의 일을 돌려보내라.” 느헤미야는 가난한 동족들이 집과 전토를 잃고 자식들까지 종으로 팔려나간 그 현실의 해결책으로, 그들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고, 꾸어준 돈과 양식과 포도주와 기름도 백분의 일을 돌려서 보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최소한의 살길을 서로가 열어주자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행동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게 있습니다. 백성들에게만 느헤미야가 그런 요구를 했다면, 바궈 말해 느헤미야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느헤미야 자신이 그런 삶을 살았기에 과감하게 그런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본문 14절에 나와 있습니다.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부터 제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자신이 유대의 총독으로 지내는 12년 기간 동안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경외함이 길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성벽과 성문을 재건하는데 많은 비용과 세금이 들어가기 때문에 자신부터 그 녹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솔선수범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방백들과 부자들에게 그런 요구를 할 때 기꺼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렇기에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란 내 주변의 동료들, 혈육들, 교우들, 가난한 자들의 삶을 외면치 않는 것이죠. 하나님을 사랑하듯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베푸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죠. 내가 그 삶에 본을 보이면 나를 아는 사람들도 따라 행할 것이요, 내 자녀들도 그런 삶을 살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죠. 아무쪼록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곧 내 형제와 이웃의 아픔에 손을 내밀며 사는 삶을 살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묵상과 기도

사랑하시는 주님.

하나님을 경외하되 추상적인 경외에서 벗어나 내 형제 내 교우 내 이웃의 아픔에 손을 내미는 경외의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듯 아래로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느헤미야가 그 삶을 솔선수범했기에 유다 방백들도 그 삶을 따랐습니다.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 동굴집 객실이 없어서 우리간 구유통에 누이셨는데,

그런 집이라도 있다면 내어줄 수 있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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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만에(6:1-19)

느헤미야가 허물어진 성벽과 성문을 재건코자 하는데 외부적인 문제와 내부적인 문제에 봉착했죠. 외부적인 문제란 산발랏과 도비야와 암몬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 그리고 아스돗 사람들 등 유다의 동서남북 사방에서 조직적으로 성벽재건을 방해하는 세력들이 등장한 점이었죠. 그때 느헤미야가 어떻게 해결해 나갑니까? 하나님께서 이전에 어떻게 은혜를 베푸셨는지 기억하면서, 그 하나님을 붙잡고 더욱 강한 믿음으로 나아가고 주문했죠. 그래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그 공사를 하면서 한 손에는 병기를 한 손에는 일을 했죠. 그런 식으로 무리의 절반은 창을 잡았고 무리의 절반은 일을 하는데 여념이 없었죠.

그렇게 외적인 문제를 그런 방식으로 지혜롭고 또 담대하게 헤쳐 나갔는데, 내적인 문제도 밀려왔죠. 이른바 유대 사회의 요동이었죠. 성벽과 성문을 재건하는데 그 일에 참여한 이들의 가난과 굶주림의 문제에 봉착한 것이었죠. 방백들 곧 지도층에 속하는 이들과 부유한 계층에 속하는 이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밭과 포도원과 집을 저당 잡았고, 심지어 자식들까지 노예로 팔아넘기는 일들이 속출한 것이었죠. 그런 내적인 문제가 닥쳐왔을 때 느헤미야가 어떻게 했습니까? 느헤미야는 성전을 재건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은 거래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형제라고 강조하죠. 그러니 그들을 통해 부를 축적하려고 하지 말고 형제애로 사랑하는 관계로 나가야 한다고, 그러니 그들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고, 꾸어준 돈과 양식과 포도주와 기름도 백분의 일을 돌려보내 살 길을 열어 달라고 주문하죠. 느헤미야가 그렇게 과감하게 주문하고 명령할 수 있었던 것은 느헤미야 총독으로 재임하던 12년 동안 녹을 받지 않고 살았기에 그런 주문이 가능했고, 지도층과 부유층에 속한 사람들이 그래서 적극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오늘 읽은 말씀은 이전의 외적인 저항세력들이 더욱 거세게 몰아붙이는 상황 속에서 느헤미야가 어떤 자세로 그들을 대항하며 끝끝내 성벽과 성문을 재건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원수들이 내가 성벽을 건축하여 허물어진 틈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그 때는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였더라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었더라.”

산발랏과 도비야와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느헤미야를 만나자고 합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느헤미야와 3차 포로귀환자들을 환영하지 않은 자들이었고, 성벽과 성문을 재건할때에도 비웃던 자들이었고, 그 뒤에는 조직적으로 방해공작을 펼치던 자들이었죠. 그들 때문에 느헤미야는 방백들과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더 담대하게 성벽과 성문을 재건토록 권면했죠. 그래서 한 손으로는 창을 들고 한 손으로는 일을 할 정도로 그들의 공격에 대비까지 하면서 적극적으로 매달렸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들이 도저히 안 되겠다 생각했는지, 느헤미야와 만나 이이야기 할 수 있는 회합을 주선하는 모양새입니다. 아예 느헤미야를 죽일 생각으로 그런 모임을 꾸민 것이죠. 회합 장소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 약 32Km지점에 있는 오노 평지의 한 촌이었는데, 느헤미야는 응하지 않죠. 그들의 음모를 뻔히 알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자 4번에 걸쳐 사람을 더 보냈는데, 그때도 느헤미야는 꿈쩍도 하지 않죠. 그러자 이번에는 그들이 느헤미야에게 역모로 몰아 부칠 계획을 하죠. 그래서 역모가 담긴 편지를 봉인도 하지 않은 채 느헤미야의 역모를 모두가 알도록 하죠. 물론 그 역모는 거짓이죠. 그런데도 그들이 그런 역모를 꾸미는 것은 느헤미야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백성들의 민심을 흔들려는 것이었죠. 하지만 느헤미야는 요지부동입니다. 가짜들이 흔드는 판에 결코 춤을 출 수가 없었죠.

오히려 느헤미야는 그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자세를 갖춥니다. 본문 9절 하반절에 이렇게 기도를 드립니다.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그들의 음모 앞에, 그들의 역모 앞에 흔들리지 않고, 더욱더 힘을 내서 그들에게 맞설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는 모습입니다.

 

그런 과정 속에 또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본문 10절에 보면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두문불출했다고 하죠. 그래서 느헤미야가 그를 만나러 그의 집에 갑니다. 아마도 스마야가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를 찾으러 그의 집으로 갔겠죠. 스마야는 에스라 260절과 느헤미야 108절을 보면 제사장 출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오늘 본문 10절 하반절을 보면 느헤미야에게 예언의 말씀을 전하는 역할을 하는 자이기도 하죠. 바꿔 말하면 느헤미야에게 제사장이자 선지자인 스마야는 성벽과 성문을 재건하는 일에 중대한 역할을 했던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지금 함께 일을 하다가, 또 함께 기도하다가, 함께 하나님의 뜻을 받들다가 사라진 마당이니, 그를 찾으러 그의 집에 간 것이죠.

문제는 그가 느헤미야에게 예언하는 듯한 말입니다. 적들이 너를 죽이러 올 것이니,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머물고 그 문을 닫도록 하라고 말이죠. 그때 느헤미야는 내가 어찌 도망가서 숨을 수 있겠느냐, 하고 말하죠. 한 마디로 이 어려운 상황에 나 혼자 살겠다고 숨을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12절에 보면 깨달은 즉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와 말을 주고받다가,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스마야는 제사장 신분으로서 그 산발랏과 도비야에게 뇌물을 받고 예언을 한 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의 마음에 불안을 심어주면 백성들의 전열이 흐트러질 것으로 내다보고, 그런 예언을 하게 했던 것임을,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영에 의해 깨닫게 된 것이죠.

그때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다시금 기도를 올리죠.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의 소행을 기억하옵소서.”(14b)하고 말이죠. 그만큼 느헤미야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데에는 엄청난 방해공작과 음해세력이 조직적으로 무너뜨리고자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때마다 느헤미야가 취한 자세는 기도하는 자세였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느헤미야에게 깨달을 수 있는 영을 주셔서 거짓을 분별하고 참된 길로 나아가게 되었죠.

그리고 마침내 느헤미야는 본문 15-16절을 통해 성벽의 역사를 마쳤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그 엄청난 음해세력과 방해세력들이 공략하고 음모를 꾸미고 역모로 몰아붙이려고 해도, 느헤미야는 끄떡도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묵묵히 기도하며 나아갔고, 급기야 그 힘든 과정들 속에서도 끝내 그 성벽과 성문을 완공해내는 모습이죠.

 

본문 16-19절은 그런 방해공작을 펼쳤던 도비야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18절을 보면 도비야는 산발랏과 더불어 북쪽 사마리아 사람인데, 유다 방백들 곧 유다 지역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 정략적인 결혼을 통해 서로 동맹관계를 맺었던 인물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총독 느헤미야가 아무리 공권력을 갖고 백성들을 진두지휘해서 성벽과 성문을 재건코자 해도 그토록 어려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유다 방백들과 정략적인 결혼을 해서 튼튼한 동맹관계를 형성했다고 해도, 또 그들이 제사장들까지 뇌물을 써서 매수했다 해도, 성벽 역사는 52일 만에 완성이 됐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단지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의 열심 때문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선한 도움의 손길이 없었던들, 결코 그렇게 빨리 이룰 수 없는 일이었죠.

 

그렇기에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닫는 바가 무엇입니까?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아무리 음해세력과 방해공작을 펼치는 세력들이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통해 그 일을 끝끝내 해낼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베풀어주신다는 점입니다.

 

 

[전자책] 하나님의 시간표

이 책은 지난 몇 년간 설교 말씀을 통해 나눈 예화다. br예화는 설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br말씀의 이론을 실제화할 수 있는 간증이기 때문이다. br그만큼 예화는 설교에서 중요한 몫을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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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과 기도

사랑하시는 주님.

성벽과 성문을 재건하는 일, 기필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들의 영적인 울타리를 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런 기뻐하시는 일에 온갖 음해세력과 방해공작을 펼치는 세력들이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그 일을 끝끝내 해 낼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오늘도 저희의 삶의 현장 속에 그런 능력을 베푸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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