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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역대상

역대상 1-4장 새벽설교

by 권또또 2021.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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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에노스(역대상1:1-54)

오늘부터 역대기 상하서를 살펴보게 됩니다. 본래 히브리어 성경은 역대기 상권과 하권이 한 권의 두루마리로 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대기의 히브리어 제목도 디브레 하야밈인데 역대상 2724절의 날들의 사건들이란 히브리어 본문 자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날들의 사건들이 우리말 역대기와 유사한 면이 있는 것이죠. 그랬던 디브레 하야밈이란 책제목이 헬라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이 통치할 때 72명의 학자들로 하여금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게 했는데, 그때 편찬한 책을 70인역 또는 셉투아젠트라 하는데, 그 책을 편찬하면서부터 역대기 상하서 두 권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대기상하서는 누가 쓴 것일까요? 성경학자들은 보통 에스라가 쓴 것으로 추정을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가 실은 역대기계 역사서로 불린다는 점입니다. 이른바 이전에 우리가 살펴 본 사무엘상하서와 열왕기상하서가 신명기계 역사서라 한다면, 역대기상하서와 에스라 그리고 느헤미야서가 역대기계 역사로 불린다는 점이죠. 이유가 뭘까요? 사무엘상하서와 열왕기상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살지 못한 이스라엘이 왜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관점을 갖고 기록했다면, 역대기상하서는 멸망당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놓고 다윗 왕조의 재건을 중심으로 다시금 이스라엘 역사에 희망을 불어넣고자 역대기상하서를 편집해서 기록했다는 점이죠. 그래서 포로에서 돌아 온 서기관이나 학사 출신의 에스라가 이전의 자료들과 동시대의 자료들을 수집해서 다윗 왕조의 재건을 바라는 목적으로 역대기서를 쓴 것으로 생각들을 합니다. 당연히 이전의 사무엘상하서와 열왕기상하서에 나온 내용들이 첨삭된 게 많고, 왕조의 흐름도 통일왕국 이후에 분열왕국 가운데 북왕국 이스라엘의 역사는 빼버렸고, 남왕국 유다의 역사에 관한 흐름을 전개시켜 나간다는 점입니다. 이유인 즉 다윗 왕조의 재건을 목적으로 역대기상하서를 썼기 때문이죠.

 

물론 역대상하서도 사무엘하서나 열왕기상하서처럼 이스라엘의 정치와 역사적인 관점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대기상하서를 기록한 진정한 목적은 이스라엘의 정치 역사만을 보여주고자 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곧 언약백성을 중심으로 어떻게 세계를 통치하셨는지를 보여주고자 한 게 그 목적입니다.

 

역대기 상하서를 단권으로 생각했을 때 전체적인 구조는 그렇게 돼 있습니다. 역대기상 1-9장까지는 아담에서 아브라함을 거쳐 이스라엘의 12 지파에 관한 족보, 역대상 10-29장까지는 다윗 왕과 성전건축 준비, 그리고 역대하 1-9장까지는 솔로몬의 성전건축과 통일 왕국의 역사, 역대하 10-3621절까지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뺀 유다 왕국의 역사, 그리고 마지막 역대하 3622-23절까지는 바벨론 제국에 뒤를 이은 바사 제국 곧 페르시아 제국의 왕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 유다 백성들이 포로 귀환하는 모습을 담고 있죠. 그와 같은 역대기상하서의 전체적인 구조를 이제 따로 떼어서 역대기상서만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죠. 역대상 11-54절은 아담의 계보에서부터 아브라함 그리고 에서의 계보까지 나오고, 21절에서 840절까지는 야곱 곧 이스라엘 자손의 계보, 91-34절은 예루살렘의 백성들 곧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밝혀주고, 935-44절은 사울 왕의 가족들, 101-1240절까지는 다윗이 왕이 된 사건, 131-1643절까지 다윗이 언약궤 곧 법궤를 옮긴 사건, 171-27절까지 하나님께서 다윗과 특별한 언약을 맺는 모습, 181-208절까지는 다윗의 전투 현장, 211-마지막 2930절까지는 다윗이 성전 건축을 준비한 모습으로 끝을 맺습니다.

 

오늘 읽은 역대상 1장 말씀은 아담의 계보로부터 시작해 아브라함과 에서의 계보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만 해도 200여 명이 올라와 있죠. 그야말로 이름으로부터 시작해 이름으로 끝나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름들을 읽을 때 무슨 생각이 드셨습니까? 본문 속에 등장하는 이름들 가운데 익히 아는 사람의 이름이 나오면 그에 관한 일생이나 행적들이 떠오르기 마련이죠.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에서도 신문이나 책 속에 내가 아는 사람의 이름이 나오면 금방 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사람이 선한 업적을 남겼는지, 아니면 악한 행동만을 일삼았는지, 그 사람의 추억까지 다 떠오르죠. 그래서 우리가 마지막까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에 남는가, 하는 점입니다. 더욱이 사람 앞에도 물론이거니와 하나님 앞에서도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그것도 정말 중요한 몫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행위는 하늘 나라 생명록 책뿐만 아니라 행위록 속에 다 기록되기 때문이죠.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천수(天壽)를 다 산 뒤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이 그것 아닙니까? “착하고 충성된 종아하는 그 격려와 칭찬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그렇게 기억되듯이,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물론이고 죽어서도 이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한 컷의 영상으로 간직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11-27절까지는 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고, 28-33절까지는 이스마엘의 족보를, 34-42절까지는 에서의 족보를, 43-54절까지는 에돔 땅을 다스린 왕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54절까지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만일 이 많은 이름 중에, 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의 이름이 있다면 지루하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읽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금방 떠오르는 이름이 누가 있습니까? 아담도 있고, 에노스도 있고, 에녹도 있고, 므두셀라도 있고, 노아도, 셈과 함과 야벳도 있지 않습니까? 27절의 아브람 곧 아브라함도 잘 알고, 28절에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삭과 이스마엘도 알고, 34절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에서와 야곱 곧 훗날 에돔의 조상이 된 에서그리고 훗날 이스라엘이 된 야곱도 잘 알죠.

 

그렇듯 우리는 누군가 내가 아는 사람이 어떤 책이 나오면 유심히 들여다보는 태도를 취합니다. 어떤 분이 영화를 보고 마지막 엔딩 자막이 올라가는데도 일어나지 않고 끝까지 영화관에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친구가 묻자 그렇게 대답했다고 하죠. 그 영화에 자신이 아는 사람이 출연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 걸 직접 보기 위해서 끝까지 기다렸다는 것 말입니다. 물론 그 자막에 나오는 사람은 비주얼이 크지 않은 엑스트라에 불과했다고 하죠. 하지만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배우였지만 그 분과 관계된 배우였기에 그에게는 주목받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세계 70억 명 이상이 사는 이 세상에서 그리 많은 사람들에게 이름일 알려진 무명배우와 같을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나와 관계된 사람들은, 그것도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나의 존재를 각인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고, 어디가 아픈지, 어디가 안 좋은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지만, 나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 누구도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그 만큼은 나에게 관심을 갖고 살아간다는 점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그것은 당연합니다.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로 살도록 하기 위해 이 세상에 부모의 태를 통해 나를 이 세상에 두신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동안 내 생명을 하늘나라로 부르실 때까지 나를 눈여겨보고 계신다는 점, 우리가 기억해야 할 바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의 200여 명의 이름이 왜 등장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역대기는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포로로 끌려가 70년 동안 사는 동안, 바벨론에 이어 바사 곧 페르시아 제국이 세계를 통치할 때 고레스 대왕이 칙령을 내려 유대 백성들을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않습니까? 그때 그 고국에 돌아온 이들이 다시금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다윗 왕조의 재건을 목적으로 역대기를 편집 수정해 기록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여기에 등장하는 200여 명의 이름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의미 있는 이름들일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바도 그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나 일터에서 나를 아는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의미 있는 이름, 선한 한 컷의 영상을 남는 삶을 사는 것 말이죠. 후대의 누군가 내 모습을 통해 믿음의 감동과 도전을 받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선한 역사를 써나가는 주님의 도구가 될 테니 말입니다.

 

*묵상과 기도

사랑하는 주님.

아담의 모든 후손들을 사랑하시고,

의미 있는 한 컷의 영상을 지닌 200여명의 사람들을 기록하게 하심 감사드립니다.

오늘을 사는 저희들도 그런 삶을 살게 해주시옵소서.

하루하루 참된 의미와 가치를 지닌 한 컷의 영상으로 남는 삶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주님 앞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인정받는 삶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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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아들은(대상2:1-55)

 

역대상 1-9장까지는 아담에서 아브라함을 거쳐 야곱 곧 이스라엘의 12 지파들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중 지난 시간에 읽은 역대상 1장에는 아담의 계보에서부터 시작해 아브라함과 에서의 계보까지 잇고 있었죠. 그 이름만 해도 200여 명의 이름이 올라와 있는데, 그 이름 하나하나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의미 있는 이름이었죠. 그렇듯 우리도 우리가 아는 사람들에게도 의미 있는 인생, 하나님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아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한 컷의 영상으로 기억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도 실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면서 족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만 1장에 기록된 족보와 비교하면 사뭇 다른 흐름이 전개된다는 것을 알 수 있죠. 1장이 아담에서부터 아브라함을 거쳐 이스마엘과 에서의 계보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면, 2장부터는 야곱과 그 열두 아들의 족보에 관한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과연 무슨 차이일까요? 1장은 하나님의 관심이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 이방 민족에게까지 퍼져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고, 2장부터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한 것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이스라엘의 아들은 이러하니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과 단과 요셉과 베냐민과 납다리와 갓과 아셀이더라.”

야곱 곧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 12지파에 대한 족보를 기록해 나가는데, 그 첫 번째로 야곱의 열두 아들의 이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선뜻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야곱의 장자는 분명 르우벤인데 유다를 맨 먼저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창세기 3523절에서 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요 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분명 그렇게 밝혀주고 있는데 오늘 본문 3절에서는 유다의 아들은하고 시작을 합니다. 장자 르우벤의 자리를 유다가 차지한 모습이죠.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르우벤이 아버지 야곱의 침상 곧 배다른 어머니의 하체를 더럽힌 사건으로 인해 장자의 명분을 박탈당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죠. 창세기 493절에서도 그 사실을 밝혀주고 있죠.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르우벤이 장자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권한을 침범한 죄로 인해 장자의 자격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장자의 명분을 이어받은 요셉의 아들 므낫세나 에브라임이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합니다. 야곱의 가족이 애굽에 들어가 잘 살 수 있어던 근거를 요셉이 세워줬기 때문이죠. 그래서 르우벤을 대신할 장자의 권한은 요셉 곧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돼야 하는데 본문 3절은 요셉과는 관련이 없는 유다를 먼저 세우고 있습니다.

과연 무슨 이유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은 역대기를 기록한 목적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미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 있듯이 바벨론 포로 70년의 삶에서 이제 막 벗어나 고국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근원과 뿌리를 상기시키는 게 역대기의 기록 목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 제국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지금은 페르시아의 압제 속에 있어서 모든 게 잿더미가 됐지만 그들은 여전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 속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 것 말이죠. 그를 위해 다윗 왕족의 영예를 되찾고자 한 것이고 그를 위해 계보를 밝히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죠. 그래서 다윗 왕의 선조가 곧 유다요, 야곱의 장자를 르우벤이 아닌 유다로 치켜세운 것도 바로 그런 이치인 셈이죠. 다윗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 가장 강성한 대국을 이끌었던 왕이라는 점입니다. 그와 같이 유다의 족보로부터 시작된 다윗의 계보를 맨 먼저 언급함으로써 그들이 여전히 하나님과의 언약 속에 있는 민족임을 역대기 기자가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혈통으로나 육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 하지만 유다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보면 우리 모두도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것이죠. 이스라엘이 바벨론과 앗수르라는 거대 제국의 침략을 받았던 것처럼 영적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도 세상의 거센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벽이 무너지고 성전이 파괴된 것처럼 우리의 거룩한 믿음도 세상의 거친 공격을 받아 넘어질 수 있구요.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죄와 유혹에 넘어질 수도 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언약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은총의 언약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고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압제를 받고 있다 하더라도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언약 안에 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 큰 사랑의 언약과 은총이 우리를 여태껏 붙잡고 이끌어 주신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가끔 넘어지고 쓰러지더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를 회복시켜 주고 있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금 세워주시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66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구원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쓰러져 있는 우리를 내버려 두시지 않고 당신의 사랑으로 일으켜 세우셔서 영광의 그 날까지 이끌고 가신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압제를 받으면서도 고국으로 돌려보내게 한 고레스 대왕도 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 속에 일어난 일임을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 모든 근원적인 토대를 유다의 후손인 다윗과의 언약에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3-4절입니다. 유다의 아들은 에르와 오난과 셀라니 이 세 사람은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이 유다에게 낳아 준 자요 유다의 맏아들 에르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죽이셨고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유다에게 베레스와 세라를 낳아 주었으니 유다의 아들이 모두 다섯이더라.”

여기에서 유다 지파의 계보를 잇는 두 명의 여인을 소개하죠.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과 다말입니다. 사실 이 두 여인의 이름은 굳이 족보에 기록할 필요가 없습니다. 첫 번째 기록된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은 이방 여인이고, 두 번째 여인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로서 대를 잇고자 창기의 모습을 하면서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아들을 낳게 된 여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율례와 법도에 비춰봤을 때 결코 떳떳하지 못한 두 여인이죠.

그런데도 왜 유다의 족보에 두 여인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죄에 대한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보여주기 위함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코 죄를 싫어하신 분입니다. 죄는 속성상 하나님과 원수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죄 때문에 독생자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제물 삼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두 여인을 유다 족보에 넣고 있는 이유는 그녀들의 죄를 그냥 덮고 넘어가는 관점이 아니라 그렇게 온전치 못한 인생까지도 하나님께서는 친히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주도해 가신다는 점을 밝혀주고자 한 것이죠.

그것은 그 여인들만 그런 게 아닙니다. 본문 3절에 나오는 유다의 맏아들 에르도 마찬가지죠. 7절에 나오는 갈미의 아들 아갈아간도 마찬가집니다. ‘에르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범한 자요, 아간은 하나님께서 진멸토록 한 물건을 훔친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의 이름을 유다의 족보에 삭제하지 않고 기록한 이유는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단호하시지만, 그런 연약한 자들을 통해 태어난 후손들을 긍휼히 여겨 사용하신다는 점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언약관계 안에 있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케 하신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묵상과 기도

사랑하는 주님.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저희를 언약 백성으로 삼아주신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언약 안에 있으면 어떤 실수와 허물 속에서도 저희는 다시금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 언약 안에 있는 자들로서 저희 모두 죄를 멀리하며 살게 해 주시옵소서.

그 언약 안에 있는 자들로서 저희 모두 주님의 거룩하심을 좇아 살게 하시옵소서.

주님께서 베푸시는 사랑과 긍휼의 언약 안에서 저희 모두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하루하루 언약 백성답게 살게 해 주시옵소서.

감사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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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잡혀 간 여고냐의 아들들(대상3:1-24)

역대기상 1-9장까지는 아담에서 아브라함을 거쳐 야곱 곧 이스라엘의 12 지파들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중 역대상 1장은 아담에서부터 시작해 아브라함과 이삭을 거쳐 이삭의 아들 에서와 에서의 자손들 가운데 왕이 된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고, 역대상 2장에서는 야곱 곧 이스라엘의 아들들에 관해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유다 지파를 맨 먼저 언급하고 있다고 했죠. 유다 지파에 관한 계보를 423절까지 계속 잇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뭔지는 이미 살펴봤죠. 역대기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남유다가 바벨론에 123차에 걸려 포로로 끌려갔는데, 1차 포로귀환으로부터 포로생활 70년이 찰 때 바벨론 제국이 바사 곧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멸망당하죠.

그때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권자인 고레스 대왕(Cyrus the Great)이 칙령을 내려 바벨론에 끌려 온 유다 민족이 돌아가도록 명령하죠. 그로 인해 포로귀환도 123차에 걸쳐 진행되죠. 그렇게 돌아온 유대 민족 곧 이스라엘 민족은 비록 당대에는 페르시아의 변방에 속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언젠가 역사의 무대 속에 우뚝 세워줄 것을 내다본 것이죠.

그래서 패망하기 전 가장 화려했던 다윗의 왕국을 재건하고 그와 더불어 온 세계의 중심으로 여겼던 성전까지도 재건하는 게 중요하다고 여기면서 이전의 날들의 사건들곧 열왕기의 역사서를 토대로 역대기서를 쓴 것이죠. 그런 역대기서를 기록할 때 그 중심 토대를 이스라엘의 12지파 가운데 다윗이 속한 유다 지파에 비중을 둔 것이고요.

 

그와 같은 유다 지파의 무게를 2장에서부터 423절까지 이어나가는데, 23-8절까지는 유다와 며느리 다말 사이에 태어난 유다의 아들들 곧 베레스와 세라에 대해서 밝혀주고 있고, 29-324절까지는 헤스론 곧 다윗의 조상 헤스론에 대해서, 41-20절까지는 베레스의 다른 자손들에 대해서, 그리고 421-23절까지는 셀라의 자손들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도 살펴봤지만 다윗 왕의 선조 격인 유다의 다섯 명의 아들들이 완벽한가? 그렇지 않다고 했죠. 유다의 첫째 아들 에르, 둘째 아들 오난, 셋째 아들 셀라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불순종한 아들들이었죠. 넷째와 다섯째인 베레스와 세라도 유다의 본처가 아닌 며느리 다말 사이에 태어난 아들들이었습니다. 그만큼 연약하기 짝이 없는 유다의 아들들을 통해 다윗 왕이 태어났다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어제 읽은 218절의 갈렙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여호수아와 갈렙이 아닙니다. 성막을 짓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브살렐과 오홀리압 중에 그 브살렐의 선조가 그 갈렙이었던 것이죠. 왜 그럼 그 브살렐의 선조 갈렙 또 그 갈렙의 선조 헤스론, 또 그 헤스론의 선조 베레스, 그 베레스의 선조 유다를 언급하는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유다 지파에서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태어났고, 유다 지파에서 다윗이 세우고자 한 그 성전의 초석을 이룬 인물이 브살렐이기 때문이죠. 그만큼 무너진 이스라엘을 통합하고 재건하는 과정 중에 중요한 게 바로 다윗 왕과 성전임을 일깨우고자 한 것입니다.

 

오늘 읽은 역대기상 3장은 1-9절까지 다윗의 자녀들을 소개하고, 10-16절까지는 솔로몬과 남유다 왕들을 언급하고, 17-24절까지는 마지막 포로 시대 이후의 자손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9절까지 나온 다윗의 가족과 자식들은 이미 우리가 읽은 사무엘상32-5절과 514-16절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다만 3절에 나오는 다니엘은 이른바 다윗의 둘째 아들 다니엘인데 사무엘하 33절에서는 길르압으로 소개돼 있죠. 또한 6절의 엘리벨렛이나 7절의 노가는 사무엘상에 나오지 않는 이름으로 오늘 본문에서 추가로 소개하고 있는 아들들입니다. 이를 통해 볼 때 사무엘서의 기록보다 보다 세밀하고 더 정확하게 밝혀주고 있는 셈이죠.

그런데 이 다윗 왕의 아들들을 세밀하게 밝히면서 편집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다윗의 가정을 고통스럽게 했던 사건들, 이른바 사무엘하 13-19장에 나온 밧세바와 행한 불륜 행각이나 그로 인한 집안의 칼부림과 아들 압살롬의 쿠데타, 그리고 아도니아의 역모 같은 일들은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1절의 암논이나 2절의 압살롬과 아도니야 그리고 9절의 다말 등 그 고통스런 사건들을 만들어냈던 이름들은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하고 있죠.

그만큼 이미 이전의 역사 속에서 세세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새롭게 역사를 편찬하는 부분에서는 편집한 것이죠. 더욱이 역사를 잃은 아픔을 딛고 이제부터는 새롭게 세워나가는 과정에서 과거의 부정적인 역사를 들춰낼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을 알 생각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본문 10-16절은 솔로몬을 시작해서 바벨론 포로 시대에 이르까지의 다윗 왕조의 왕들 이름을 언급해 줍니다. 이 왕들의 이름은 이미 우리가 읽은 열왕기상 12장부터 열왕기하 25장까지 계속해서 살펴본 이름들이죠.

다만 11절의 요람은 열왕기 816절에서는 여호람으로 표기돼 있고, 12절의 아사랴는 열왕기하 1530절에 나오는 인물인데 50년간 문둥병에 걸려 별실에서 통치하던 아사랴 왕으로 역대하 26장에서 웃시아로 나온 인물입니다.

15절에 나오는 요시야13대 히스기야 왕과 더불어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하고 분향하던 것까지 대대적으로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남왕국 유다의 16대 왕입니다. 그 후에 그의 아들들이 왕위를 이어받아 통치했지만 첫째 아들 요하난은 일찍 죽었고, 대신에 여호야김과 시드기야 그리고 넷째 아들 살룸이 각각 통치를 했습니다. 다만 넷째 아들 살룸이 열왕기 2430절에는 여호아하스로 표기돼 있었죠. 달리 말하면 그 넷째 아들 살룸이 열왕기상에서는 요시야 왕 다음으로 17대 왕위에 맨 먼저 올랐던 왕입니다.

16절을 보면 여호야김의 아들들 가운데 첫째 아들인 여고냐가 등장합니다. 그가 바로 열왕기하 246절에 나오는 여호야긴왕이죠.

그런 점을 볼 때 16대 왕 요시야다음에 17대 왕이 살룸여호아하스이고, 18대 왕이 여호야김’, 19대 왕이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다시 말해 여호야긴이고, 그리고 마지막 20대 왕이 15절에 나온 요시야 왕의 셋째 아들 시드기야인 것이죠. 열왕기서는 왕들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면 역대기에는 가족사의 족보 순서를 따르고 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이 중에서도 17-1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로잡혀 간 여고냐의 아들들은 그의 아들 스알디엘과 말기람과 브다야와 세낫살과 여가먀와 호사마와 느다뱌요 브다야의 아들들은 스룹바벨과 시므이요 스룹바벨의 아들은 므술람과 하나냐와 그의 매제 슬로밋과.”

여기에 나오는 여고냐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제19대 왕 여호야긴입니다. 열왕기하 25장 마지막 부분에서 바벨론 왕 에윌므로닥이 새로 왕위에 올랐을 때 포로로 끌고 와 옥에 가둔 왕이 바로 여호야긴입니다. 그때 바벨론 왕은 그를 풀어주고 왕의 식탁에서 함께 먹도록 한 내용이 기록돼 있었죠. 바로 그 여호야긴을 본문에서는 여고냐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19절을 보면 브다야의 아들들은 스룹바벨이라고 나오는데 그 스룹바벨이 제1차 바벨론 포로귀환의 인솔자이자 성전을 재건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입니다.

이상의 내용은 사실 열왕기하 25장의 끝부분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바벨론 왕이 새로 즉위해서 여호야긴 왕에게 사면령을 내려 옥에서 풀어주고 왕위 자리를 보존케 하고 왕의 식탁에서 먹게 했던 그 본문이죠. 바로 그 내용을 오늘 본문과 연결시키고 있는 셈이죠.

그만큼 123차에 걸쳐 포로로 끌려갔던 왕족과 귀족과 자손들이 다시금 123차에 걸쳐 귀환하게 되는데, 그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과 고국으로 돌아와 무너진 성전을 제거하는데 앞장선 인물이 유다의 자손이자 다윗의 왕족의 후손이었다는 것이죠. 물론 그들은 다윗의 왕족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언약에 기초하여 무너진 이스라엘을 재건하는 인물이었다는 점을 알리고 있는 것이죠.

 

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무엇입니까? 패망한 유다 민족 곧 예전의 이스라엘 왕국을 재건하기 위해 왕족의 후손을 되밟아보라는 뜻이 아니죠. 거기에는 오직 하나님의 언약 곧 말씀의 토대를 통해서만 바르게 세워나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하나님의 성전도 오직 하나님께서만 세워주셔야 바로 설 수 있고 하나님에게만 그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죠.

 

*묵상과 기도

사랑하는 주님.

무너진 유다 왕국 곧 예전의 이스라엘을 재건하는 과정에 유다의 자손을 돌아봤습니다.

그 중에서도 다윗의 왕족과 그 후손들을 다시금 살펴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민족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다시금 포로에서 귀환케 해 주셨습니다.

저희의 나라와 저희의 가정도 자녀들과 일터와 사업장도 마찬가지인 줄 믿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언약에 토대를 두고 나라와 민족과 가정과 일터와 사업장을 세우게 하시옵소서.

주님의 말씀에 토대를 둘 때 야긴과 보아스의 하나님께서 다시금 새롭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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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긴과 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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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베스가 하나님께 아뢰어(대상4:1-43)

역대상 1장은 아담에서부터 아브라함을 거쳐 에서의 후예들에 관한 족보를 기록하고 있었죠. 하나님의 관심이 이방 세계에까지 뻗어 있음을 보여주는 말씀이었습니다. 역대상 2장부터 야곱 곧 이스라엘의 12지파에 관한 족보를 기록했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이스라엘 나라에 집중돼 있음을 밝혀준 것이었습니다.

그 야곱의 12 아들들 가운데 장자가 르우벤인데 유다를 맨 앞에 세운 것은 역대기의 기록 목적 때문이라고 했죠. 바벨론 포로 이후에 그 땅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옛날 다윗 왕조의 흥한 역사와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잃어버린 나라를 재건코자 하는 것 말입니다. 그때문에 다윗 왕조의 선조인 유다 지파를 맨 먼저 언급했다고 했죠.

어제 살펴본 역대상 3장의 전반부에는 다윗의 자녀에 대해서, 중반부에는 솔로몬과 남왕국 유다의 왕들에 대해서, 그리고 종반부에는 포로 이후의 자녀들에 대해서 언급해 줬습니다. 그를 통해 깨닫게 된 게 있었죠? 비록 바벨론 제국이 세상을 주름잡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바벨론 제국도 바사 곧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멸망당하게 하셨고 그 페르시아의 통치자인 고레스 대왕을 들어 유다 민족을 바벨론 포로에서 고국 땅에 돌아오도록 칙령을 내리게 해 주셨다는 점이었죠.

그만큼 어떤 환경 속에 있든지간에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잃지 않고 언약의 말씀에 토대를 두고 사는 자들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신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말씀이었습니다. 예레미야 2911절 말씀이 바로 그것이죠.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오늘 읽은 역대상 4장은 유다 지파의 족보와 시므온 지파의 족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1-23절까지는 유다 지파의 족보인데 그 중에서도 유력한 자손들을 기록하고 있죠. 엊그제 살펴본 역대상 2장에서도 다윗 왕에 이르는 족보를 살펴봤습니다. “유다는 베레스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고”(대상2:5-15)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은 유다에서 베레스로, 베레스에서 헤스론으로 이어지지만, 헤스론 다음에 람이 아닌 갈미, 또 갈미에서 , 훌에서 소발로 이어지는 족보입니다.

왜 곁다리 같은 족보를 소개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역대상 2장이 왕족 중심의 족보였다면 오늘 읽은 4장은 왕족의 후손이 아닌 다른 후손들 가운데 유력한 자들을 소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중에는 우리가 익히 들어 본 이름 9-10절의 야베스도 나옵니다. 그런데 야베스가 누구의 아들인지는 정확히 소개돼 있지 않습니다. 다만 야베스는 유다 지파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임은 분명하죠.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르면 이 야베스는 누구보다도 율법에 대해 능통한 귀중한 자였고 누구보다 부유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한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만큼 당대와 후대에 존경받은 인물이었던 것이죠. 물론 9절에 보면 그의 출생은 서글프기 짝이 없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수고로이 낳은 아들이란 뜻으로 야베스로 지었기 때문이죠. 그것은 창세기 3518절의 베냐민의 출생과 똑같습니다. 라헬이 밧단 아람에서 고향 땅으로 가는 길목에 아들을 낳는데, 그때 그녀는 죽어가면서 아들을 낳았죠. 그래서 자기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면서 슬픔의 아들이란 뜻으로 베노니라고 짓고자 했죠. 하지만 남편 야곱은 오른손의 아들이란 뜻으로 베냐민이라고 불렀습니다. 본문의 야베스도 그런 고통의 아들인데, 야베스와 베냐민의 출생이 다른 것은 야베스는 아버지조차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태어난 야베스였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율법에 능통해 귀중한 사람이 되었고, 누구보다 부유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는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기도 했겠지만 10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 자기 인생을 의탁하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죠.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비록 어려운 환경 속에서 태어났을지라도 자신을 능하게 하신 하나님께 자기 인생을 의탁하며 하나님께 간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이 기도문이 어찌 보면 이기적인 복을 간구하는 것 같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응답하심 아니겠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야베스의 간구를 들으셨을까요?

요한일서 514절에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마태복음 633절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만큼 야베스는 자기 인생을 바르게 세워주실 분이 하나님이시고, 오직 하나님께만 능력이 있음을 믿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 인생의 기반 위에 혼자 잘 먹고 잘 산 게 아니라 구약의 율법에 능통한 자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답게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돕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본문 13절입니다. 그나스의 아들들은 옷니엘과 스라야요 옷니엘의 아들은 하닷이며

여기에 나오는 옷니엘이 누구일까요? 갈렙의 동생이자 그나스의 아들입니다. 옷니엘은 우리가 사사기를 읽을 때 이미 살펴봤습니다. 그는 여호수아 사후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사사였죠. 바로 그 옷니엘이 유다 지파의 자랑스런 후손이라는 점을 오늘 본문의 계보를 통해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24-43절까지는 이스라엘의 12지파 가운데 두 번째 지파인 시므온의 자손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시므온은 야곱의 첫 번째 아들인 르우벤 다음 가는 둘째 아들이죠. 그래서 유다 지파 다음에 시므온을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이 열두 아들을 축복하는데, 유독 시므온과 레위 지파만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했죠. 이스라엘 사회에서 흩어질 것이라고 말이죠. 그것은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 족속의 아들에게 강간당한 일이 있는데, 그때 그걸 빌미로 세겜 족속에게 할례를 시행토록 한 이들이 시므온과 레위였죠. 그러면 자기 여동생 디나를 혼인시켜 주겠다고 한 것이었죠. 하지만 그들의 의도는 할례를 행할 때 완전히 도륙내고자 함이었는데, 그때에 맞춰 그 족속을 완전히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그 일이 악취나는 일이었다면서 두 아들의 후손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시므온과 레위의 후손들은 저주로 끝나버렸습니까? 두 아들 가운데 레위는 훗날 모세가 시내산에서 법궤를 가지고 내려올 때 모두가 황금송아지 앞에 광란을 굿판을 벌였는데 그대 레위 지파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나서서 하나님의 법을 따르겠다고 하면서 우상의 굿판을 벌인 주동자 3천명 가량을 처단했죠. 모세는 그 일이 하나님께서 헌신한 일로 여겼고 그때부터 제사장 지파로 거듭나게 되었죠.

그렇다면 시므온 지파도 그런 레위 지파를 본받아 기사회생할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그 후손의 지파는 광야 40년 동안 한 번도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복채를 바라고 예언 활동을 한 거짓 선지자 발람의 꾀에 빠져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땅에서 행음한 일이 있는데 그때 주동자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시므온 지파의 시므리’(25:14)였죠. 그만큼 시므온 지파는 레위지파처럼 하나님 앞에 헌신은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숭배와 성적타락을 조장한 길을 걸었던 족속이죠. 그 일로 그들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흩어진다는 야곱의 예언을 그대로 성취하게 되죠. 훗날 이스라엘 지파가 땅을 분배받을 때였죠. 그때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의 땅에 흡수되어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다 지파 다음에 시므온 지파를 기록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이 둘째 아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유다 지파에 흡수된 것을 강조하는 것 말입니다. 결코 자랑할 만한 지파가 못 됐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일깨워주고자 한 것이죠.

 

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무엇입니까? 태어난 배경과 살아가는 환경이 녹녹치 않아도 하나님께 자기 인생을 의탁하는 자에게, 하나님께 그 능력이 있음을 믿고 간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야베스처럼 존귀한 자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므온처럼 비록 능력 있는 출생의 반열 속에서 태어났어도 그 삶을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고 자기 욕망만 좇아 살면 반드시 패망한다는 점이죠. 저와 여러분들은 어떤 환경 속에서든지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 야베스처럼 존귀한 삶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전자책] 하나님의 시간표

이 책은 지난 몇 년간 설교 말씀을 통해 나눈 예화다. br예화는 설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br말씀의 이론을 실제화할 수 있는 간증이기 때문이다. br그만큼 예화는 설교에서 중요한 몫을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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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과 기도

사랑하는 주님.

비록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았어도 내 인생을 하나님께 의탁하며 살게 하시옵소서.

야베스처럼 그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저희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며 살게 하시옵소서.

레위는 하나님께 헌신하여 큰 사랑과 은총을 덧입었습니다.

.시므온은 끝까지 자기 탐욕과 타락의 길을 좇다가 이스라엘 사회에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저희의 인생도 하나님께 의탁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며 살게 하시옵소서.

그때 저희의 가정과 자녀들과 일터와 사업장도 하나님께 세워주실 줄 믿습니다.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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