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예화) 우리가 알고 있는 다윗은 베들레헴 지역의 목동 곧 목자였습니다.
목자라는 말은 나이든 어른에게 어울리는 표현이고 다윗은 당시 19살 이하였으니 목동이라고 말하는 게 옳겠죠.
그 당시 다윗은 위로 7명의 형들이 있었지만 배다른 형들이라 외로움과 고속 속에 살아야만 했습니다.
본처의 자식이 아닌 후처의 자식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다윗은 형들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했죠.
형들이 집 안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을 때도 다윗은 양과 염소를 치기 위해 들판을 누벼야 했죠.
때로는 늑대나 곰과 사자의 발톱에서 자신이 맡은 양과 염소를 지키기 위해 자기 생명을 걸어야 하기도 했습니다.
그를 위해 다윗이 키운 실력이 바로 물맷돌을 던지는 실력 아니었겠습니까?
바로 그 실력 때문에 골리앗을 만났을 때 물맷돌 실력으로 골리앗을 쓰러트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죠.
그런데 그런 다윗과 같은 목동이 그 베들레헴 땅에 한 두 명 뿐이었겠습니까?
아니죠.
베들레헴 지역에 다윗 혼자만 목동으로 산 게 아니라 많은 아이들이 목동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하필 다윗을 하나님께서 왕으로 선택하셨던 것일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습니다.
그 권한은 오직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선택하심 뿐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 가지 사무엘 선지자가 7명의 아들들을 보고 이제 다윗을 보고 기름을 붓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게 있죠.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그때의 ‘중심’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내부의 권위’(authority inside) 곧 아버지의 권위요 그 아버지의 권위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는 걸 말합니다.
자신이 왜 그런 비천한 출생가운데 태어나야 했는지, 하나님께 원망하거나 따지거나 불평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자신은 왜 들판을 누비며 양과 염소를 쳐야 되고 왜 형들은 집에서 호위호식하는지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는 거죠.
힘들고 고달파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것을 믿고 형들을 섬겼고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하며 살았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신 기준이라면 기준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유대인들치고 다들 아버지를 하나님처럼 복종하는 모습이었다면 그것이 다윗의 대수로움이겠습니까?
그렇게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 그것이 왕으로 선택받은 이유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왕으로 선택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섭리요 선택하심 외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깨달음) 이것은 마리아를 선택하신 것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갈릴리의 나사렛 달동네에 마리아와 같은 처녀들이 왜 없었겠습니까?
갈릴리의 나사렛이 아니라 해도 다른 유대 지역에 왜 마리아와 같은 처녀들이 살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아니죠.
그 당시에 마리아와 같은 이름을 지닌 처녀들도 유대 땅에 수 없이 많았을 것이고, 갈릴리 나사렛에도 그런 처녀들이 있었겠죠.
그런데도 왜 하필 마리아를 통해 이 땅의 구세주인 아기 예수께서 탄생토록 하신 것입니까?
그것 역시 하나님의 선택하심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똑똑하건 믿음이 좋거나 담력이 출중하거나 복종을 잘할 것 같아서 선택한 게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섭리 속에 선택하신 역사였습니다.
(적용) 이것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신 것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친구나 동료들 중에 왜 나를 먼저 하나님의 자녀로 뽑아 주셨는지 누가 그 이치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남들보다 좀 더 똑똑하고 유능하고 믿음이 좋기 때문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해 주신 것입니까?
내가 남들보다 좀 더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께 더 복종을 잘 할 것 같기 때문에 선택해 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로움에 비춰보면 우리는 다 오십보 백보와 같이 더러운 죄인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택하심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것은 우리가 잘났거나 믿음이 출중해서가 아니요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요셉과 만삭의 아내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당도했을 때 아기 예수가 나오려고 하는 때였죠.
그러니 요셉은 산기를 느끼는 마리아를 데리고 이집 저집 대문을 두드리며 여관 곧 객실을 내 달라고 청을 넣었죠.
하지만 다들 그런 여관은 없다고, 그런 객실은 없다고 거부하며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당시 베들레헴의 집들은 대부분 동굴을 파서 만든 집인데, 1층은 짐승의 우릿간으로 2층은 사람이 거주하는 방으로 꾸몄죠.
좀더 크게 동굴을 판 집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방 외에 손님 접대용으로 또 다른 객실을 마련해 놓고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객실이 없다고 했습니까?
고향을 찾아 호적하러 온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빈 방이 남아있지 않은 까닭이었습니까?
그런 부분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유대인의 정결례 때문이었죠.
사내 아이가 태어나면 보통 33일을 산혈기간 곧 정결기간으로 정하기에 산모는 부정하게 여겼고 출입을 금했습니다.
그 까닭에 그런 산모를 모신다는 것은 자신의 집이 부정하게 여길 게 뻔했기에 누구 하나 쉽게 객실을 열어주지 않은 것이었죠.
그러나 만약 자신이 그런 처지였다면, 그리고 그 아이가 이 땅의 구세주인 아기 예수임을 알았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다들 앞다투어 객실의 문을 열어주고 그 방에 아이를 눕히도록 그 방에 아기 예수를 누이도록 내주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자신의 심령속에도 두 개의 방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고 했죠.
하나는 내 심령의 방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방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내 심령에 타인을 향한 긍휼의 방을 지니고 사는 것 말이죠.
누군가 고통을 당할 때 함께 아파하고 위로하며 사는 것, 그것이 곧 긍휼의 방을 지니고 사는 심령 아니겠습니까?
누군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그 어려움을 함께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 그것 역시 긍휼의 방을 지니고 사는 심령일 것입니다.
그것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고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는 대림절을 맞이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 아니겠습니까?
(본문) 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증언해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8-11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원해) 무엇을 말씀해주는 것 같습니까?
이 땅의 구세주인 그리스도께서 아기 예수의 몸으로 구유에 누이셨다는 사실을 천사들이 그 지역의 목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왜 하필 목자들이겠습니까?
이 땅의 구세주요 만 왕의 왕이라면 왕궁이나 고관대작들에게 먼저 알려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정치적으로 잘 준비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정상일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전달하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그 지역의 목자들에게 그 소식을 맨 먼저 알리도록 하셨습니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여기에 ‘목자’로 번역된 헬라어 ‘포이멘’(ποιμήν)은 ‘양을 돌보고 치료하고 기르는 목동’(a herdsman)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목동’하면 강원도 대관령 목장을 연상하기가 쉽습니다.
뭔가 푸른 풀밭이 있는 그 목장에서 양들을 풀어놓고 풀피리 불면서 낮잠을 잘 수 있는 목동 말입니다.
또 밤이면 별 하나 하나 이름을 붙여가면서 재미있는 별들의 이야기를 엮어내는 그런 목동, 그런 목자의 모습 말이죠.
하지만 본문에 나오는 목자들, 예수님 시대에 양을 치는 목자들은 그런 낭만과 여유를 지닐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을 해석해주는 유대인의 전승 중 하나인 ‘미쉬나’에서는 목자들을 부정한 직업 중의 하나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목자들은 안식일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안식일을 지킬 수 있었지만 양과 염소를 치는 목자들은 안식일에도 우리 바깥으로 데리고 가야 했기 때문이죠.
더욱이 안식일이라고 이리떼나 사나운 짐승들이 물어뜯지 않는 법은 없었기에 철저하게 지키고 돌봐야던 것이죠.
그 때문에 유대인들은 세리나 창기처럼 신약시대의 목동들, 그 목자들을 죄다 부정한 자로 더러운 자로 취급했던 것이죠.
그와 더불어 양을 치는 목동들, 양을 돌보는 목자들을 부정하게 여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목자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 가운데 정직하지 못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죠.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 시대에 양과 염소를 치는 목자들은 대부분 남의 양과 남의 염소를 기르고 돌보도록 고용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양과 염소를 많이 가지고 있던 부자들이 자기 가족만으로 돌볼 수가 없어서 일정 부분의 양과 염소를 떼어주며 맡긴 것이었죠.
그러니 고용된 목자들은 몇백 마리씩 양과 염소를 맡게 된 것입니다.
물론 구두로만 맡는 게 아니라 계약서를 작성하면서 맡게 되죠.
어떤 계약서이겠습니까?
그들이 키우는 양과 염소가 풀을 뜯어 먹는 광야다보니 곳곳에 늑대나 여우나 하이에나들이 득실거리지 않겠습니까?
그러다 보면 그 목동들은 양과 염소를 지키는 과정에서 자신의 생명을 걸어야 하는 경우도 생기게 마련이죠.
하지만 동물보다는 사람의 생명이 우선이기 때문에 계약을 할 때 최소한의 요구를 서로가 하게 되는 것이죠.
양과 염소를 맡기는 부유한 사람들은 고용한 목자들에게 생명이 위험할 경우에는 최소한도의 양과 염소는 잃어도 좋다고 말이죠.
문제는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는 경우 아니겠습니까?
그때 양과 염소의 주인과 맺었던 계약조건 떠오르면서, 한두 마리를 빼돌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텐데, 하는 것 말이죠.
더욱이 고용된 목자들이 가장 유혹받은 것은 1월경인데 그때 양과 염소가 출산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주인들은 양과 염소가 몇 마리 정도 출산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고용된 목자들은 거기서 몇 마리를 뺀다 한들 아무런 소리를 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죠.
바로 그런 점들 때문에 1년이면 몇 십마리의 양과 염소를 뒤로 챙기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삶이 관행처럼 내려왔기 때문에 신약시대에 고용된 목자들을 대부분 세리와 창녀처럼 죄인의 대명사로 천대시했던 것입니다.
신천지 집단에서 기존의 목사님들을 ‘삯군 목자’라고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무식한 말인지 이제는 그 이유를 알 수 있겠죠.
(깨달음) 그렇다면 오늘 천사 가브리엘이 주님의 탄생을 맨 먼저 알려주는 본문 속의 목자들은 어떤 목자들이겠습니까?
자신의 양과 염소를 소유한 목자들이겠습니까?
아니면 자신들의 양과 염소를 소유한 게 아니라 계약서를 쓰고 양과 염소를 치는 삯군 목자들이겠습니까?
그들이 어떤 부류의 목자들인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지 상관치 않고 하나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보내 그 복된 소식을 전하게 했다는 것이죠.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택하신 은혜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베들레헴의 목동들 가운데 왜 하필 다윗을 선택하여 왕으로 삼으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듯이 말이죠.
왜 하나님께서는 갈릴리의 나사렛의 처녀들 중에 유대 땅 수많은 처녀들 중에 마리아를 선택하여 아기 예수를 잉태하게 했는지 알 수 없듯이 말입니다.
그만큼 이 땅에 구원자로 태어나신 복된 소식을 알려주는 첫 번째 대상을 그 당시의 목자로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선택하심입니다.
물론 영적인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유월절 어린양을 예표하는 분 아닙니까?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좌우인방에 바를 때 그 피를 보신 하나님께서 죽음의 심판을 넘어가셨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던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향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고 했죠.
그처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어린 양으로 오셨기에 그 양을 돌보는 목자들에게 주님의 탄생 소식을 맨 먼저 알린 것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인간의 해석일뿐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뜻은 우리로서는 알길이 없는 것이죠.
오직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의한 일입니다.
(주문) 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 주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의 섭리가운데 이 땅의 모든 일을 행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베들레헴 이새의 아들들 중에 왜 목동 다윗을 택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는지 너는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왜 갈릴리의 나사렛의 처녀 마리아를 통해 아기 예수를 잉태하게 했는지 너는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아기 예수가 태어난 그 소식을 왜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맨 먼저 알 수 있도록 했는지 너는 알 수 있지 않겠느냐?”
“그것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전적인 선택하심의 은혜라는 사실 말이다.”
“오늘 너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도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하심의 은혜가 아니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도 오직 하나님의 선택하신 섭리에 의한 일임을 네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코로나19가 장기화되는 것도, 병상에 누워 있는 기저질환 환자들이 죽는 것도, 아니 갓난 아이가 죽는 것도,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하심의 일이지 않더냐?”
“그러니 너의 유능한 능력이나 자랑거리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무가치하다는 것을 네가 깨닫고 주님 앞에 늘 겸손하게 살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 너를 선택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게 너의 의로움이나 능력이나 믿음이 좋아서 선택한 게 아니듯 말이다.”
“베들레헴의 추한 목자들을 선택하여 구원의 그 기쁜 소식을 먼저 알린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아니더냐?”
“너도 늘 주님의 택하신 그 은혜를 잊지 말고 겸손하게 주님을 모시는 걸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겠느냐?”
(찬양)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 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예화)감리교의 창시자이자 존 웨슬리 목사님이 회심할 때 헨리 스쿠걸 목사님이 작은 역할을 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그분이 쓴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읽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스쿠걸 목사님은 그 책에서 기독교란 무엇인가를 정의내려주고 있었습니다.
“기독교란 인간의 영혼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온 것”이라고 말이죠.
그러면서 어떤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이렇게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선하고 단정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안에 생명과 권능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깨달음) 존 웨슬리 목사님이 그 책을 읽고 그렇게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목사 아들로 목사가 되었고, 선교사로 경건하게 살려고 해썼고, 선행도 많이 행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 임해 계셨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고 종교인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데 된 것이었습니다.
(적용) 우리 가운데도 이런 그리스도인, 이런 종교인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안에 주인으로 들어와 계시는데도 그걸 의식하지 못한 채 내 의로움, 내 경건, 내 열심히만 살고 있는 그런 종교인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종교인을 원하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를 원하시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시는 주님의 자녀로 사는 것 말입니다.
(예화2) 로버트 멍어가 쓴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에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지만 마음 속 주인으로까지 주님을 모시지 못한 사람의 모습이 그것이죠.
그는 예수님을 모시고 서재에 들어갔는데, 예수님께 차마 보여드릴 수 없는 책과 잡지가 있어서 당황했습니다.
주방에 주님을 모시고 갔는데 그곳에서도 주님께 대접해 드릴 게 없어서 민망했죠.
거실에는 주님과 함께 볼 수 없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고 살아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오락에 빠져 살아온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친구들과 놀러갈 때도 모두지 예수님을 모시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먹는 것도 대화도 주님과 같이 할 수 없는 것들이 전부였기 때문이죠.
심지어 침실에서도 주님께 보여드릴 수 없는 문란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쁘게 출근을 하는데 문득 누군가 혼자 거실 벽난로 옆에 앉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바로 주님이셨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주님께 다가가 말했죠.
“주님, 아침마다 늘 여기에 오셨습니까?”
그러자 주님은 “그럼!”하고 대답하셨죠.
그때 그는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때까지 그는 주님을 손님처럼도 대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깨달음) 어떻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남들에 비해 선하고 의롭고 도덕적이고 깨끗한 사람처럼 사는 걸 원하시는 분이겠습니까?
그런 것에 신경쓰고 산다면 우리는 종교인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종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입니다.
도덕의 기준, 율법의 기준에 비춰 사는 종교인이 아니라 내 심령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어 자시는 그리스도인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내 주방에 내 침실에 내 차 안에 나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여태껏 내가 손님보다도 못하게 주님을 대접해드렸다면 이제부터라도 주님을 온전한 ‘내 주인’으로 모셔들이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신 것은 전적인 주님의 택하심이었지만 택함받은 이후의 다윗은 전적으로 주님을 주인으로 모셨으니 말입니다.
주님께서 마리아를 선택하신 것은 전적인 주님의 선택이셨지만 택함받은 이후의 마리아는 온전히 주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며 살았으니 말입니다.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그 좋은 소식을 전하도록 택한 것은 오직 주님의 선택하심이었지만 선택받은 그들이 아기 예수께 달려가 경배한 것은 전적인 그들의 복종이었듯이 말입니다.
(내음성) 그렇기에 우리가 주님께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는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주님은 제가 남들보다 의롭고 깨끗하고 좀 더 열심있는 종교인으로 살기보다 온전한 그리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원하셨네요.”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다면서도 제 심령의 문 밖에 주님을 손님처럼 밀쳐두고 살아왔던 제 삶을 회개합니다.”
“주님, 이제부터는 주님을 제 심령의 주인으로 온전히 모시며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뜻에 복종하며 살겠습니다.”
“베들레헴의 목동 다윗이 왕이 된 것은 전적인 주님의 선택하심이었지만 다윗은 주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했음을 알아요.”
“갈릴리 나사렛의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잉태한 것도 주님의 선택이었지만 그녀는 그 후에 온전히 복종하며 내어맡겼음을 알아요.”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그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한 것은 주님의 선택이었지만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여 아기 예수께 경배하러 나아갔잖아요.”
“오늘 제가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것은 주님의 전적인 선택하심에 의한 은혜인 줄 믿습니다.”
“저에게 그 은혜를 베풀어주신 주님의 선택하심에 부응하는 것처럼 이제부터 제 심령에 온전한 주인으로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며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주님께서 제게 가라시면 가고, 멈추라면 멈추고,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제가 순종하고 복종하며 살겠습니다.”
(찬양)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 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 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뜻하신 그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뜻하신 그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고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대림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아기 예수의 탄생을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알리셨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전적인 선택하심이었습니다.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하신 것도, 마리아를 아기 예수를 잉태하는 어머니로 선택하신 것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해주신 것도 말입니다.
다만 다윗도 마리아도 그리고 본문 속의 베들레헴 목자들도 주님의 선택을 받은 이후에 전적으로 복종하여 순종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선택을 받은 이후에 주님을 손님보다도 못하게 대접하기보다 참된 주인으로 복종하여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나가라고 하시는 대로 내가 나아가고, 주님께서 멈추게 하시는 대로 내가 멈추는, 주님의 이끄심에 온전히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때 주님의 성탄은 우리의 삶에 기쁨이 될 것이요, 주님의 언젠 재림하셔도 기쁨의 재림으로 맞이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은혜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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