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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SundaySermon

여관이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눅2:6-7)

by 똑똑이채널 2021.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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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집 대문을 두드리는 요셉과 마리아

 

(설교열기)(논지) 아침에 고() 조승용 성도님의 발인예배와 화장예배를 드리고 왔습니다.

이 아침에 제가 여러분과 먼저 생각해 볼 말씀이 인간의 죽음에 관한 말씀 아니겠습니까?

 

죽음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죽음이란 한자로 죽을 사()’자는 한 일()’자에 저녁 석()’자에 비수 비 화살 비()’자를 쓰죠.

죽음이란 어느 날 저녁에 갑자기 화살을 맞는 껄 뜻하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예고 없이 그 죽음이 닥쳐올 수 있다는 뜻이죠.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지만 죽을 때는 순서가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만큼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2:22) 하신 말씀을 새기면서 사는 게 중요하죠.

 

 

여관이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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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하루하루 산다는 것은 하루하루 죽어가는 걸 뜻하지 않겠습니까?

202112월달에 접어들었다면 올해도 한 해 다 갔네가 아니라 한 해 죽음과 더 가까워졌구나하고 생각해야 하겠죠.

초등학생은 한 살 더 먹었다고 좋아하고, 고등학교 졸업생은 좀 더 자유롭게 살 수 있겠다면서, 다들 좋아하죠.

하지만 누구든지간에 한 해 나이를 더 먹었다면 그것은 한 해 더 죽음과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발췌) 그런데 과연 죽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이재철 목사님의 내게 있는 것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죽음이란 첫째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누군가가 떠맡는 걸 말합니다.

사람들은 남자든 여자든, 일터의 업무든 가사든,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천년만년 계속 할 것 같은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크나큰 착각이죠.

오늘이라도 하나님께서 내 코끝의 호흡을 거두어가시면 누군가가 내가 하던 일을 떠맡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죽음이 가져오는 현실이죠.

 

둘째로 죽음이란 누군가가 나의 서랍을 여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기만의 서랍을 가지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그 누구도 자기 서랍을 함부로 열 수 없죠.

그것은 핸드폰도 그 어떤 비밀 금고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죽음은 내가 아닌 타인으로 하여금 그 서랍과 핸드폰과 비밀금고를 열게 하는 것입니다.

자물쇠로 잠겨 있다면 망치로 부서뜨려서라도 반드시 그 속을 열어보게 돼 있죠.

바로 그것이 죽음입니다.

 

셋째로 죽음이란 다른 사람이 내 옷을 벗기는 일입니다.

세상에 누가 감히 내 옷을 벗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죽음은 전혀 알지 못하는 장의사 직원이 내 옷을 벗기는 일입니다.

겉옷은 말할 것도 없고 속옷까지 모조리 벗깁니다.

세상의 학력과 직책과 재산과 상관없이 죽음은 모든 걸 벌거숭이로 만들게 됩니다.

 

넷째로 죽음이란 아침에 내가 나섰던 집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집 밖을 나가면 으레 저녁이 되어 그 집으로 귀가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집을 나섭니다.

하지만 나섰던 그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 바로 그것이 죽음입니다.

 

마지막 다섯째로 죽음이란 작별인사를 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일수록 자신의 죽음에 대해 그릇된 환상을 갖고 있습니다.

자기 코끝의 호흡이 끝나는 순간에 가족들을 다 불러모아 자신이 좋아하던 성경을 읽어달라고, 찬송가를 불러달라고 할 것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읽고 찬송가를 부르고 난 뒤에,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이제 떠난다, 잘 있거라할 것 같이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은 몇 %가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소망하는 죽음과는 달리 대부분 작별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떠나는 게 죽음이죠.

조승용 성도님도 어제까지 같이 일을 했는데!’, ‘저녁에도 잘 잤는데!’하다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깨달음)바로 이것이 죽음의 실상입니다.

그리고 이런 죽음은 우리의 코 끝에 호흡을 달고 다니는 동안 일평생 따라다니는 모습이죠.

그렇기에 어떤 인생이 지혜로운 인생이겠습니까?

 

시편 394-5절의 새번역성경이 이렇게 말씀해 줍니다.

주님 알려 주십시오. 내 인생의 끝이 언제입니까?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습니까?

나의 일생이 얼마나 덧없이 지나가는 것인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나에게 한 뼘 길이밖에 안 되는 날을 주셨으니,

내 일생이 주님 앞에서는 없는 것이나 같습니다.

진실로 모든 것은 헛되고, 인생의 전성기조차도 한낱 입김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엇을 일깨워주는 말씀 같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한 뼘 길이 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원문에 따라 보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손바닥밖에 안 되는 게 우리의 인생이란 뜻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자기 힘이나 자기 능력 자기 건강을 과시하며 사는 인생이 얼마나 많습니까?

더욱이 자기 인생의 전성기조차 영원할 것처럼 착각 속에 사는 인생도 허다하죠.

하지만 그 인생은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볼 때 손바닥밖에 되지 않고, 그 인생의 전성기조차 입김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적용)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인생을 사는 게 지혜로운 인생인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 생명의 연수가 얼마인지 알 수 없기에 매일매일 하나님을 겸손하게 주님을 위한 방을 마련하며 사는 인생이죠.

자기 심령의 방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 앞에 진실되게 사는 자는 언제 어느 때라도 주님이 부르시면 영원한 천국에 갈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고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대림절 둘째 주일에 주님이 주시는 메시지죠.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뒤 로마 원로원들에게 존엄자라는 아우구스투스칭호를 선물받았죠.

그때 아우구스투스 본문의 표현대로 아구스도는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 곳곳에 호적령을 내렸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죠.

인두세, 사람의 머릿세, 곧 세금을 거두는 게 목적입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자신이 다스리는 로마를 위해 싸울 군사를 모집코자 함이었죠.

그 목적을 위해 전국 곳곳에 호적령을 내렸는데, 그때 모든 사람들이 그의 명령을 따랐죠.

 

요셉과 마리아도 그 호적령에 따라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직선거리로 160km가 넘는 베들레헴을 향해 나섰습니다.

베들레헴은 해발 890m에 위치한 고원지대라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계속 오르막길처럼 올라가는 길목이었죠.

성인 남자가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하루 20km씩 걷는다 해도 8일 이상은 걸어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만삭의 몸을 이끈 마리아를 데리고 요셉이 걸어갔다면 적게는 20일 많게는 한 달 가까이 걸리는 거리였겠죠.

 

그런데도 요셉이 만삭의 아내 마리아와 함께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한 달 가까이 꾸역꾸역 걸어간 이유가 뭘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로마 황제의 명령을 따르기 위함이었지만 그 심령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코자 함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미가서 52절의 말씀이 성취되도록 요셉과 마리아, 마리아와 요셉이 온전히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요셉과 마리아는 인생의 지향점이 당대의 사람들과 달리 영적인 본향, 하나님나라의 언약에 두며 살았던 것이죠.

 

(깨달음) 그 말씀과 관련하여 우리의 심령 속에 새긴 게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살지만 내 인생의 목적, 내 삶의 방향은 분명히 다르다는 점이죠.

세상의 일터에서 내 동료와 함께 일하며 지내지만, 나는 하나님나라 곧 영원한 천국 본향을 바라보며 사는 자라는 것이죠.

똑같이 세상 흐름을 쫓아 사는 것 같지만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대하며 사는 자라는 점 말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세상 사람들처럼 똑같이 호적하러 베들레헴을 찾았지만 그 부부는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나아갔던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도 인생이 70이요 80이라 해도, 100세를 산다 해도, 손바닥보다 짧은 이 땅에서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며 사는 자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문) 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증언해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6-7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원해) 호적하러 30일 정도 걸려 베들레헴에 도착했는데 아기 예수를 누일만한 여관이 왜 없었겠습니까?

이스라엘 땅 전국에 사는 베들레헴 출신 사람들이 아구스도의 호적령에 맞춰 베들레헴을 찾아 줄지어 오고 있기 때문이죠.

다음날이면 호적하고자 그 당시의 등기소를 찾았을 것이고, 그를 위해 다들 베들레헴의 여관방에 묵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만삭의 몸을 이끌고 30일가량 걸려 늦게 도착한 마리아와 요셉은 도무지 방을 구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런데 본문에서 말하는 여관이란 어떤 곳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여관으로 번역된 헬라어 카탈뤼마’(κατλυμα)숙소’(lodging place) 또는 다이닝 룸’(dining room)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저녁 만찬을 나눈 마가의 다락방처럼 여럿이서 함께 먹고 묵을 만한 객실’(14:14)을 뜻하죠.

 

물론 마가의 다락방은 예루살렘에 있는 곳이라 누가봐도 구색을 갖춘 객실다운 객실이라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베들레헴의 여관은 그렇게 넉넉하고 아늑한 공간이 아닙니다.

베들레헴의 집들은 다들 동굴을 파서 1층은 짐승의 축사로 사용했고 2층은 그 가족들이 거주하는 방으로 삼았기 때문이죠.

그런 동굴에 여관 곧 객실을 마련했다면 일반 동굴보다 훨씬 더 큰 동굴을 파서 1층은 짐승의 막사로 2층은 가정집과 함께 객실을 마련하면서 여관방으로 내줬겠죠.

 

(깨달음)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런 동굴집의 객실조차 베들레헴 지역에 남아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많은 고향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베들레헴에 몰려 들다 보니 동굴집의 객실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죠.

그 때문에 만삭의 아내 마리아와 요셉이 곳곳의 동굴집 문을 두드려도 좀체 객실을 찾을만한 동굴집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레위기 122절을 보면 여인이 임신하여 아이를 낳으면 7일 동안 위생적으로 부정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월경할 때처럼 정결치 못하다는 뜻이고, 그 때문에 사내아이를 낳고 산혈한 경우 33일 동안 사람과 접촉하는 걸 피하도록 율법에 명시한 것이죠.

그리고 그 산혈 기간이 지나면 짐승 두 마리를 가지고 번제물과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정결케 되도록 했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만삭의 아내 마리아가 객실을 둔 여러 동굴 집의 대문을 두드렸지만 다들 그런 집들이 거부한 이유 말읿니다.

만약 마리아가 그런 동굴의 객실에서 아이를 낳게 된다면 이웃집들이 부정한 집이라고 수군댈 것이 뻔했기 때문에 말이죠.

바로 그것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동굴집의 2층 객실에서 편안하게 아기를 낳아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었죠.

그 까닭에 다들 요셉과 마리아를 문전박대했던 것이고, 어쩔 수 없이 어느 가난한 동굴 집 1층의 마굿간 구유통에 누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적용) 무엇을 생각하게 해 주는 말씀입니까?

만약 베들레헴 사람들이 만삭의 마리아를 자기 몸처럼 자기 아이처럼 생각했다면 마리아를 받아주지 않았겠습니까?

뱃속으로 품고 있던 그 아이가 이 땅의 구세주임을 알았다면 다들 자신들이 잠자던 방조차 내주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율법의 부정만을 생각한 채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삶은 등한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저 호적령에 맞춰 한 미천 잡는 것만 생각한 채 나그네를 대접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다들 관심 밖이었던 것이죠.

그만큼 그들의 심령 속에는 주님을 모실만한 심령의 방이 준비돼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약 그들의 심령의 방에 주님을 모시고 있었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과 긍휼을 베풀고도 남았을 텐데 말입니다.

바로 그것이 여관이 있을 것이 없었다는 진정한 이유 아니겠습니까?

 

(주문)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 이 땅에서 죽음의 호흡을 달고 다니는 우리의 심령에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과 긍휼의 방을 마련하며 살도록 하는 은혜를 베푸신 것이죠.

 

(주음성)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성령의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13:2)

만삭의 마리아가 베들레헴의 큰 동굴집 대문을 두드릴 때 다들 거부했는데, 그때 마리아의 심정이 어떠했겠느냐?”

마리가 그 집들의 대문을 두드릴 때 다들 더럽다고 외면할 때, 주님의 마음은 어떠했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 인생이 천년만년 길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네 인생은 한 뼘 길이밖에, 손바닥보다도 훨씬 짧지 않더냐?”

그것이 너의 죽음임을 안다면, 네 곁에 누군가 방이 있는지 물을 때, 네 심령의 방을 열어주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네 심령에 사랑과 긍휼의 방을 두고 산다면, 주님께서 네 코끝의 호흡을 거두시는 그 날이 가장 은혜로운 날이지 않겠느냐?”

 

(찬양) 아름다웠던 지난 추억들 사랑했었던 많은 친구들

멀고도 험한 고난의 길을 나 이제 말없이 주님을 위하여 떠나야지

 

수없이 많은 사람들 위해 당신이 바친 고귀한 희생

영원히 당신과 함께 있고파 사랑의 십자가를 맞이하네

 

 

[전자책] 하나님의 시간표

이 책은 지난 몇 년간 설교 말씀을 통해 나눈 예화다. br예화는 설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br말씀의 이론을 실제화할 수 있는 간증이기 때문이다. br그만큼 예화는 설교에서 중요한 몫을 차

www.aladin.co.kr

 

(예화) 미국 어느 작은 마을에 윌리라고 불리는 9세 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나이로는 4학년이지만 지적 능력이 다소 떨어져 2학년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해 성탄절이 가까이 다가오자 교회에서 연극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 연극을 준비하던 선생은 윌리에게 여관집 주인역을 맡겼습니다.

 

이제 성탄절이 되어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연극은 진행되었고 드디어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으로 다가와 여관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 여관방 주인 역을 맡은 윌리는 대본에 나와 있는 그대로 말했죠.

우리 여관에는 방이 없으니 다른 곳을 찾아보세요.”하고 말이죠.

 

그때 요셉과 마리아는 더욱 간절히 간청하였습니다.

우리는 너무 멀리서 왔습니다. 아내는 출산할 날이 찼고 쉴 곳이 당장 필요해요.”

그러자 여관 주인역을 맡은 윌리는 말도 없이 마리아를 오래 쳐다봤습니다.

그 시간이 1초나 2초가 아니라 계속 시간이 흐르듯 윌 리가 마리아를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무대 뒤에서 대사를 읽어 주던 선생님은 윌리가 대사를 잊은 줄 알고 자꾸 읽어 줬습니다.

한동안 말없이 서 있던 윌리는 이제 정신을 차리고 대답을 했습니다.

안돼요. 방이 없어요 가세요.”

 

그러자 요셉과 마리아는 슬픈 듯이 뒤로 돌아 걸어갔습니다.

바로 그때였죠.

대본에 따르면 윌리는 분명 방 안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윌리는 문간에 서서 걱정스러운 듯 눈물을 흘리며 마리아와 요셉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습니다.

요셉, 마리아, 가지 말아요. 마리아를 데리고 돌아와요.”

 

그 대사는 각본에 없는 대사였습니다.

내 안방을 써요 내 방에서 쉬란 말이에요.”

그러자 연극의 배역을 맡은 다른 친구들은 그 상황에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연극은 그렇게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 장면을 바라보는 수많은 관중들은 가장 뜻깊은 성탄 연극을 보았다고 말을 했습니다.

 

(깨달음) 그 관중들이 왜 그토록 진한 감동을 받았는지 우리는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아이가 보기에 만삭의 마리아와 그 마리아를 데리고 온 요셉이 너무나도 힘들고 지쳐보였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만큼 여관집 주인 역을 맡은 그 윌리의 심령에는 주님께서 원하신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뒤돌아서서 가려는 마리아와 요셉을 향해 가지 말아요. 내 안 방을 써요.”하면서 내 주고자 했던 것이죠.

 

(내음성)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제 심령 속에도 윌리처럼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사랑의 방을 준비하며 살게 해 주세요.”

제 인생이 손바닥 길이 밖에 되지 않음을 매일매일 생각하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긍휼의 방을 열어보이며 살게 해주세요.”

비록 내 심령이 죄로 얼룩져 있어도 주님은 그걸 따지기보다 연약한 자를 긍휼히 품는 그 마음을 더욱 원하시는 것을 알아요.”

주님 2021년이 다 지나가는데, 2021년도 한 해 더 죽어온 것인데, 이제부터라도 제 심령에 사랑과 긍휼을 방을 펼쳐보이며 살게 해 주세요.”

그것이 오늘 밤에라도 죽음 이후 천국으로 우릴 부르셨을 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되게 하실 줄 믿어요.”

 

(찬양)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지고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 주시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 가리라

주의 영광 온 땅 덮을 때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조승용 성도님은 너무 일찍 주님 앞에 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날을 누가 계수하며 그 인생을 내다볼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인생도 실은 손바닥 길이보다 짧고 우리의 최전성기도 한낱 입김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이 짧은 인생 속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인생, 지혜로운 인생을 사는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만삭의 몸의 마리아를 대접해주는 삶, 가난한 나그네를 동굴 객실에 들여 유숙토록 방을 열어주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마저도 없을 때 가난한 동굴집 아래층의 막사라도 내 준 그 사람이야말로 주님께 칭찬받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들도 그렇게 매일매일 죽음을 맞이하며 저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며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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