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논지) 오늘부터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대림절(待臨節)은 한자로 ‘기대할 대’자에 ‘강림할 임’자 그리고 ‘절기 절’자입니다.
영어로는 ‘advent’ 곧 ‘출현하다’ ‘나타나다’는 뜻으로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한 말이죠.
대림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아기 예수의 탄생 전 4주간을 말하는 절기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탄생만 기념하는 대림절이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초림의 예수는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이시고, 다시 오실 주님은 상급과 심판의 주님으로 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그만큼 성탄절을 맞이하기까지 아기 예수의 알리고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절기로 삼아야 하는 것이죠.
(성화) 우리는 요즘 새벽에 에스라서를 살펴보고 있는데 거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죠.
에스라 1-6장은 스룹바벨 총독과 대제사장 예수아가 제1차 바벨론 포로귀환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돌아온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감사제사를 드린 후, 성전 지대를 놓고 건축을 시행하다, 어려움을 겪는 과정을 거쳐 20년만에 완성한 모습이죠.
에스라 7-10장은 서기관 에스라가 제2차 포로귀환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돌아와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내용이죠.
70년간 바벨론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잊어버린 백성들에게 율법교육을 시킨 것이었죠.
(깨달음)그런 에스라서 말씀이 오늘을 사는 우리와 무슨 연관성이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B.C.586년에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당할 때 유다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간 총수가 180만명 정도였죠.
그런데 제1차 포로귀환 때(B.C.538) 예루살렘에 돌아온 수는 여자까지 합해 49,897명 곧 5만명이었죠.
180만명 중에 5만명만 돌아왔다면 거의 3%밖에 돌아오지 않는 셈입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70년가량 바벨론에 살면서 뿌리내린 것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먹고 살아갈 것도 많고, 할 일도 많은 곳인데, 예루살렘에 돌아가면 그걸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말이죠.
(적용)이것이 대림절을 맞이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도 영원한 본향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언젠가 돌아가야 할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이 있다는 사실 말이죠.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 뿌리내린 것들로 인해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돌아갈 마음조차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말이죠.
초림의 주님은 아기 예수의 몸으로 평화의 왕으로 오셨지만 재림의 주님은 상급과 심판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이지 말이죠.
그때 우리가 이 땅에 뿌리내린 것들이 많을지라도 그날 부활체의 몸으로 주님을 맞이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 땅에 두 발을 내딛고 살지만 무슨 관점으로 살아야 할지 명확해지지 않습니까?
나를 부르신 삶의 자리에서 내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나라를 받들며 소명을 다하는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이죠.
이것이 대림절 첫째 주일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요 본문을 통해 말씀하는 메시지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누가복음 1장에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사건들이 연이어 등장하고 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제사장 사가랴와 그 아내 엘리사벳에게 찾아와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일러줍니다.
그러면서 그 아이의 이름을 세례 요한이라고 칭하도록 그 이름까지 지어주죠.
그 아내는 경수가 끊어졌기에 아이를 못 낳는 처지였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임신이 가능케 된다는 것이었죠.
그 후 천사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심부름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 동네의 요셉과 마리아에게 찾아갔죠.
요셉과 마리아는 나사렛이란 동네에 함께 살던 이들로서 부부의 연을 맺기로 하고 약혼한 사이였죠.
물론 약혼은 했지만 부부관계를 맺지 않는 상태로, 그때까지 마리아는 남자와 관계갖지 않는 ‘동정녀’였죠.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먼저 찾아가 아들을 잉태할 것이요, 그 아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전해주죠.
그러자 마리아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지 물었죠.
그때 천사 가브리엘은 “너의 친족 엘리사벳도 성령의 권능으로 잉태했고, 너도 그렇게 될 것이다.”하고 말해줬죠.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불가능한 일이 없느니라.”하고 말입니다.
그때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당장 엘리사벳에게 가보았습니다.
그러자 가브리엘이 성령의 권능으로 임신한 사실을 확인했고, 이미 잉태한지 6개월이 된 걸 알았죠.
더욱이 마리아를 맞이한 엘리사벳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실 거예요.”하고 권면해줬죠.
그러자 마리아는 자신과 결혼하기로 한 요셉에게 그 모든 알릴 수밖에 없었죠.
그때 요셉은 성령의 능력으로 아이를 잉태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당황하고 놀랐을까요?
마태복음에 보면 바로 그 무렵에 천사 가브리엘이 요셉에게도 찾아가 동일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녀는 성령의 능력으로 아이를 잉태한 것이니 “그녀와 결혼하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하고 말이죠.
더욱이 그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이름까지 알려줬습니다.
그 아이는 구약의 이사야서를 통해 예언된 “임마누엘 하나님”이라고 친히 알려준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요셉은 그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따라 마리아와 함께 결혼했고, 아이를 낳기까지 동침치 않았죠.
(전개)그렇다면 아기 예수는 마리아가 살고 있는 나사렛에서 태어나는 게 순리이지 않겠습니까?
마리아와 요셉이 한 동네 사람이었고, 그들에게는 그곳이 생활터전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는 마리아와 요셉의 고향 땅인 갈릴리 서남쪽 그 나사렛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쭉 읽어나가면 아기 예수는 베들레헴 땅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세상 역사는 그 시절에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제거한 옥타비아누스가 ‘존엄자’ 곧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올라, 천하만국에 혹적령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요셉이 만삭의 아내였던 마리아를 데리고 그의 본향 베들레헴으로 올라갔다고 말입니다.
그 당시 나사렛은 갈릴리의 서남쪽 구릉지에 위치한 아주 작은 시골 마을에 불과했습니다.
동굴로 된 움막집에서 생활했고, 그 움막 밑에 작은 동굴을 파서 동물을 키우는 식이었죠.
우리식으로 말하면 그 옛날 판잣집촌과 같은 빈민촌이 나사렛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인구도 150명 정도밖에 살지 않는 작은 촌구석이었다고 전해줍니다.
그와 같은 나사렛 촌동네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직선거리로 160km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성인 남자가 하루 20km씩 걷는다고 할 때 8일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죠.
하지만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8km가 떨어진 곳으로 해발 890m에 위치한 동네였죠.
그러니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산등성을 올라가듯 오르막길을 향하는 길이었죠.
그런 곳이라면 만삭의 아내를 데리고 요셉이 가야 할 때 적게는 20일 많게는 30일 걸리는 거리였죠.
그렇다면 요셉은 굳이 그 험하고 힘든 길을 만삭의 아내 마리아를 데리고 가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냥 나사렛에서 아이를 낳고 훗날 베들레헴에 가서 호적만 하고 다시 돌아오면 좋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때 요셉이 만삭의 아내 마리아와 함께 고향땅 베들레헴을 찾은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순종코자 함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의 미가서 5장 2절에 예언된 그 언약의 말씀을 온전히 받들고자 한 두 사람이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그만큼 아기 예수, 이 땅의 구원자는 베들레헴 땅에 태어날 것을 구약성경에서 언약의 말씀으로 약속해주신 것이었습니다.
그 까닭에 요셉과 마리아도 이 땅에 구원자를 그 땅에서 태어나게 할 수 있도록 힘든 과정을 마다하지 않고 순종했던 것이죠.
(본문)그렇다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고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대림절 첫째 주일인 오늘 본문을 통해 주목케 하는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본문 2-5절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깨달음)세상의 역사적인 관점에서는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에 올라 천하에 호적령을 내린 것 때문에 요셉이 고향 땅 베들레헴으로 올라간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곧 하나님나라를 받들고자 베들레헴을 찾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때의 광경을 우리는 충분히 그림으로 그려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 각처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이 아우구스투스의 호적령에 맞춰 불평하는 가운데 각자 본향을 찾아가는 모습 말입니다.
그중에는 베들레헴을 본향으로 두고 있는 이들도 있어서 유대 땅 각처에서 그곳을 향하는 이들이 줄을 서서 가지 않겠습니까?
그중에는 이미 자신이 살고 있는 터전이 좋다면서 굳이 고향을 찾아가지 않으려는 이들도 없지 않았겠죠.
더욱이 요셉과 마리아처럼 혹시라도 임신한 아내가 있다면 더더욱 베들레헴을 찾아가지 않았겠죠.
그런 상황인데도 요셉과 만삭의 마리아가 베들레헴을 찾아간 이유는 오직 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데 자신들을 내어드리고자 말입니다.
가는 길이 20일, 많게는 한달이 걸려도, 가는 길이 지치고 힘들어도 끝까지 순종했던 두 사람입니다.
그만큼 세상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의 눈치 때문에 베들레헴을 찾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셉과 마리아는 오직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받들고자 본향을 찾아 올라간 것이었습니다.
똑같은 일을 하고 동일한 모습으로 산다 해도, 그 목적하는 바가 전혀 다른 사람이 있듯이 말입니다.
(적용)이것은 서두의 말씀처럼 바벨론에 정착한 180만명 중에 3%만 그들의 본향을 찾은 것과 흡사한 일이죠.
이미 뿌리내린 게 많고, 완벽한 삶의 터전을 확보한 이들은 굳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했던 것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들 중에 5만명이 예루살렘 본향으로 돌아간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곳이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땅이요, 하나님의 성전 곧 하나님나라의 터전이 있었기 때문이죠.
비록 그곳에 가면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세상 명예를 주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그곳에 가는 게 힘들고 새로 시작할지도 모르지만, 오직 언약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나라를 세우고자 다시금 본향을 찾은 것이었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과 만삭의 아내 마리아가 베들레헴을 찾은 것도 바로 그와 같은 격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구원자 아기 예수가 베들레헴에 태어나야만 한다는 그 약속의 말씀을 온전히 받들고자 말입니다.
(주문)그렇다면 대림절 첫째 주일인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머잖아 가야 할 영적 본향이 있다는 사실과, 그 나라를 받드는 자로 살기를 원하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오늘 시간에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네가 만약 요셉과 마리아의 처지였다면 너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여 베들레헴에게 올라갔겠느냐?”
“네가 만약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그곳에서 70년간 뿌리내린 삶이었다면 너는 과연 예루살렘에 돌아갈 수 있었겠느냐?”
“지금 네가 이 땅에 두 발을 내딛고 뿌리내린 것들이 많지만, 머잖아 가야 할 너의 영적인 본향 천국을 소망하며 살고 있느냐?”
“지금 네가 이 세상의 흐름 속에서 모든 것들을 취하며 살고 있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언약의 말씀을 붙잡고 순종하며 살고 있느냐?”
“세상 사람들 모두가 눈에 보이는 것만 좇아 살지만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들은 주님의 언약을 붙잡고 사는 자들이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고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너도 대망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이 세상 사람은 모두 이 땅의 것만을 목적으로 목숨걸고 살지만 너는 주님의 언약의 말씀에 목숨을 걸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 세상 사람은 모두가 이 땅에 뿌리내릴 것만 추구하며 살지만 너는 머잖아 가야 할 네 본향 천국을 꿈꾸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만큼 너는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최선을 다하지만 그들과 다른 목적으로 사는 자여야 하지 않겠느냐?”
“세상 사람들은 가이사의 흐름을 좇아 베들레헴을 찾았지만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한 것처럼 말이다.”
“오늘 너도 그와 같은 영적인 본향을 사모하는 자, 주님의 다시오심을 대망하는 자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찬양)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지고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 주시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 가리라 주의 영광 온 땅 덮을 때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예화) 김은호 목사의 〈인생의 밤을 만났을 때〉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울산대 법학과 이정훈 교수란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본래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그 후에 군종 장교 곧 군승으로 복무를 했습니다.
그 뒤 불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교회를 없앨 목적으로 설립한 ‘종교자유정책연구회’에 몸을 담았죠.
그곳에서 수행하면서, 미션스쿨에서 예배나 성경공부를 못 갖도록 또 선교활동도 못하도록 관련법안을 만들고자 했죠.
그러던 어느 날 암자에서 돌아와 평소대로 교회를 공략하기 위해 CTS TV설교를 시청했습니다.
그때 어떤 목사님이 “우리는 죄인입니다.”하고 설교하는데 속으로 “웃기고 있네. 너나 잘 하세요”했죠.
그때 번개를 맞은 것처럼 혀가 굳어져서 바닥에 엎드렸고, 이대로 “죽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순간 “우리는 죄인입니다”하는 목사님의 설교가 떠오르면서 “나는 죄인입니다”하고 주님께 고백을 했습니다.
마치 다메섹 도상의 바울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신 것처럼 그날 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으로 찾아온 것이었죠.
그는 주님을 자기 주인으로 영접하게 되었고, 2007년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한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제 그는 1분 1초도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고 ‘예수님만 구원자이심’을 증언하는 법학자로 일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해 줍니까?
그의 삶은 평상시와 동일한 일상처럼 살고 있지만 그가 추구하는 인생 목적이 완전 달라진 것이죠.
예수님만이 구원자요, 예수님만이 영원한 주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는 자로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도 울산대학교에서 법학자로 살고 있지만, 그 삶의 초점은 주님의 다시오심을 고대하며 살고 있다는 거죠.
(예화2) 김태훈의 〈깨어진 그릇〉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또 한 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울대의대를 졸업하고 대학병원에서 전문의로 일하다가 2013년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떠난 김태훈 선교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고등학교 3학년 겨울 방학 때 형을 따라 온누리교회에 처음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 서울대의대에 진학하고 온누리교회 청년부에서 활동했습니다.
그 무렵 기도도 열심히 했고 예배의 찬양팀에 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선교에 대한 열정도 품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주도로 아웃리치를 갔는데 그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죠.
“태훈아.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겠느냐?”
그때 그는 “예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어디든 가겠습니다”하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 후 군에 복무할 무렵에 ‘코이카 봉사단원’에 들어갔습니다.
KOICA란 우리나라와 개발도상국가 사이에 상호교류를 통해 그 나라의 경제사회발전을 지원하는 걸 목적으로 세운 외교부산하의 소속단체를 말합니다.
외과의사였던 김태훈은 군복무를 그곳 코이카에서 복무했는데, 방글라데시에 의료봉사를 떠났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 그는 현지인 교회를 다녔는데 무슬림이었다가 회심하여 목사가 된 분을 만났습니다.그분을 보면서 한 사람의 회심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치는지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군 복무를 마친 그는 이후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토록 잘 나가던 대학병원, 미래가 보장된 병원일을 그만두고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남수단사업에 지원하여 떠났습니다.
그때 그의 아내는 만삭의 몸이었는데, 2013년 3월에 홀로 남수단에 들어간 그였죠.
그런데 그곳에 들어간지 얼마되지 않아 말라리아에 걸렸고 2개월가량 회복되지 않는 상태로 지내야 했죠.
그 후 발이 계속 아팠고, 남수단에 내전이 생겨, 에티오피아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2014년 9월 아픈 발을 치료하고자 한국에 홀로 들어왔는데, 친구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청천벽력같은 소리 곧 파킨슨병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손이 떨려 단추를 채우거나 신발끈을 묶는 게 어렵고, 손글씨를 쓰는 게 더욱 어려운 병이 그것이죠.
발을 내딛을 때는 중심을 잡는 게 쉽지 않아 옆으로 기우뚱거리는 게 파킨슨병입니다.
선교하러 간지 1년밖에 안 됐는데, 그토록 힘든 병에 걸리니까 얼마나 허망하고 원망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그 진단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낙엽 위로 비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그런 생각이 밀려들었죠.
“그래. 비가 쏟아져도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돼”
‘비가 쏟아져도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주님께서 그의 심령 속에 말씀하는 음성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질병 때문에 선교 활동을 중단해서는 안된다는 주님의 격려하심이었습니다.
바로 그 무렵에 에티오피아에 세 아이를 데리고 있던 그의 아내에게도 하나님께서 환상가운데 찾아오셨죠.
그날 기도하다가 환상을 봤는데 예수님의 품에 자신이 천진난만한 아기처럼 안겨 있는 걸 봤습니다.
그런데 그 밑을 보니까 예수님의 발에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걸 보는 그의 아내는 자신이 걷는 길이 예수님의 골고다 언덕길이라 해도, 주님의 품에 안겨 게 축복의 길임을 깨닫게 되었죠.
그 소식을 접한 김태훈 선교사는 어머니가 말리고, 친구 의사들이 말려도 파킨슨병 약 한보따리를 들고 그곳 에티오피아로 돌아갔습니다.
모두가 말려도 왜 그는 그곳 에티오피아로 돌아갔는지 우리는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곳이 주님께서 부르신 하나님나라요, 그곳에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고자 함이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해 주십니까?
주님께 당신의 자녀들을 부르시는 하나님나라의 현장은 저마다 다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이정훈 교수처럼 학교나 직장의 현장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또 김태훈 선교사처럼 전문인 선교지로도 부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 자신들처럼 그저 평범한 일상의 삶속에서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부르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그곳에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일구시길 원하시는 주님이란 사실입이죠.
그 일터의 현장을 부르신 하나님 나라로 받들며, 그곳에서 주님의 다시오심을 고대하며 살게 하시는 주님이란 사실입니다.
(내음성) 그렇기에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주님께 기뻐받으실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를 이정훈 교수나 김태훈 선교사처럼 부르지 않았아도, 저를 부르신 지금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를 일굴 수 있게 해 주세요.”
“지금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세상의 무게감을 안고 살지만, 그곳에서 주님의 다시오심을 맞이하며 살게 해 주세요.”
“주님은 특별한 곳에 재림하시는 분이 아니라 맷돌 가는 현장, 밭을 가는 현장에 오신다고 하셨잖아요.”
“주님께서는 화려한 예루살렘의 왕궁에 태어나신 게 아니라 초라한 말구유통에 오셨잖아요.”
“주님, 저를 부르신 현장이 특별하지 않아도 제가 일하는 현장이 주님의 특별한 부르신 현장이 되도록 매일매일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며 살게 해 주세요.”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에 호적령을 내릴 때 세상 사람들은 세상 순리를 좇았지만 요셉과 마리아는 오직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자 순종하여 갔습니다.”
“주님께서 언제 어느 때라도 다시 오신다고 해도 언제나처럼 주님의 다시오심을 맞이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찬양)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땅의 모든 끝 모든 족속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모든 열방이 주께 돌아와 춤 추며 경배하게 하소서
우리 주님 다시 오실 길을 만들자 십자가를 들고 땅 끝까지 우린 가리라
우리 주님 하늘 영광 온 땅 덮을 때 우린 땅 끝에서 주를 맞으리
마라나타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의 흐름을 쫓는 자들과 같이 살지만 언젠가는 가야 할 영적 본향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자들입니다.
다들 바벨론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 때 5만명에 불과한 유대 백성들이 예루살렘 본향을 찾아간 것도 같은 이치였습니다.
다들 로마황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호적령 때문에 베들레헴을 찾아갔지만 요셉과 만삭의 마리아는 언약의 말씀을 받들고자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이정훈 교수도 김태훈 선교사도, 각자 부르신 일터의 현장은 달라도 각자 부르신 현장을 하나님나라로 일구고자, 그곳에서 주님의 다시오심을 바라보고자 나아갔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신 그 현장도 다들 다르지 않습니까?
각자의 부르신 삶과 현장이 다 다를지라도, 그 현장에서 주님의나라를 일구며 주님의 다시오심을 고대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이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할지만 주님의 나라를 목적으로, 주님의 재림을 목적으로 삼는 자들의 특별한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그것이 주님의 성탄을 알리며 다시오실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대림절 첫번째 주일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메시지이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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