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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묵상LifeBible

그는 그곳으로 돌아가는데 우리는 어디쯤에 있을까?

by 똑똑이채널 2021.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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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의  〈 깨어진 그릇 〉

 

“‘비가 온다고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돼.’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런데 이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래 지금 나는 소나기 속에 있는 거구나.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구나.’ 아무도 보지 않는 그 나무 아래에서 내 인생을 해석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병을 허락하셨는지 여러 번 여쭈었지만 답을 주시지 않았다. 단지 내가 에티오피아로 돌아가기를 원하신다는 것과 가던 발걸음을 돌이키지 말고 계속 가라는 마음만 주셨다.”

 

김태훈의 깨어진 그릇에 나오는 고백이다. 서울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유명 병원에서 외과 전문의로 근무하던 그가 아프리카로 떠났다가 1년 만에 파킨슨병을 얻고 말았다. 그날 산책하던 중에 빗줄기를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금 에티오피아로 돌아간 것이다.

 

그가 파킨슨병을 얻었다고 할 때 그의 어머니와 친구 의사들은 모두 말렸다. 병을 치료한 뒤에 에티오피아로 들어가도 늦지 않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파킨슨병 약 한보따리를 들고 그곳을 향해 돌아갔다.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오직 하나님의 부르신 말씀에 순종코자 하는 것이었다.

 

에스라가 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엽을 뜯으며 통곡하는 모습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스9:9-10)

 

아론의 16대손이자 서기관 겸 제사장인 에스라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고백이다. 바벨론 포로에서 1차로 돌아온 이들이 어려운 과정 속에서 성전을 재건했지만 그들의 혼합주의 삶을 청산치 못한 죄악을 탄식하는 고백이다.

 

에스라서는 1-6장까지의 전반부와 7-10장까지의 후반부로 나뉜다. 전반부는 바벨론을 정복한 페르시아의 대왕 고레스(Cyrus, B.C.559-530)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유다 백성들을 본국에 돌아가 성전을 재건토록 칙령을 반포하고 그 일을 유다 총독 세스바살에게 위임한다(1). 그때 세스바살의 조카이자 젊은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예수아가 49,897명 곧 5만명 가량의 제1차 바벨론 포로귀환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돌아왔고(2), 안식일과 초막절을 지킨 후 성전지대를 놓았다(3).

 

그런데 에스라 4장에서는 성전재건이 중단된다. 그때는 고레스가 죽고 그의 아들 캄비세스Cambyses, B.C.529-522)가 통치하다가 새로운 왕 다리오(Darius I, B.C.521-486)가 즉위한 때다.1) 그때 유다 땅에 이주한 북쪽 사마리아 사람들이 동서남북의 혼혈족을 부추겨 조직적으로 성전재건을 방해했다. 그런 상황인데 아하수에로 왕(Xerxes, B.C.485-465)과 그 아들 아닥사스다 왕(Artaxerxes I, B.C.464-424)의 통치까지 에스라 4장에 살짝 언급한다.2)

 

중요한 것은 고레스 대왕이 칙령을 반포한 후 20년 넘게 성전재건이 중단된 점이다. 그 사이 유다 백성은 성전재건은 뒷전이었고 오직 자신들의 집을 세우기에만 급급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90살의 학개 선지자와 20살의 스가랴 선지자를 유다 백성에게 보내 성전재건을 독려토록 했다(5장, B.C.520). 그러자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비롯한 유다 지도자들이 다시금 성전재건에 착수했다.

 

물론 그때도 방해공작을 펼치던 이들은 다리오 왕에게 성전재건중단 상소문을 보냈다. 그에 뒤질새라 유다 방백들도 맞상소문을 올렸다. 그러면서 고레스 대왕의 포고문을 찾아 확인토록 요청했는데, 다리오 왕은 바벨론의 악메다 궁성에서 그 문서를 찾아냈다. 그래서 성전공사를 진행토록 했고, 마침내 B.C.515년에 성전재건을 완공했다. 이는 솔로몬 성전이 파괴된 때로부터 70년만의 일이었으니, 그날 성전에 모여 유월절을 지키던 온 백성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6).

 

에스라서의 후반부가 시작되는 7장은 에스라가 제2차 바벨론 포로귀환자들을 이끌고 유다 땅에 돌아온 B.C458년의 일이다. 그때는 성전이 완공된지 57년이 지난 때였고, 페르시아의 수산 궁에 살던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사악한 하만의 손에서 유대 민족을 구한 때로부터 20년이 지난 상황이다. 그 시기는 아하수에로 왕의 아들인 아닥사스다가 통치하던 때다.

 

그때 아닥사스다 왕의 총애를 받던 에스라는 바벨론 땅의 가시뱌지역에 사는 레위인을 불러모았다. 그러자 느디님 족속을 포함한 레위족속 220명이 나왔고 그들과 함께한 1754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에스라는 그때 왕이 하사한 금과 은을 성전 당국자에게 넘겼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8). 그런데 백성의 지도자들이 가나안 여인을 아내로 취한 일을 듣게 됐다(9). 그러자 에스라는 그들의 죄를 온 백성들의 죄로 여기며 하나님께 함께 자복했다. 아울러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율법에 어긋난 삶을 청산토록 했는데 모든 지도자와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따랐다(10).

 

이상을 볼 때 에스라서는 80년의 역사를 포함하고 있다. 최초 고레스 대왕의 칙령을 반포한 B.C.538년으로부터 아닥사스다 왕이 다스리던 B.C.458년까지 말이다. 그런데 바벨론 땅에 살던 180만명의 유다 백성 중에 본국에 돌아온 이들은 5%도 되지 않는다. 어렸을 때 바벨론으로 떠난 이들은 고령이 되었고 에스라를 포함한 젊은 세대는 바벨론에서 태어나 자란 이들이다. 그들에게 페르시아 제국 내의 바벨론 땅은 제2의 집과 같은 곳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5%의 사람들은 어떤 이유 때문에 본국에 돌아왔을까? 오직 하나님 나라의 언약을 받들며 하나님과 관계를 엮어나갈 성전을 재건코자 함이었다. 물론 우여곡절을 끝에 성전을 재건했지만 그들의 심령에 말씀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가나안 여인을 아내로 삼는 혼합주의 신앙관에 물들고 만 것이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에스라를 예루살렘에 돌아가도록 한 것이다. 그만큼 에스라의 사명은 성전재건에 있는 게 아니라 백성들의 심령을 재건하는 데 있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다들 비슷해 보인다. 세상 흐름 속에서 그만그만 사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나라의 자녀들은 그 지향점이 다르다.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사명을 따라 사는 자들이다. 김태훈 선교사와 서기관 에스라도 바로 그 나라를위해 에티오피아와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쯤에 서 있을까?

 

 

 

1)https://www.thoughtco.com/timeline-of-the-ancient-rulers-of-persia-120250

2)https://www.torahclass.com/old-testament-studies-tc/1833-old-testament-studies-ezra/1679-lesson-7-ezr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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