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홍지훈 목사의 〈달란트를 찾아서〉
설교집인 이 책은 홍지훈 목사 스스로 성서 묵상집으로 부른다.
그는 독일 본 대학에서 성서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호남신학대학교 역사신학교수로 재직중이다.
이 책은 예전에 설교한 내용들을 엮은 것이다.
2. 아래는 이민재의 ‘재복음화를 제안한다’(기독교사상, 2009년2월)는 내용을 그가 옮겨적은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많은 영역에서 복음의 회복이 일어나야 하는데 네 가지가 시급하다.
첫째, 신앙의 회복 네 가지
비는 신앙에서 세우는(그리스도를 가르치고 본받는) 신앙으로.
기적 신앙에서 수덕(몸을 닦고 마음을 닦고 행실을 닦는) 신앙으로.
축복 신앙에서 지복(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에서 오는 그윽한 행복)으로.
간증 신앙에서 고백(영웅적 간증에서 벗어나 죄를 고백하고 용서의 은혜를 누리는)신앙으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삶의 회복 네 가지
교리에서 삶으로.
전통에서 경험으로(머리로 배운 신앙의 언어들이 자기 삶 속에서 체험되는).
상벌에서 축제로(두려운 하나님에서 잔치의 기쁨을 안겨주시는 하나님으로).
예속에서 자유로(죄의 속박에서 자유)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교회의 회복
부분에서 전체로(교파, 교단 중심의 협소한 신앙관이 아니라 기독교 전체 속에서 영적 가르침을 추구하는).
건물에서 사람으로
직분에서 은사로(개인 개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 달란트를 발견하게)
성장에서 나눔으로의 회복입니다.
넷째는 기도의 회복
비상에서 일상으로(힘들 때, 즉 비상시의 영성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영성을 회복)
바깥에서 안으로(내밀한 경험)
통성에서 관상으로
소음에서 침묵으로 회복
3. 백년해로하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그만 할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셨죠.
할머니는 가을에 감이 풍성하게 열리자, 평소 감을 좋아하던 할아버지가 생각났죠.
그래서 주렁주렁 달린 가지 하나를 걲어다가 무덤 앞에 가져다 두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전도사님과 장로님들이 이것을 알고는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할머니 아시겠어요? 할머니는 우상을 섬겼어요.”
“먹을 거리를 가져다 무덤에 두면 귀신이 나아서 잡수라고 하는 거예요.”
“회개하세요. 그리고 온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잘못했다고 하세요.”
그때 그 할머니가 속으로 그런 말을 속삭이면서 애를 태웠다고 합니다.
“그럼 감은 안되고 꽃는 허용됩니까?”
어떤 목사님은 이런 모습을 보고 ‘무례한 기독교’라고 불렀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무례함과 그 무례함을 넘어 폭력성까지 보이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경우죠.
기독교는 본래 ‘사람을 살도록 도와주는 종교’인데 언제부터인지 ‘말만 앞세운 종교’, ‘교리로 무지함을 포장한 종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수 좀 믿고 나면 좀 안다고 하면서 무지해 보이는 사람들을 함부로 다루는 무례함을 보이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차라리 ‘천해도 일꾼을 부린다’(일거리가 있다면), 밥 굶는 양반보다 낫다“는 잠언의 말씀처럼 무식하지만 무례하지 않은, 그리고 정직하고 신뢰할만한 그런 종교의 모습이 부럽고 그립기도 합니다.
4. 보스턴에 소재한 의학연구소에서 심장연구 전문의의 지도로 실험을 했습니다.
탬플턴 재단에서 240만 달러를 연구비로 지원하면서 시도한 연구였죠.
‘중보기도가 환자의 회복에 효과가 있는가?’ 하는 종교적인 연구였습니다.
심장 전문가 벤슨은 1,802명의 심장병 환자를 모아서 세 집단으로 나누었습니다.
첫째 집단은 수술을 받으면서 중보기도를 받고 있지만, 정작 환자 자신은 중보기도를 받는지 모르는 집단입니다.
두 번째는 중보기도를 받지도 않고, 그런 사실조차 모르는 집단이죠.
세 번째 집단은 자신들이 중보기도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집단이었습니다.
20006년 4월 연구가 끝나고 그 결과가 ‘미국 심장학회지’에 발표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모르는 중에 기도를 받은 집단과 전혀 기도를 받지 않는 집단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보기도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집단은 차이를 보였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중보기도를 받으면서 회복에 도움이 된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중보기도를 받은 것을 알고 있던 집단은 더 심한 합병증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분석한 학자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내게 중보기도를 해주어야 할 만큼 내 병이 중한 병이란 말인가라고 환자들이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으면 목사입장에서 매우 기분이 나쁠 것입니다.
교우들은 목사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하는데, 교우들 생각에 ‘목사님이 기도해주시는데 왜 결과가 이렇게 나쁘게 나왔느냐?’고 의심하거나 실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어떤 목사님이 설교 중에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시골교회 목회 시절에 느닷없이 장로님이 불러서 간적이 있었습니다.
장로님 댁 황소가 누워서 일어날 줄을 모르더란 것입니다.
황소가 일어나야 밭일도 나갈 수 있기 때문에 황소가 벌떡 일어나게 기도해 달라는 장로님이었습니다.
그 부탁에 그 목사님은 한참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 기도는 못한다고 할수 없고, 기도했는데 황소가 안 일어나면 기도 능력이 없다고 할 것 같고 말이죠ㅗ.
그렇게 고민하다가 황소머리를 붙잡고 기도하는 시늉을 하면서 귀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황소야. 나 좀 살려다오. 네가 안 일어나면 난 목사 그만두어야 할지도 몰라.”
“그러면 네가 내 대신 우리 교회 목사 할테냐?”
그랬더니 황소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벌떡 일어났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모두가 배꼽잡고 웃었지만 시골 목사로서 능력있는 기도하기가 이렇게 어렵다는 뜻임을 알고는 웃기만 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 심장학회지’에 발표된 논문은 너무나도 추상적인 이야기입니다.
황소 이야기는 너무나도 믿을 수 없는 주관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때로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자기들만의 잔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기도의 능력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단 하나, 중요한 기도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걸 놓쳐서는 안됩니다.
바로 ‘언약’입니다.
‘언약’에 합당한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지지만 언약에 합당하지 않는 기도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인이 되고 내가 그 분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언약의 중재자이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기도는 ‘언약의 성취’이지 내 개인적인 욕망을 성취하는 게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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