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치병에 걸린 사람은 그 사실을 알게 된 시점을 일종의 경계선이라고 말한다. 자기가 죽어간다는 사실을 진짜로 알기 전과 후로 인생이 갈린다.”
샐리 티스데일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에 나오는 이야기다. 죽음이라는 불치병이 인생을 판이하게 가를 수 있다는 의미다.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진짜로 알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 책은 그녀가 간호사로 일하며 겪은 환자들의 죽음과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와 전통에서 찾은 죽음의 일화를 통해 마지막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를 일깨워준다.
물론 ‘특정 불치병’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저마다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죽음이라는 불치병’을 안고 사는 존재다. 그런 뜻에서 성경은 지혜로운 자는 잔칫집보다 초상집을 사랑한다고 말씀한다. 승승장구한 인생의 앞날만 바라보기보다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 그 날을 염두해 두며 살라는 뜻이다. 일본에는 새해 전날 자신의 장례식에 읽을 추도문을 쓰는 독특한 전통이 있다고 이 책에서 소개하는 바도 그런 연유다.
“마레사 사람 도다와후의 아들 엘리에셀이 여호사밧을 향하여 예언하여 이르되 왕이 아하시야와 교제하므로 여호와께서 왕이 지은 것들을 파하시리라 하더니 이에 그 배들이 부서져서 다시스로 가지 못하였더라”(대하20:37)
남 왕국 유다의 4번째 왕 여호사밧(Jehoshaphat)에 관한 기록이다(대하17-20장, 왕상22장). 그는 25년간 통치했다. 왕이 되자 아버지 아사가 행한 ‘마지막 길’과 달리 다윗 왕이 걸어간 ‘처음 길’을 좇았다. 유다와 베냐민은 물론이고 에브라임 산지까지 온갖 신상을 철폐했다. 더욱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성읍에 보내 백성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게 했다.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토록 선한 길을 좇을 때 하나님께서 평안함은 물론이고 이방 나라들이 조공을 바치게 했다(대하17장).
그런데 통치 5년에 접어들 때 그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았다. 기고만장한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7번째 왕 아합과 정략 관계를 맺었다.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Joram)과 아합의 딸 아달랴(Athaliah)를 결혼시킨 게 그것이다. 그게 무슨 대수일까? 하지만 아합은 바알 신의 숭배자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들였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지원한 장본인이다. 요즘으로 치면 여호사밧이 귀신 숭배자와 연합한 셈이다.1)
그뿐만이 아니다. 여호사밧은 아합 왕이 시리아 왕 벤하닷을 치러 갈 때도 함께 나섰다. 그때 하나님의 선지자 미가야는 전쟁에서 패한다고 했지만 아합의 비호를 받은 400명의 어용 선지자들은 전쟁의 승리를 장담했다. 결국 여호사밧은 아합을 따라 전투에 참전했는데, 아합은 죽고 여호사밧만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하나님께서 여호사밧의 목숨을 생명 싸개로 감싸주신 일이었다(대하18장).
그 일을 겪은 여호사밧은 하나님 앞에 다시금 겸비했다. 자신은 물론이고 온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토록 했고 재판관을 둬서 공의롭게 판결토록 했다. 더욱이 하나님께 속한 영적인 일은 대제사장에게 위임했고 왕에게 속한 행정은 유다 지파의 어른 스바다에게 위임했다. 기고만장하던 교만한 자리에서 내려와 신앙의 순수함을 지키고자 모습이었다(대하19장).
역대하 20장 전반부에는 그에게 위기가 찾아온 모습을 그려준다. 모압과 암몬의 연합군이 남왕국 유다의 엔게디까지 쳐들어온 게 그것이다. 그때 여호사밧은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했다. 아울러 전투에 참전한 군사들에게는 복병을 준비토록 했고, 찬양대원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토록 했다. 그만큼 하나님께 전심을 다해 매달렸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전투를 승리로 장식케 해 주셨다. 그러자 그는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맨 먼저 하나님의 성전을 찾아 감사제를 드렸다.2)
그런데 역대하 20장 후반부에 나오는 그의 모습은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인생 마침표를 찍는 그 시점에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의 아들 아하시야와 교제했다. 그것은 단순한 교제가 아니었다. 아하시야는 바알 신앙의 골수 추종자였다. 그가 난간에 떨어졌을 때도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를 찾는 게 아니라 블레셋의 에그론 신 바알세붑을 의지했다(왕하1장). 여호사밧이 그런 아하시야와 교제했다는 것은 귀신과 혼음한 걸 뜻한다. 그런 자와 홍해 근처의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축조해 다시스로 보내고자 했으니 하나님께서 그 배가 파선하도록 이끄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생의 마침표는 너무나 중요하다. 나이가 들면 눈이 어두워지고 영적 분별력도 흐려진다. 욕심은 도리어 어린아이들처럼 커진다. 이삭이 그랬고 엘리 제사장도 그랬다. 그만큼 영성을 관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 말년에 변질되거나 처참하게 무너지는 경우도 그 때문이다. 그것은 목회자나 일반 신앙인도 예외이지 않다. 그만큼 우리는 인생 마침표를 찍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 앞에 바르게 겸비하며 살아야 한다. ‘죽음이라는 불치병’을 안고 사는 우리는 더더욱 그래야 한다.
1)https://www.proclaimanddefend.org/2016/03/21/jehoshaphat-a-godly-compromiser/
2)https://www.newworldencyclopedia.org/entry/Jehoshap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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