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 남유다 왕국의 네 번째 왕인 여호사밧의 모습을 살펴봤습니다. 역대하 17-20장까지 기록된 여호사밧의 모습이었죠.. 그의 통치 25년의 역사 속에서 초창기 시절에 각종 우상들을 훼파시켰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각 성읍에 보내 백성들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쳐 그들의 뼛속까지 깊이 심겨줬었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시대에 태평성대와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했고, 이방 나라들이 조공을 바치도록 했고, 그의 군사력이 막강해지도록 했죠. 하지만 그런 절정기 시대에 타락하여 북이스라엘의 악한 아합 가문과 정략결혼을 행했고, 그와 함께 아람 나라를 치겠다고 연합군을 형성해 싸웠지만 그 전투에서 대패했죠. 심지어 죽을 위기 속에서 그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죠. 그 모두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깨닫고 하나님께 바로 서게 되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시금 그의 시대에 은혜를 베풀어주시는데, 이번에는 그가 감당치 못할 모암과 암몬 자손의 연합군이 처들어 올 때 그는 온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향해 금식기도를 선포했고, 그 전투에 참전하는 이들에게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했고, 심지어 찬양대를 조직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나갔는데, 하나님께 그 전투를 승리고 거두게 해 주셨고, 그 전쟁의 전리품도 3일간 다 거둬들일 정도로 많았고, 그전쟁을 끝마치고 돌아올 때도 맨 먼저 하나님의 전 곧 성전에 올라가 감사의 제사를 드릴 정도로 하나님 중심으로 나갔죠. 그런 중심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통치 말년까지 태평성대하게 해 주셨고, 사방대적으로부터 평안케 해 주셨는데, 문제는 그의 통치 말년에 그가 아합 왕의 아들인 아하시야와 교제한 것이었죠. 이른바 철저히 바알신앙을 추종한 아하시야, 그가 다락 난간에 떨어졌을 땐 블레셋의 에그론 지역의 신 바알세붑에게 빌고 의지하는 그야말로 하나님을 향해 정면도전하는 그런 악한 왕과 교제했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말년을 기뻐하실 리가 없었죠.
그런 여호사밧의 인생을 통해 우리가 깨닫는 바가 있었죠. 몇 년의 인생을 살던지 간에 인생의 마침표를 잘 찍어야 한다는 점이었죠. 때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해 주시고 성공케 하시는 인생을 살다가도 타락하여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시간조차 사라진다면 너무나도 불행한 인간이죠. 뭔가 더 잘 풀리고 기도할 때마다 응답받는 삶을 산다면, 더욱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올려드리는 그 삶이 바로 인생을 아름답게 갈무리하는 삶이라는 점이죠. 그런 마침표 인생이 참 중요한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사람의 욕심이란 끝도 없어서 더 처참하게 무너지는 경우가 종종 있죠. 그것은 목회자도,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그 누구도 예외이지 않기에 더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사밧의 아들이자, 남유다 왕국의 다섯 번째 왕인 여호람의 통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1-3절 말씀은 여호람이 왕위를 물려받기 전의 상황이죠. 여호람의 아우들이 많았는데, 아버지 여호사밧이 그 동생들에게 각기 재산을 나눠 다른 성읍에 보냈고, 그리고 난 후에 여호람을 왕위에 앉힌 것이죠. 왕권 다툼 때문에 칼부림이 나지 않도록 미리서 정리한 모습이죠.
그렇게 하고서 여호사밧이 죽게 되었는데, 과연 그렇게 정리했다고 해서 다 정리가 된 것일까요? 재산만 나눠주면 그 모든 게 과연 바르게 정리가 된 것일까요? 본문 4-6절에 “여호람이 그의 아버지의 왕국을 다스리게 되어 세력을 얻은 후에 그의 모든 아우들과 이스라엘 방백들 중 몇 사람을 칼로 죽였더라 여호람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삼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여러 자식들에게 재산을 나눠주고 여러 성읍에 가서 살도록 정리했지만, 여호람이 32살에 왕이 되었을 때, 그는 모든 동생들을 다 죽였고, 이스라엘의 방백들 곧 지도자들까지 몇 사람을 칼로 죽였다고 증언하죠.
과연 아우들을 죽인 이유, 그 지도자들을 죽인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가 본문 12-13절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그 여호람에게 편지를 보내게 한 내용이죠. “선지자 엘리야가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되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네 아비 여호사밧의 길과 유다 왕 아사의 길로 행하지 아니하고 오직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이 음행하게 하기를 아합의 집이 음행하듯 하며 또 네 아비 집에서 너보다 착한 아우들을 죽였으니.”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왕위에 올라 그 동생들을 모조리 죽인 이유, 또 그 나라의 방백들 곧 지도자들 몇 사람을 죽인 그 이유는 그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통치하고자 하는 그 정치력에 반기를 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을 미리서 정리하고자 한 것이죠. 그가 걷고자 한 정치력이 무엇입니까? 실은 우상숭배의 길이죠. 바꿔 말해 여호사밧의 다른 아들들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온전히 새겨서 여호람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우상숭배의 길을 걷는 걸 못마땅하게 여긴 것입니다. 더욱이 그가 죽인 지도자들 역시 그가 우상숭배의 길로 들어서는 걸 원치 않았던 것이죠. 그래서 여호람이 왕이 되자 그 착하고 선한 동생들을 모조리 죽였던 것이고,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따르고자 한 지도자들까지도 다 죽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여호람을 보시고서 그를 분명코 치실 것이다, 하고 14절에 말씀하고 계시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들과 구스와 가까운 아라비아 사람들을 일으켜서 여호람을 치도록 했는데, 그의 모든 아내와 자식들까지 다 탈취하게 했고, 그 중에 막내아들 ‘여호아하스’ 다시 말해 ‘아하시야’만 살아남게 하셨죠. 그 뒤에 그의 창자에 죽을병이 생겨 만 2년 만에 그 창자가 빠져나와 죽게 되죠. 그것이 여호람의 통치 8년간 있었던 모습입니다. 32살에 왕이 되어 40살에 죽게 된 남유다 왕국의 다섯 번째 왕 여호람의 최후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만 그의 최후를 정리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는가? 아닙니다. 본문 20절은 우리가 어떻게 인생의 마침표를 더욱 잘 찍어야 할지를 일깨워줍니다. “여호람이 삼십이 세에 즉위하고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다스리다가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 무리가 그를 다윗 성에 장사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두지 아니하였더라.” 여호람이 8년간 통치하고 40살에 죽었는데, 성경이 평가하는 한 줄은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다”는 한 줄이죠. 한 마디로 그의 죽음에 대해 그 어느 누구도 슬퍼하는 자가 없었다는 평가입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다는 것이죠.
그런데 또 하나 놀라는 것은 “무리가 그를 다윗 성에 장사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두지 아니하였다”하는 평가죠. 열왕기에는 왕들이 죽으면 다들 ‘다윗성에 그 열조와 함께 장사되었다’고 기록하지만, 역대기는 좀 더 다릅니다. 하나님을 섬긴 왕과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긴 왕의 묘실이 다릅니다. 솔로몬, 르호보암, 아사, 여호사밧 왕은 열왕의 묘실에 장사되었고, 여호람, 요아스, 아하스 왕은 열왕의 묘실이 아닌 곳이었고, 아마샤 왕은 그냥 유다 성읍에 장사되었고, 웃시야는 문둥병에 걸려 죽었기에 열왕의 묘실에 접한 인근 땅에 장사되었고, 그리고 히스기야 왕은 다윗 자손의 묘실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장사된 것으로 기록하죠. 그만큼 그의 죽음에 대해 존경과 애도를 표한 이들이 많았다는 뜻이고, 그만큼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한 왕이자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푼 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여호람은 하나님께 패역한 왕이요 동생들도 죽였고 지도자들까지도 죽였으니,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더 극심한 고통 속에서 벌벌 떨었겠습니까?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음성이 있지 않습니까? 내 코끝의 호흡을 언제 하나님께서 거둬 가실지 알 수 없지만,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 매일매일 매순간순간 영광을 돌리는 삶으로,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이롭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이죠. 그 때에만 하나님께서도 나를 선하고 아름답게 기억해 줄 것이고, 나를 아는 이 땅의 사람들조차도 나를 선한 한 컷의 영상으로 기억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크고 화려한 일을 많이 했어도, 큰 업적을 많이 남겼다 해도 한 컷의 영상으로 기억된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선한 한 컷의 영상이냐, 이기적인 악한 한 컷의 영상이냐, 내 삶의 몫입니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의 남은 연한이 여호람처럼 8년이 될 수도 있고,
여호사밧처럼 25년이 될 수도 있고,
아사처럼 40년이 될 수도 있고,
아비야처럼 3년, 또 르호보암처럼 17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언제 어느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코끝의 호흡을 거두실지라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아름답고 선한 한 컷의 영상으로 기억되는 삶을 매일매일 살기 원합니다.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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