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본문인 15장에서 아사는 온 백성들과 더불어 철저한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가 아세라 목상을 세울 때, 그의 태후의 자리까지 폐위시킬 정도로 철저하게 하나님께 무릎을 꿇은 왕이었죠. 그리고 역대기 기자는 아사의 종교개혁을 이렇게 정리해주고 있었습니다. “그가 또 그의 아버지가 구별한 물건과 자기가 구별한 물건 곧 은과 금과 그릇들을 하나님의 전에 드렸더니 이때부터 아사 왕 제삼십오 년까지 다시는 전쟁이 없으니라.”(대하15:18-19)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구별’에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이 담당했던 가장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가 ‘구별’입니다. 그 ‘구별’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었죠. 제사장들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무엇인지 구별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이 세상에 속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한 우리는 이 세상의 죄악, 곧 이 세상의 풍속과 기준과 가치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우리의 삶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 이것이 새로워지는 모습이고, 곧 개혁의 출발입니다.
교회의 타락과 세속화는 구별하지 않는 모습에서 비롯됩니다. 교회 내에 세상의 가치와 교회의 목적이 혼재할 때 교회는 본질에서 벗어나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교회는 헌금을 필요로 합니다. 교역자들의 신수비는 교우들의 헌금으로 지급되고, 예배를 드리거나 아이들을 교육하고, 전도나 선교할 때에도 헌금이 없으면 안 되죠.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헌금을 목적으로 삼을 때, 다시 말해 교회가 ‘이윤창출’을 목적으로 삼는 순간 교회는 타락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그래서 본래 제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것은 교회의 재정 원칙 중 하나는 ‘예산’을 세우지 않는 것인데, 교회의 형편에 따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룰 필요가 있겠다 싶어, 기존의 상황에 맞춰가는 것이죠. 교회가 예산을 세우면 강단의 메시지가 이미 세워놓은 ‘예산’을 위해 선포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그런 점들이 교회의 세속화를 부추길 수 있기 때문에, 교회의 본질을 늘 구별되게 해 나가는 것이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모습이죠.
아사 왕의 개혁정신은 ‘구별’하여 하나님께 온전히 드림에 있었습니다. 아사 왕이 은과 금, 그리고 그릇들을 구별하여 성전에 두었다는 것은 단순히 전쟁에서 거둔 전리품을 성전에 보관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승리와 그로 인한 평화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는 그의 신앙고백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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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 본문 16장에서 아사 왕은 자신이 걸어왔던 개혁의 길과 자신의 신앙고백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말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1-3절에 “아사 왕 제삼십육 년에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여 사람을 유다 왕 아사에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한지라 아사가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의 은금을 내어다가 다메섹에 사는 아람 왕 벤하닷에게 보내며 이르되 내 아버지와 당신의 아버지 사이에와 같이 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하자 내가 당신에게 은금을 보내노니 와서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세운 약조를 깨뜨려 그가 나를 떠나게 하라 하매.”
이스라엘의 바아사가 유다를 위협하기 위해 라마성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말년의 아사 왕은 성전과 왕궁에 보관해 둔 은금을 모조리 빼내 아람 왕 벤하닷에게 보낸 것이죠. 이른바 그와 동맹조약을 맺고자 함이었죠. 이로 인해 바아사 왕은 군대를 철수했고, 유다 왕과 아람 왕이 맺은 조약은 겉으로는 훌륭한 외교적 성과를 거둔 것처러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선견자 하나니를 통해 아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7절입니다.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시절에 수행했던 공식 업무 중에는 미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러시아 등 한반도 주변국가들의 대사들을 만나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국가안보를 위한 외교적 노력은 자주적인 국방력을 키우는 일만큼이나 중요합니다. 국가의 위기 앞에서 성전에 보관하고 있던 은이나 금이 뭐 그리 소중하겠습니까? 나라가 없어진 다음에야 성전의 금이나 은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국가의 위기를 막기 인해 성전에 보관하고 있던 금이나 은을 모조리 내어간들, 하나님께서 그것을 조금이라도 아까워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선견자 하나니의 책망은 아사 왕의 외교적 노력 그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는 게 아닙니다. 아사가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아사 왕은 국가의 안전을 위해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도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아사 왕은 자신의 치세기간에 지속되고 있는 안정과 평화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인줄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드리던 아사 왕이 그러한 분별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아사 왕의 돌변한 태도는 역대기를 읽는 독자들을 매우 당혹스럽게 합니다. 35년간 신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해왔던 아사 왕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하는 의문점이 듭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입니다. 바로 그것이 인간의 연약함이자 인간의 한계입니다.
통치 말년에 아사 왕의 상태를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12절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아사가 왕이 된 지 삼십 구 년에 그의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했으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아프면 의사를 찾는 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은 그런 차원을 강조하는 게 아닙니다. 아사 왕이 자신의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해졌는데도 하나님을 찾거나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아사 왕의 영적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인생의 각 시기마다 어떤 영적인 길을 걸어왔는지,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지혜롭게 살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의 인간됨을 아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아는 것, 그 속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좋은 길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한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신 것은 바로 하나님과 사람의 구별,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인생이 아무리 잘나 보여도 인생은 인생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의 시대가 아무리 길어보여도, 영원에 비해 그것은 극히 짧은 순간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저와 여러분들은 오늘도 영원하신 하나님을 찾으며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 우리의 하루를 의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구별된 삶을 드리는 초석이기 때문입니다. 변화무쌍한 매일매일의 삶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우리의 하루가 쌓일 때 우리 인생은 중년의 시기에도, 그리고 노년의 시기에도 변함없이 아름다울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
바람이 불면 쉬 흔들리고 없어져 버리는 우리네 인생 가운데로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상한 갈대와 같은 우리 인생을 불쌍히 여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오늘도 우리를 변함없이 긍휼히 여기시는 그 은혜에 우리의 하루를 의탁합니다.
붙들어주시옵소서.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여 사는 오늘이 구별된 한 날이 되게 하시고,
이러한 우리의 하루하루가 이 세상을 새롭게 하는 출발점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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