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삭이 이제 나이가 들어 죽을 임박했습니다. 큰 아들 에서를 불러 놓고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합니다. 이때 이삭의 나이를 보통 137세로 추정합니다. 이스마엘이 바로 그 시기에 죽었다고 창세기 25장 16절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삭은 그로부터 43년을 더 살았고, 180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천국에 가죠. 그것이 창세기 35장 28절에 나옵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죽을 날이 임박했으니, 별미를 만들어 오라는 것은 어찌 보면 더 먹고 싶은 자기 마음을 내비친 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리브가가 듣습니다. 그래서 둘째인 야곱과 짜고서 집 안에 있는 염소 새끼 두 마리를 가져와 별미를 요리해 아버지께 갖다 드리도록 했죠. 그렇게 해서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을 받고 나갑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누가 들어옵니까? 들판에 나가 사냥을 한 에서가 돌아와 별미를 가지고 아버지께 들어오죠. 하지만 그때는 이미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을 받고 나간 뒤였습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에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날이 되기만을 기다립니다. 왜냐하면 그때 비로소 야곱을 죽이겠다고 벼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부모가 자식들의 눈빛을 모를 리 있겠습니까? 다 환히 알 수 있죠. 실은 그 원인도 부모에게서 비롯된 일 아닙니까? 아버지에게 노욕이 생겨 별미를 만들어오라는 것 자체도 이상한 일이고, 그것을 문 밖에 듣고 있던 리브가가 둘째를 부추겨 그 축복을 가로채게 만든 것도 큰 잘못입니다.
그런데 두 아들 사이에 칼부림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리브가가 야곱을 불러 자기 고향 하란 땅 오빠 라반의 집에 피신하도록 당부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읽은 27장의 전반적 흐름의 말씀입니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게 하나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발생하게 된 계기가 ‘별미’에서 비롯됐다는 점입니다. 과연 그 별미가 뭘까요? ‘별미’로 번역된 히브리어 ‘메타암’(מַטְעָם)은 ‘맛있는 음식’(delectable food)을 뜻합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 총 8번 기록된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창세기 27장에 6번(4,7,9,14,17,31절), 그리고 나머지 2번은 잠언에 기록돼 있습니다. 다만 이 단어가 본문에서는 ‘별난 맛’으로 소개하고 있을지라도 잠언에서는 그리 좋은 의미로 쓰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라 그것은 속이는 음식이니라.”(잠23:3) “악한 눈이 있는 자의 음식을 먹지 말며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지어다.”(잠23:6) 잠언에서는 별미가 ‘속이는 음식’과 ‘악한 눈이 있는 자의 음식’으로 연결 짓고 있습니다. 그만큼 별미를 만드는 것 자체가 인간의 탐욕과 욕심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임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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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어떻습니까? 아버지 이삭이 에서에게 죽기 전에 축복을 해 주겠다면서 ‘별미’를 만들어오라고 한 것 자체가 좋은 취지입니까? 별로 좋은 취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식이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사는 것은 아버지라면 당연한 바람입니다. 그때의 복은 물질이나 장수나 부귀영화만을 바라는 육적인 복이 아니죠. 하나님 앞에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 그래서 어떤 분이 말하기를, 복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애프터서비스다’라고, 정의 했습니다. 그만큼 바른 인간이 되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도를 따르는 영적인 인간이 되는 게 진정한 복입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신10:12)
성경도 분명 그렇게 말씀하는데, 에서는 어떻습니까? 이미 그는 영적인 복을 자기 발로 걷어차 버린 자였습니다. 그가 이어받아야 할 장자의 권리, 그 영적인 명분을 스스로 멸시하여, 들사람이 되어 가나안의 문화와 우상과 향락과 여인의 성적 타락에 빠져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던 자였습니다. 그것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거리(창26:35)로 남았다는 걸 지난 시간에 살펴봤었죠.
그렇다면 적어도 이삭은 죽기 전에 그 아들 에서로 하여금 영적인 삶으로 돌아오도록 가르쳥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에게 ‘별미’를 만들어오라는 것 자체가 더욱 큰 탐욕을 불러오게 만드는 죄악을 부추긴 꼴이었다는 점입니다. 알맹이 없는 껍질, 허영의 복, 곧 육적인 복만을 하나님께 빌어주겠다는 심사였습니다.
그런데 더 꼴불견이 등장합니다. 누굽니까? 리브가가 그 이야기를 듣고 야곱에게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의 축복을 받도록 부추기는 게 그것이었습니다. 그때 야곱은 “내가 아버지의 눈에 속이는 자로 보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 것이라”하고 12절에서 고백을 합니다. 그것은 곧 “맹인에게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27:18)하는 말씀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는 것이 곧 맹인에게 길을 잃게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야곱은 별미를 만드는 것이 실은 저주 받는 일이라고 여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13절에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 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 그 어머니의 꼬드김에 못 이겨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께 갖다 바칩니다.
그때 이삭도 처음엔 야곱인지 아닌지,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먹고 싶은 탐심 앞에서, 야곱이 가져 온 별미를 받아먹고 말죠. 그리고선 축복(祝福), ‘빌 축’에 ‘복 복’자, 곧 하나님께 복을 빕니다. 본문 29절에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하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축복 때문에 야곱이 복을 받게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이미 장자의 명분을 소중히 여긴 그 자체, 곧 구원사의 영적 족보를 쓰려는 그 열망 때문에, 야곱은 복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때 아버지를 속여서 드린 이 별미로 인해 야곱의 인생은 전혀 뜻하지 않는 방향으로 전개된다는 점이죠.
그가 ‘눈속임한 별미’ 요리를 아버지께서 드린 뒤 어떻게 되나요? 에서의 낯을 피해 하란으로 도망쳐야 했고 그곳에서 20년 넘게 온갖 고생을 해야 했고, 고향 땅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도 딸 지나가 강간당하고 그 일로 시므온과 레위라는 두 아들이 할례를 빙자해 세겜 족속들을 모조리 도륙시키는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저질렀고, 뿐만 아니라 요셉을 잃는 여러 환란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야곱이 인생 말년에 요셉의 초청을 받아 애굽에 왔을 때, 바로 왕 앞에 자기 인생 130년의 삶을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창47:9)하고 회고했겠습니까?
그 사실을 알았기에 야곱이 훗날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할 때에도, 그의 12아들을 축복할 때에도, 별미와 같은 걸 가져오게 해서 맛보고 축복한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창48:19),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창49:28)을 했습니다. 이른바 그 자녀들이 현재 살아가는 삶의 수준과 관련된 축복을 한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야곱은 이전에 아버지 에서에게 받았던 별미의 축복이 무의미하다는 걸 이미 자기 인생을 통해 경험했기 때문이죠. 그 별미의 축복은 사람을 속이는 것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별미’와 같은 ‘눈속임의 제물’이 아니라 ‘아벨과 그 제물’(창4:4)처럼 신실한 인격과 그 삶이 묻어나는 제물을 더욱 기뻐하시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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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음성이 무엇입니까? 오늘도 사람을 속이는 별미와 같은 제물의 축복보다, 오직 하나님과 사람 앞에 신실한 인격의 삶을 제사로 드리는 그런 하루의 삶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때 그 신실한 믿음의 삶에 따라 하나님께서 복을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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