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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역대상

다윗의 손과 그 신하의 손에 다 죽었더라(대상20:1-8)

by 똑똑이채널 2021.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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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뀌면 전장터에 나가 있는 군사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야 하는데, 다윗이 왕궁에 거닐고 있는 모습

 

역대기는 바벨론에 포로 이후의 포로 귀환과 맞물려, 나라를 어떻게 세울 것인지에 관한 역사실록과도 같다고 했죠. 패망한 나라를 재건하되 그 토대를 이전에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셨던 다윗 왕조의 역사에 토대를 두고, 그 중심을 성전재건에 놓는 역사를 써 내려가는 것 말이죠. 그래서 다윗 왕조의 옛 역사를 더듬어보면서 정말로 온 이스라엘을 통합할 수 있는 관점으로 역대기를 써 내려가되, 될 수 있는 한 개인적인 실수와 허물보다는 온 이스라엘이라는 전체적인 관점을 그려나가는 것으로 역대기를 기술했다고 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도 바로 그런 맥락을 갖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이 1-3절까지로서, 다윗이 랍바성을 점령한 사건을 기술하고 있고, 두 번째 단락은 4-8절까지 말씀으로서 다윗과 부하 장수들이 블레셋 군대를 물리친 장면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두 이야기는 바벨론 포로 귀한 이전의 통일 왕국시대를 밝혀줬던 사무엘하 11장과 21장을 통해 살펴 본 내용입니다.

이 중 첫 번째 이야기인 다윗이 랍바성을 점령한 사건을 보면 또 다시 역대기가 쓰여진 그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른바 다윗이 부하 장수들과 함께 암몬 자손의 땅 랍바성을 점령한 사건은 사무엘하 11장에 동일하게 나옵니다. 그런데 사무엘하 11장에 나오는 랍바성 점령한 사건과 오늘 읽은 역대상 20장에 나오는 랍바성 점령 사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빠져 있는 사건, 다시 말해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사건이 사무엘상에는 나오고 있다는 점이죠.

하지만 오늘 본문은 그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역대기 기자는 다윗에게 허물이 되었던 사건은 아예 삭제하고 있죠. 그것은 다윗이 잘못이 없는 성군임을 강조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이 다음 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군대 숫자를 조사하는 장면도 뺏겠죠. 하지만 이 다음 장에 나오는 인구조사 기록은 여전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개인적인 죄와 허물, 또 집단적인 죄와 허물의 차이입니다. 다윗이 우리아를 범하고 그 아내 밧세바를 범한 죄악은 개인적인 죄악이라 새롭게 역사를 써 내려가는 마당에 굳이 기록하지 않아도 된 것이고, 반대로 군인들의 총 숫자를 헤아리도록 한 것은 그 일이 이스라엘 전체의 집단적인 죄와 무관치 않기 때문에 그것을 기록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나라를 세우는데 있어서 정말로 온 백성들이 자기 힘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거죠..

다만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다윗의 개인적인 치부에 대해 삭제했다 하더라도, 그 치부의 근원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 1절 첫 마디가 이렇게 밝혀줍니다. 해가 바뀌어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이른바 고대의 왕들은 한 해가 바뀌면 전장터에 나가 있는 병사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줘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전장터에 나가지 않고 대신에 요압 장군이 나가서 암몬 자손의 땅을 격파하고 그 땅의 수도 성읍인 랍바를 에워쌌다고 밝혀줍니다. 이른바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도 기꺼이 그 전투에 나간 병사들을의 기를 살려줘야 했는데 그 책무를 감당치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다윗이 왕궁에서 호위호식할 때 그 죄가 신속하게 파고들었던 것이죠.

우리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뭔가 바쁘고 힘에 부치는 삶 때문에 불평할 수도 있죠. 왜 이렇게 바쁘게 살아야 하는가, 하고 말이죠.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자기 책임과 의무에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이 실은 자기 영혼을 지키고, 자신의 가정과 일터를 지키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망각할 때 그렇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죄악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일컬어 에덴의 기쁨을 상실한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에덴이란 우아한 기쁨곧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했을 주어지는 영적인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곧 소명의 기쁨이기도 하죠. 그러나 그 에덴이 아단곧 재귀동사, 모든 행동의 초점을 자기 자신에게 맞추는 재귀동사 아단이 되면 주색잡기에 빠지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누구든지 자기 책임과 의무를 성실하게 감당하는 크리스천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4-8절까지는 블레셋 사람들을 무찌른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일관된 패턴이 나옵니다. 4절에 이후에 블레셋 사람들과 게셀에서 전행할 때에 후사 사람 십브게가 키가 큰 자의 아들 중에 십배를 쳐 죽이매 그들이 항복하였더라.” 이른바 후사 출신 십브개라는 사람이 블레셋 군사 가운데 키가 큰 십배를 쳐죽였다는 내용입니다. 5절에서는 야일의 아들 엘하난이 골리앗의 아후 라흐미를 죽였다고 밝혀줍니다. 6절에서는 키가 큰 이스라엘 장수가 블레셋 백성 가운데 손과 발이 여섯씩 모두 24개를 지닌 키 큰 자를 죽였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아무리 키가 크고, 몸체가 배틀 채 같고, 또 손가락과 발가락이 하나씩 더 있어서 모두 24개의 손가락 발가락이 있다 할지라도 다윗의 군사들에게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윗의 장수들이 특별한 전술이 있거나 강력한 무기를 지녀서 그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군사들과 함께 해 주신 까닭이요, 하나님께서 이방 대적들을 물리칠 수 있도록 능력을 베풀어 주신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기사 내용을 역대기 기자가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까? 비록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힘도 없고, 능력도 없지만, 정말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다시금 나라를 굳게 세울 수 있고, 모든 백성들이 힘을 모으면 정말로 하나님께서 그 어떤 대적들도 능히 물리칠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베풀어주신다는 것을 일깨우고자 함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우리들에게 깨닫게 하시는 음성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가정의 공동체나 직장의 공동체, 또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겠지만, 모든 공동체 속에 각 개개인의 실수와 허물이 없을 수 없지만, 그것을 꾸역꾸역 들춰내고 긁어내려고 하기보다 덮어주고 감싸주는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이죠. 물론 그 당사자는 그 허물을 덮어주고 감싸주기에 얼렁뚱땅 넘어가기보다 정말로 다윗처럼 뼈아픈 눈물과 회개의 기도를 개별적으로 하나님 앞에 올려드려야 한다는 점을 상기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그런 실수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해바라기처럼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가 속한 공동체의 일원들과 함께, 세상 속에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 도우시고 인도해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한 공동체가 감당할 수 없는 일들도 능히 감당하는 것은 그 공동체가 능력있거나 위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연약한 공동체를 더욱 사랑하시고 힘을 주시는 능력을 주시는 까닭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매일 매일 다가오는 삶의 질곡으로 인해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 고통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주해야만 했던 거인들과 같은 격이기도 하죠. 그래서 그 고통, 그 공격에 대해, 우리의 두 눈을 감아버리고, 숨고자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때일수록 우리가 다윗과 함께 하신 하나님, 다윗의 군사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는다면, 오히려 더 적극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맞설 필요가 있는 점입니다. 그것은 내 힘과 내 능력과 내 방식을 신뢰하기 때문이 아니라 나를 능하게 하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자들에게 다윗에게 주셨던 승리를 오늘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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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긴과 보아스

북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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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주님.

함께 하는 공동체내에 각 개인이 실수와 허물을 범할 수 있지만,

그것을 들춰내고 까발리기보다 덮어주고 감쌀 수 있는 공동체가 되게 하시옵소서.

그 일이 실은 개인적인 책임과 의무를 망각할 때 빚어지는 일들이오니,

우리 각자에게 부여된 책임과 의무와 사명들을 신실하게 감당하길 원합니다.

전능하신 주님.

저희들은 약하고 미련하여 세상의 큰 일 앞에 움추려 들고 뒷걸음질칠 때가 있습니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24개인 사람들, 그런 엄청난 일들 앞에 기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나보다 나를 더 강하게 하시는 주님을 매일매일 바라보게 하셔서,

그 어떤 큰 일 앞에서도 담대하게 헤치고 나가는 저희들로 삼아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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