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성전건축에 관한 모든 재료들을 준비했죠. 수많은 금과 은과 놋과 철과, 백향목과 돌까지도, 무게를 달 수 없을 만큼 무수히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재료들은 다윗이 평화의 시기, 정말로 안전한 시기에 준비한 게 아니라, 환난 중에 준비한 것들이었죠. 이른바 전쟁 통에 피를 흘리면서 준비한 것들이었죠. 그래서 그 때의 피 흘림이란 단순히 적진을 향해 공격하고 승리하기 위한 피흘림을 뛰어넘어 구속사적인 피 흘림의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피를 흘리면서 싸워나갔기에 그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었고, 그 피흘림을 통해 취한 전리품들로 성전 건축에 관한 모든 재료들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 말이죠. 그리고 그 시대에 이제 평안함이 깃들었을 때, 그 모든 재료와 더불어 솔로몬에게 성전을 짓도록 명령하였죠. 다만 성전 건축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철저히 준수할 때에만 형통한 하나님의 나라를 일굴 수 있다고, 솔로몬에게 강조했죠.
오늘 읽은 말씀은 성전에서 섬길 레위 자손들을 밝혀주는 내용입니다. 그만큼 다윗이 성전과 관련된 모든 제반 사항들을 철두철미하게 준비하고 있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내용은 27장까지 계속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읽은 23장 말씀은 성전 중심의 신정국가 기틀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레위인들의 직무에 관한 말씀입니다.
1-2절에 “다윗이 나이가 많아 늙으매 아들 솔로몬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고, 이스라엘 모든 방백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모았더라.” 다윗 왕이 이제 죽을 날이 임박해서, 그 아들 솔로몬을 불러 왕위를 물려줄 시점입니다. 그때 솔로몬만 부른 게 아니라, 국가의 지도자들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한데 불러 모은 것이었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참된 하나님으로 섬기고, 그분의 사랑받는 백성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죠. 이른바 다윗의 국정철학이 반영된 왕위계승인 셈이죠..
그렇다면 다윗이 솔로몬으로 하여금 세울 성전의 수종자들, 곧 성전에서 섬길 자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가? 본문 3절에 30세 이상의 레위인들의 수가 3만8천명이었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체 수를 네 개의 직무대로 나누죠. 이른바 2만 4천명에게는 성전의 제사 곧 예배와 관련된 직무를, 6천명에게는 관리와 재판에 관한 일을, 또 4천 명에게는 문지기 일을, 그리고 나머지 4천명에겐 찬양대를 맡겼습니다.
물론 법궤를 맬 사람들에 관한 수는 기록돼 있지 않죠. 이유가 뭡니까? 이동식 성막의 시절인 광야 40년 동안에는, 아론의 자손인 게르손 고핫 므라리 자손 가운데 고핫의 자손들이 그 법궤를 매고 다녔죠. 하지만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에는 더 이상 이동식 성막의 시대가 아니라 붙박이 성막의 시대요, 더 나아가 다윗이 성전건축에 관한 모든 재료들을 준비하고 이제 솔로몬이 본격적으로 법궤를 모실 성전을 건축한 이후부터는 더더욱 법궤를 맬 레위인들이 필요치 않았죠. 그저 성전의 지성소 안에 법궤를 모시면 충분하기 때문이죠.
바로 그 사실을 본문 26절에서 밝혀주고 있는 것이죠. “레위 사람이 다시는 성막과 그 가운데에서 쓰는 모든 기구를 멜 필요가 없다 한지라.” 그만큼 법궤나 분향단이나 금촛대나 진설병과 관련된 그 핵심 기구들을 맬 레위인들이 이제는 더 이상 필요치 않았던 것이죠. 대신에 제사 직무와 관련된 레위인들, 성전의 관리와 재판에 관한 레위인들, 성전의 문지기와 관련된 레위인들, 그리고 찬양대를 맡았던 레위인들을 필요로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레위인들이 네 가지 일로 세분화되고 보다 전문화되었는데, 그런 그들의 맡은 일을 통칭 한 단어로 정리해 주는 말씀이 있죠. 24절에 “이는 다 레위 자손이니 그 조상의 가문을 따라 계수된 이름이 기록되고 여호와의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하는 이십세 이상 된 우두머리들이라.” 한 마디로 성전과 관련된 일을 ‘섬기는 일’이라는 게 그것입니다. 모세의 출애굽 이후 광야시절부터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그리고 이제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 접어든 레위인들은 성전에 주로 ‘섬기는 일’을 맡았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레위인의 직무수행수칙 제1장 제1조는 ‘우리는 성전에서 섬기기 위하여 부름 받았다’는 뜻이죠. 물론 그 당시 ‘섬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바드’은 노예가 굴종하는 섬김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슨 섬김이겠습니까?
본문 28-29절이 이렇습니다. “그 직분은 아론의 자손을 도와 여호와의 성전과 뜰과 골방에서 섬기고 또 모든 성물을 정결하게 하는 일 곧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기는 일과 또 진설병과 고운 가루의 소제물 곧 무교전병이나 과자를 굽는 것이나 반죽하는 것이나 또 모든 저울과 자를 맡고” 레위인들의 첫 번째 섬김은 ‘제사장들을 도와주는 섬김’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레위인들은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기거하는 방을 관리했고, 또 다른 레위인들은 공무를 수행하는 안뜰을 관리했고, 다른 레위인들은 제사용 기구와 도구들을 닦았고, 다른 레위인들은 상에 차릴 제사용 빵 곧 진설병을 구웠고, 또 다른 레위인들은 그 진설병과 관련된 양과 무게를 재는 역할을 맡았죠. 그것이 곧 제사장들을 직간접적으로 돕는 레위인들의 역할이었죠.
병원에는 의사와 간호사만 존재하는 게 아니죠. 사무장도, 수납자도, 요리사도, 청소부도, 다 필요하죠. 누군가의 섬김을 통해 의사가 의사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축구 경기에서 호날두나 메시가 그 멋진 골을 넣을 수 있는 것도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골키퍼를 비롯해 풀백과 중원을 지키는 미들필더와 양쪽 날개의 윙 플레이어 등이 받쳐줘야 멋진 골을 넣는 공격수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죠.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죠. 교회에는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는 목회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예배를 위한 안내팀과 친교팀과 관리팀, 찬양대와 주방팀, 상조팀과 계수팀 등 다양한 역할을 맡은 성도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함께 협력해야만 아름다운 예배, 아름다운 교회를 세워갈 수 있는 것이죠. 그 당시 레위인들이 그렇게 제사장들을 도와 섬김의 역할을 담당했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레위인들은 어떤 섬김의 일을 했는가? 30-31절에 “아침과 저녁마다 서서 여호와께 감사하고 찬송하며 또 안식일과 초하루와 절기에 모든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가 명령하신 규례의 정한 수효대로 항상 여호와 앞에 드리며” 레위인들의 섬김은 ‘예배를 돕는 섬김’이었습니다. 레위인들의 직무는 대부분 성전 제사를 중심으로 한 일들이었죠. 특히 어떤 레위인들은 아침저녁으로 드리는 제사에 참여하여 제사를 도왔고, 또 그에 따른 찬양대원으로 섬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섬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바드’는 ‘예배’로도 번역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영어의 ‘서비스’(service)는 남을 돕는 봉사라는 뜻도 있지만 예배를 뜻하는 단어로도 사용되는 것이죠.
사실 섬김과 예배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자신의 자아를 죽이고 상대를 높인다는 데에 있죠. 그만큼 내 이름을 드러내고 싶고, 내 가치를 높이고 싶다면 섬김도 어려워지고, 예배도 온전히 드릴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 하는 말씀이 바로 그 때문이죠. 영으로, 진리로, 나 자신을 내려놓고 온전히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도록 하라는 것 말이죠.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날처럼 이리저리 나뉘고 찢긴 고린도교회를 향해 그런 편지를 썼습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설계하신 방식이야말로, 우리가 교회를 이루어 함께 살아가는 삶을 이해하는 데 적합한 모형입니다. 우리가 언급한 지체이든 그렇지 않은 지체이든, 눈에 보이는 지체이든 그렇지 않은 지체이든 간에, 각각의 지체는 저마다 다른 지체를 의지합니다. 한 지체가 아프면, 다른 모든 지체도 그 지체의 아픔과 치료에 동참합니다. 한 지체가 잘되면, 다른 모든 지체도 그 지체의 풍성함을 누립니다.”(고전12:25-26절,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그렇기에 오늘 성령님께서 우리 심령에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또 교회를 세우는 일에서 어떤 직책과 직분을 부여받았든지 간에, 그 모든 일들이 주께 드리는 심정으로 섬기고 예배하는 자가 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무쪼록 우리가 하는 서비스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섬김,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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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주님.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 불러 주심 감사드립니다.
때때로 높아지고 싶고 드러나고 싶은 마음이 앞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구원하신 십자가의 은혜 속에서 늘 겸손을 잊지 않게 하시고,
어떤 역할을 맡았든지,
모든 일을 주께 하듯 충성을 다하여 섬기게 하시고,
그 모든 모습들 속에 온전한 예배자의 모습을 갖추게 하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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