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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0장1-13장10절까지는 거짓 사도들에 대한 바울의 경고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지난 시간의 고린도후서 11장 후반부 내용을 통해서, 바울은 거짓 교사들이 결코 자랑할 수 없는 고난 받은 것에 대해서, 복음 안에서 해산의 고통을 겪은 교회를 염려하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조그만 창문을 통해 광주리에 몸을 싣고 살아난 그와 같은 연약함 말입니다.
오늘 읽은 12장에서도 바울의 자랑은 계속됩니다. 1절,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바울은 환상과 계시를 본 자신의 신비한 영적 체험에 대해 자랑합니다. 환상이란 ‘압타시아’(ὀπτασία)인데 영어로 ‘비전’(vision)입니다. 그리고 ‘계시’란 ‘아포칼립쉬스’(ἀποκάλυψις)로 ‘revelations’ 곧 ‘가려졌던 것이 벗겨진다’는 뜻입니다. 계시록이 바로 그것이죠. 환상은 반드시 눈으로 보는 것이지만, 계시는 눈으로 보는 것을 포함해서 눈으로 보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걸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의 환상과 계시를 봤다’는 것이죠. 그 환상과 계시의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바울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데, 1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말합니다. 자기 경험인데도 객관화시킵니다. 그만큼 자신을 절대시하지 않은 것이죠. 자신이 특출해서가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당신의 환상과 계시를 보여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14년 전에 그걸 보게 됐다고 하죠. 마게도냐에서 3차 선교여행 중에 고린도전서를 썼기 때문에 이때로부터 14년 전입니다. 그때는 바울이 고향 다소에서 칩거하던 때죠.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 부활의 주님을 전하려 했지만 유대인들이 죽이려 해서 아라비아 광야로 도망갔고, 다시 예루살렘에 와서 복음을 전했지만 또다시 살해위협을 받았죠. 그래서 고향 다소로 갔는데, 안디옥교회의 바나바가 동역하자고 할 때까지 칩거했죠. 그게 10년간의 삶입니다. 그 기간이야말로 바울을 낮추는 은총의 기간인데, 그때 그런 영적 체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삶은 우리 자신에게도 허락하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칩거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 말이죠.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 기간은 결코 무가치한 시간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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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2절 하반절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다.” 유대인들은 하늘이 세 하늘로 이뤄져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첫째 하늘은 해와 달과 별이 있는 하늘, 둘째 하늘은 그 위의 물들의 하늘, 셋째 하늘은 그 위로 올라가면 하나님이 계시는 세 번째 하늘이 있다고 생각했죠. 물론 유대 묵시문학에서는 하늘의 7층천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지금 바울이 이야기한 셋째 하늘이란 3층천 하늘이란 말보다 가장 높은 곳의 하늘 곧 하나님이 계신 곳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2절 하반절에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여기에서 ‘나는 모르거니와’가 한 번 나오지만, 헬라어 원문은 두 번 나옵니다.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고,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신다”하는 말입니다. 무얼 말합니까? 바울이 그 경험을 할 때 자기가 육체로 함께 끌려갔는지, 아니면 영혼만 끌려갔는지, 나는 모르겠고, 하나님만 아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영적인 체험은 신비로운 체험입니다. 이것은 지각과 이상을 뛰어넘는 것이죠.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데에는 이처럼 지각을 뛰어넘는 신비로운 일들이 있죠. 그래서 바울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모르겠고, 하나님은 아신다고 고백을 하는 것이죠.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3절에서도 고백합니다.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 경험이 얼마나 신비한 경험인지를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죠. 그리고 4절에 “그가 낙원이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 곧 하나님 나라에 가서 인간의 언어로 표현이 안 되는 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존전에서 신비스럽게 하나님과 대면했을 때에는 인간의 말이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하찮은 인간의 언어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그 전에 다메섹 도상에서 낮 12시에 더 밝은 진리의 빛을 봤죠. 그때 ‘주여 뉘시나이까’ 하고 말이죠. 그때 주님은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하는 그 말을 하셨죠. 그때 더 이상 어떤 말도 바울은 하지 못했죠. 왜죠? 그 예수님의 빛을 확인하는 순간에, 바울에게는 그 어떤 질문도 필요 없게 되는 것이죠. 보는 순간에 모든 게 납득이 되는 것이죠. 주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갈릴리로 가라고 하죠. 그런데 요한복음 21장에 밤새도록 제자들이 그물질을 하죠. 예수님께서 서서 계셨지만 몰랐죠. 그때 오른 편에 던져라, 하죠. 그래서 엄청나게 건져 올렸죠. 그때 ‘주님이시다’하고 뭍에 나왔는데 주님께서 준비한 조반을 먹게 되었죠.? 그런데 ‘감히 묻는 자가 없었죠’. 부활하신 주님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주님과 대면하는 순간 그 모든 질문들이 다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4절에서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이 말은 ‘그 말을 전하는 것이 용인되지 않는다’ 하는 뜻입니다. 주님을 만났을 때 말이 필요 없고,다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주님이 하신 말을 내가 인간의 말로 그대로 전할 수 있다 할지라도, 용인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신비스런 모습으로 터치하신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너 이제부터 세상 것 다 때려치우고 신선노름하자는 뜻이겠습니까? 주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데리고 변화산에 가셨죠.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내려와 휘황찬란한 주님과 이야기하는 모습을 봤죠. 그 신비스런 체험 앞에서 그들은 여기에서 초막 셋을 짓고 살자고 하죠. 그때 예수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내려오셨죠. 그렇다면 왜 그런 신비스런 체험을 하게 하신 것입니까? 이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어진 소명을 감당케 하시려는 것이죠. 바울에게 왜 이런 환상과 계시를 보여주셨는가? 너의 모든 직무를 버려두고 주님과 놀자는 게 아니라,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 앞에 어떤 도전과 위험과 핍박이 와도, 그것을 꿋꿋하게 이기도록 하기 위해 그런 은혜를 주신 것이죠. 그런데 누구든지 그 영적 은혜를 받은 걸 세상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현실에서 주어진 책임보다 자꾸 신비에 빠져들기 때문에 용인되지 않는다, 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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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5절에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이런 사람’이란 2절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또 주님께 이끌려 하나님의 나라에 갔다 온 사람이죠. 그러니까 그 사람을 자랑하는 것은 곧 주님을 자랑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얼마든지 자랑하겠다는 것이죠. 그러나 나를 위해서는, 바울 자신만을 두고서는, 나는 약한 것만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왜죠?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이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그런 사람만 자랑하는 것도 결국은 주님을 위한 것이고, 그런 사람과는 별개로 나를 위해 약한 것을 자랑하는 것도 주님만 자랑하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이래나 저러나 나는 주님만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6절에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내가 신비한 경험 자체를 내가 자랑한다 할지라도,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을 것은, 내가 경험한 것이 참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거짓 사도들이 말한 것은 참말과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주의 환상과 계시는 그들이 만들어낸 환상과 계시라는 것이죠.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이에 대해 새번역은 “그러나 자랑은 삼가겠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내게서 보거나 들은 것 이상으로 나를 평가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천국으로 이끌고 간 것을 내가 상세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면, 주님보다 나를 절대시하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 대해 더 이상 이제는 언급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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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무엇을 일깨워주십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성령의 신비로운 체험을 주시는데, 그것은 그 체험에만 빠지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에서 힘들고 어렵고 고달파도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기꺼이 감당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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