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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플라톤은 이성은 흰 말로 표현했고 욕망과 본능은 검은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인간은 이성의 흰 말이 수레를 끌어야 인생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죠.
욕망과 본능의 검은 말이 수레를 끌면 그 삶은 늘 위태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스토아학파 중에 제논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제자 중에 허영심이 많고 겉치레만 치중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늘 절제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어서 제논이 그를 야단쳤습니다.
그런데 그는 스승에게 그렇게 반문했습니다.
“그만한 돈이 있어서 쓰는데 그게 무슨 잘못이 되겠습니까?”하고 말이죠.
그때 제논은 소금 이야기를 해 줬습니다.
“소금이 많이 있다고 요리사가 요리할 때에 소금을 잔뜩 집어넣어도 맛이 좋단 말이냐?”하고 말이죠.
(깨달음)절제란 그만큼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라 많지만 아끼고 삼가는 걸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그렇게 말씀하죠.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벧후1:5-9)
(적용)우리나라 헌정사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이 집행됐습니다.
고위공직자수사처가 경찰의 협력으로 윤석열 대통령을 내란수괴라는 명목으로 체포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한 번 더 참고 절제했다면 얼마나 좋았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야당이 대통령을 흔들어대더라도 대화와 타협의 끈을 놓치 않았다면 말입니다.
아무리 대통령의 권력이 막강하다고 해도 자기 통제력과 절제력을 상실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추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겠죠.
우리도 마찬가지죠.
아내와 남편 앞에서도, 부모 자식 간에도, 목회자와 성도 사이에도, 모두가 자기 절제력을 잃지 않을 때 모든 공동체가 평안하고 질서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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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고린도전서 11∼14장까지는 공적 예배에 대한 사도 바울의 목회적 답변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는 여자들이 쓰는 예배포와 성찬예식에 대한 답변이 나와 있었죠.
12∼14장까지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답변이었습니다.
그 중에 12장을 통해서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에 대해 바울이 이야기 했습니다.
은사는 방언만 있는 게 아니라 수없이 많은 은사가 있고 그것을 주시는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말이죠.
그런 다양한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개인의 유익도 있지만 교회 공동체를 유익이 훨씬 큰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모든 은사에 앞서는 사랑에 대한 교훈을 이야기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방언은 아무리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고 말이죠.
사랑이 없는 은사와 능력과 지식과 구제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nothing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모든 은사의 토대는 사랑을 기반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가장 문제가 컸던 방언에 대해서 심도 있게 글을 써 내려갔습니다.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돼야 하는데 어리석은 이들은 어린 아이처럼 자기 은사만 내세우고 자랑한다고 했죠.
지난 시간에는 당시 고린도교회의 공적예배 때 수행된 은사들이 있었는데 크게 두 가지로 분류가 되었죠.
방언을 중심으로 하는 은사의 요소와 예언을 중심으로 하는 은사의 요소가 그것이었죠.
찬송시와 가르치는 말씀과 계시는 예언의 요소라 한다면, 방언과 통역을 방언의 요소라 할 수 있었죠.
그런데 바울은 거기에서도 방언보다 예언의 요소를 앞세우고 있었습니다.
왜 그런 관점을 지닌 것이었습니까?
예언이 방언보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있어서 탁월한 은사였기 때문이죠.
방언은 개인적인 유익에 불과하지만 예언 곧 맡은 말씀으로 시대와 상황을 해석해서 성도를 영적인 길로 이끌 수 있다면 그것이 공동체의 유익을 세우는 길이기 때문이죠.
(적용)더욱이 바울은 예언을 중요하게 여겼지만 그걸 분별해서 듣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누가 예언을 하면 두 세 사람이 말하고 곁에 있는 사람이 분별하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만약 정치지도자가 어뚱한 일을 하는데 목회자가 무조건 옹호한다고 하면 잘못된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죠.
그렇게 할 경우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 밖에 되지 않는 것이죠.
선교단체나 기도원에서 진리의 복음과는 달리 이단 사비이 같은 걸 선포한다면 그 역시 사망의 길로 이끄는 꼴이죠.
그만큼 목회자는 기록된 말씀으로 시대와 상황을 바르게 해석해서 성도들이 진리의 길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죠.
(본문)오늘 본문도 예언의 기능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질서와 화평의 차원에서 하라고 권면합니다.
본문 31-33a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깨달음)예언은 모두가 다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다는 것은 예언이 모두에게 열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예언도 다른 은사처럼 모두에게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예언하는 사람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제를 받는다는 것도 자기 통제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에게 붙잡힌다는 것은 결코 자의식을 배제하거나 자기 조절 능력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가 성령 충만한 사람인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기 통제력 속에 있는 사람, 곧 자기 절제의 열매가 있는 사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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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그래서 ‘무질서’라는 헬라어 단어가 ‘아카타스타시아’(ἀκαταστασία)인데 ‘혼돈’(confusion)입니다.
그것과 대비되는 게 ‘화평’인데 ‘화평’을 뜻하는 헬라어 ‘에이레네’(εἰρήνη)는 질서화 조화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만큼 예언하는 자도 자기 의식과 자기 조절 능력을 갖고 절제의 열매가 있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무질서 아니라 화평과 질서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적용)그만큼 우리도 여러 은사를 받아서 타인과 공동체를 세울 수 있다면 너무 좋겠습니다.
그 중에서도 예언의 은사가 중요한데 말씀을 맡은 자가 시대와 상황을 해석해서 성도를 올바른 길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질서하게 자기 자랑만을 늘어 놓든다면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법이죠.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들은 은사를 사모하되 예언의 은사를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중에서도 예언의 은사 곧 말씀을 토대로 시대 상황을 해석해서 지친 자들을 일으켜 세울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그가 속한 모든 단체에서 질서와 조화를 이루며 나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본문2)오늘 본문 33절b-35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원래 성경의 장 절이 없었습니다.
후에 장과 절을 사람이 붙인 것이죠.
구약성경의 장을 붙인 사람은 1228년에 스페판 랑톤이고 신약성경은 1551년에 스페타누스가 장 절을 나눴죠
그래서 33절과 34절의 장 절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한 채 그냥 실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하는 말이 무든 뜻이겠습니까?
여자들에게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죠.
고린도교회에 예언하는 은사자들이 많았는데 바울은 그들에게 설치지 말라는 뜻으로 권면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시대의 상황을 무시하고 그대로 21세기에 적용하려고 한다면 문제가 되는 것이죠.
그만큼 자기 절제력과 자기 통제력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고 여기는데 자기 독점력을 양보하라는 것입니다.
(깨달음)결론적으로 바울은 고린도교회 형제 자매들이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왜 그렇게 권면한 것이겠습니까?
방언이 개인의 경건생활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금하지 말라는 것이고 예언은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사용하라는 것이죠.
다만 적당하게, 보기 좋게, 단정하게, 질서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질서 있게 하라’는 헬라어 ‘탁시스’(τάξις)는 질서라는 뜻과 함께 ‘정배열’(an arranging)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군인들은 그만큼 질서와 정열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진리로 정열된 상태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적용)바울은 11장에서 14장까지 공적 예배에 대한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사람으로서 진리에 장성한 사람이 된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 통제력을 지니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절제할 것을 절제하고 통제할 것을 통제하는 것 말입니다.
그 사람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살아 있는 예배요, 그런 사람들이 교회의 덕을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이 모인 교회가 세상을 밝히는 진리의 등불이 되는 것이죠.
그런 사람이 모인 교회가 세상의 부패를 막을 수 있는 소금과 같은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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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기에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자기 통제력과 절제력을 발휘해 공동체에 유익이 되고 세상을 밝히는 등불로 사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이성의 흰 말이 인생을 끌어야 자기 절제가 가능한데 욕망과 본능의 검은 말이 인생을 끌면 타락하고 망하는 길로 가지 않겠느냐?”
“우리나라 헌정사 최초로 대통령이 체포당하는 일을 겪었는데 대통령이 아무리 권력이 막강해도 자기 절제와 통제력을 잃지 않았다면 저런 불상사는 없지 않았겠느냐?”
“고린도교회의 방언의 은사를 받아 자기 자랑하고 떠벌리는 이들이 있어서 문제였기에 바울이 예언의 기능이 공동체를 유익한다고 말한 것 아니겠느냐?”
“지혜에 장성한 사람처럼 은사에 장성한 사람도 마음 내키는 대로 뭐든 내뱉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이성을 통해 절제력을 발휘하는 이들이 공동체에 유익이 되지 않겠느냐?”
“그것이 교회 공동체에 어지러움이나 무질서를 가져오지 않고 오히려 화평과 질서를 통해 세상의 찬사를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성령님께서 너에게 은사를 주실 때 그 은사가 너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물임을 잊지 않고 늘 겸손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은사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이성의 절제와 통제력을 늘 생각하며 행해야 하지 않겠느냐?”
“너의 은사를 통해 누군가에게 유익과 기쁨이 되고 교회 공동체의 어지러움이 아니라 질서와 조화를 이룬다면 얼마나 성령님이 기뻐하시겠느냐?”
“여자라고 해서 방언을 하지 말라거나 예언의 은사를 사용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교회에서 나대고 떠벌리고 자랑하는 이들을 말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여성이든 남성이든 교회 공동체 모든 이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자기 절제력과 통제력을 갖고 사용할 때 주님이 더욱이 기뻐하실 것이니 말이다.”
(찬양)너 어디 가든지 순종하라 너 어디 있든지 충성하라 주 너의 하나님 왕 되신 주 영원히 주님만 찬양하라
너 무엇하든지 진실하라 너 무엇하든지 성실하라 주 너의 하나님 도우시리 어디를 가든지 정직하라
너 어느 때든지 기도하라 너 어느 때든지 감사하라 주 너의 하나님 돌보시리 너 어느 때든지 기뻐하라
너 고난 속에서 평화하라 너 핍박 속에서 감사하라 주 너의 하나님 함께하리 승리의 주님을 찬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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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 누구든지 자기 통제력과 절제력을 상실하면 그 인생은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욕망의 본능의 검은 말을 좇아 살 것이 아니라 이성의 흰 말을 좇아 절제하며 사는 것이 행복한 인생의 비결입니다.
그것은 권력의 최정점에 있는 대통령은 물론이고 이름 없는 시골 촌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최고의 은사를 주셨어도 그것으로 자랑하거나 으스대지 않고 자기 절제력과 통제력 속에서 겸손하게 사용하는 이들을 주님께서 귀히 여기실 줄 믿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그런 은혜 안에 거하는 2025년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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