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설교열기)(성화)예레미야 27장과 28장은 거짓 선지자 하나냐와 참 선지자 예레미야가 대립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가 어느 시대입니까?
유다 왕 시드기야가 다스리기 시작한 지 4년 5개월 된 상황입니다.
그 시기는 유다가 멸망하기 6년 7개월 전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아직 유다가 멀쩡한 때였구나 하고 생각하기 십사잉죠.
하지만 그 때는 바벨론에게 두 차례나 침공을 당한 때였습니다.
왜 유다 나라가 바벨론에 침공을 당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예언하는 게 참된 예언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긋난 길에 들어서 있으니 심판을 당한다고 예언하는 게 지극히 정상적이죠.
그 길에서 하루 속에 돌아서서 위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래로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말이죠.
그것만이 살 길이라고 선포하는 게 참된 예언자죠.
그런데 하나냐는 어떻게 예언합니까?
하나님께서 남유다를 바벨론의 억압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죠(렘28:2-3)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답게 살지 않고 우상을 좇고 있고 백성들이 사랑과 공의를 좇지 않는데도 잘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면 완전 무당과 같은 자 아니겠습니까?
(깨달음)과연 무엇을 깨닫게 하는 말씀 같습니까?
정치 지도자가 백성을 섬기는 게 아니라 백성 위에 군림하려고 한다면 그 길에서 돌아서도록 하는 게 참된 예언자의 기능이죠.
그런데 그런 지도자를 옹호하고 용비어천가를 부른다면 누가 봐도 거짓된 예언자 아닙니까?
(적용)목회자도 마찬가지죠.
성도가 그릇된 길에 들어 서 있고 하나님 앞에 예배도 드리지 않고 있다면 심판을 선포하며 돌아서도록 예언하는 게 정상이죠.
그런데도 축복만 말하고 복된 것만 말한다면 그를 멸망의 길로 몰아넣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이죠.
그렇기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선교사나 어떤 목회자가 예언을 한다면서 선포할 때 잘 분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분별하지 못하면 이단과 사이비에 손쉽게 빠져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레미야를 좇기보다 하나냐를 따르다가 멸망의 길로 빠지는 것과 똑같은 격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5008532
(역배)고린도전서 11∼14장까지는 공적 예배에 대한 사도 바울의 목회적 답변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는 여자들이 쓰는 예배포와 성찬예식에 대한 답변이 나와 있었죠.
12∼14장까지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답변이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교회에서는 방언에 관해 심각한 문제가 대두되었죠.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을 통해서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은사는 방언 한가지가 있는 게 아니라 수없이 많은 은사가 있는데 그것을 주시는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고 말이죠.
그런 다양한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개인의 유익도 있지만 교회 공동체를 유익이 훨씬 큰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모든 은사에 앞서는 사랑에 대한 교훈을 주었습니다.
사랑이 없는 방언은 아무리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고 말이죠.
사랑이 없는 은사와 능력과 지식과 구제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nothing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모든 은사의 토대는 사랑을 기반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는 고린도교회에 가장 문제가 컸던 방언에 대해서 심도 있게 글을 써 내려갔습니다.
지난 시간에 20-25절까지 살펴봤죠.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어린 아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좇아 살지만 어른은 타인을 헤아리며 살아가는 사람이죠.
그것이 지혜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내에 방언을 자랑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이죠.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은 타인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신앙생활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방언의 은사도 마찬가지죠.
바울은 방언의 은사에 대해서 지혜롭고 성숙한 어른의 마음을 지니며 행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으로 상대방의 유익이 되고 교회 공동체의 덕이 되도록 말이죠.
그렇지 않을 경우 방언이란 마치 앗수르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배하면서 말하는 것과 같은 격이라고 했죠.
그 백성들은 자기네 말을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처럼 말이죠.
지금 고린도교회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그와 똑같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방언보다는 교회 공동체의 유익이 되는 예언을 하는 게 훨씬 낫다고 말한 것이죠.
(본문)오늘 본문 26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깨달음)여기에 나오는 찬송시나 가르치는 말씀이나 계시나 방언이나 통역은 당시 초대교회 예배의 기본요소입니다.
그만큼 고린도 교회가 예배를 통해 다양한 은사들을 누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찬송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유대인들은 회당 예배에서 구약의 시편을 암송했습니다.
그 암송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순서를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15절을 보면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그 말씀을 감안할 때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방언 찬송과 더불어 이성적인 찬송을 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가르치는 말씀’이란 바울이 가르친 ‘교리’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직접적인 계시가 아니라 주어진 말씀을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설명한 것이죠.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계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구속사적 진리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죠.
그 다음에 ‘방언’과 ‘통역’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한다면 공적인 예배 때 행하는 방언은 통역을 해야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죠.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여기에 언급한 방언은 앞에서 언급한 방언 곧 통역이 동반된 방언임이 분명합니다.
(적용)그런 요소들이 당시 고린도교회의 공적예배 때 수행된 은사들이었습니다.
물론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차원이죠.
방언을 중심으로 하는 은사의 요소와 예언을 중심으로 하는 은사의 요소 말이죠.
찬송시와 가르치는 말씀과 계시를 예언의 요소라고 한다면, 방언과 통역을 방언의 요소라 할 수 있겠죠.
그렇다면 바울은 이 구절에서도 방언보다 예언의 요소를 앞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예언이 방언보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있어서 탁월한 은사라는 점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5008532
(원해)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각각’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말 ‘각각’으로 번역된 헬라어 ‘ἕκαστος’(헤카스토스)는 ‘각자’(each)란 뜻입니다.
바울은 은사 가운데 어떤 하나만을 특별하게 강조하거나 주장하지 않은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하나님께 각각 받은 은사 중에 어느 하나만을 배타적으로 강조한 게 아니라는 것이죠.
(원성)바울은 모든 은사에 대해 개방적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읽은 고린도전서 12장 4-6에도 나와 있었죠.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바울은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에 대해 교훈을 준 것입니다.
그만큼 한 가지 특정한 은사에 대해 과도하기 집착하고 자랑하기보다 덕을 세우는 데 사용토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은사를 사랑의 토대로 하고, 오직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데 사용토록 하라고 권장한 것이죠.
만약 사랑이 결여된 은사라면 앞서 말한 것처럼 앗수르 군사가 하는 말을 이스라엘 백성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과 똑같다고 했죠.
(전개)그렇다면 어떻게 덕을 세우기 위해 은사를 사용할 수 있을까요?
본문 27-30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깨달음)누가 방언을 하려고 한다면 동시에 하지 말고 차례로 하라는 것이죠.
거기에는 반드시 통역의 은사가 있는 사람을 대동해서 통역을 하라고 하죠.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다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통역해주는 자가 없으면 공적 예배시에는 공개적으로 하지 말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하라’ 다시 말해 개인적으로 골방에 들어가 하라는 뜻입니다.
또한 누가 예언을 한다면 어떻게 해야 덕을 세우는 일이겠습니까?
둘이나 셋이나 돌아가면서 예언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 예언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 분별할 수 있다는 뜻이죠.
그런데 29절과 30절을 한국의 선교단체에서 문자 그대로 적용하는 곳들이 있습니다.
가령 기도 시간에 하나님께서 계시를 준다면서 말하는 이들이 있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언이란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맡은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계시라는 것은 위에서 직접 내려주는 것이죠.
고린도교회 당시에는 기록된 성경이 없던 시절이라 그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저 사람의 속에서 이야기하는 것인지 성령님의 말씀인지 분별하라는 것이죠.
그런 차원으로 둘이나 셋이 돌아가면서 기록된 말씀으로 해석해 보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변에서 예언의 말씀을 전한다는 목회자나 선교사도 마찬가지죠.
그들이 예언을 한다면서 당장 우리나라를 떠나라고 하거나 집단적으로 해외에 이주한 이들도 있죠.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성도들이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두 세 사람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으로 분별하면 얼마든지 객관화시킬 수 있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누군가 하나님의 계시와 같은 말씀이라면서 엉뚱한 말씀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려 한다면 그게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죠.
바로 그런 차원에서 지금 바울이 하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한 사람만 하지 말고 두 세 사람이 같이 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원해)여기에 ‘분별한다’는 헬라어 ‘διακρίνω’(디아크리노)는 ‘철저하게 분리하다’ ‘식별하다’ ‘판단하다’ ‘의심하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은 누가 전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철저하게 의심하고 따져보고 식별해서 들어야 한다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세상에는 거짓 선지자가 많이 나왔기 때문입니다(요일4:1).
(적용)지금 이단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시기 발바니다.
그들 중 대다수가 교회에 나왔다가 넘어진 자들 아닙니까?
왜 그들이 거기에 가 있습니까?
이단이 참 선지자인지 거짓 선지자인지 아무런 의심 없이 접하고 분별 없이 듣다가 그만 넘어간 것이죠.
거짓 선지자가 어떤 존재입니까?
그들은 불신자만 노리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더 노리는 자죠.
할 수 있으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라도 미혹하는 자들이 거짓 선지자들입니다(마24:24).
그들은 그래서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의의 일꾼으로 가장해서 나옵니다(고후11:14-15).
놀라운 사실은 거기에 넘어간 이들 중에는 교사도 있고 의사 약사 박사도 있고 예전에 목사였던 이들도 있습니다.
무엇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까?
거짓 선지자의 위장술과 언변술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바울은 예언을 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걸 분별해서 듣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죠.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항상 선지자로 자처하는 이들의 말일수록 비판의식과 분별력을 갖고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주일날 담임목사님이 설교하는데 비판하며 꼬투리를 잡고자 설교를 듣는 것은 절대로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그 말씀으로 자기 자신의 자양분을 삼고, 그 말씀으로 하나님을 인생의 기둥으로 삼게 한다면 아멘 하고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이죠.
하지만 선교단체의 선교사나 정치지도자를 떠받드는 황당한 목회자들의 설교를 분별해서 들어야만 거짓 사설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는 것이죠.
만약 지혜롭게 분별하지 못한다면 악한 길로 빠져드는데도 잘 될 거라고 선포하는 하나냐와 똑같은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죠.
이 땅에 정치지도자가 백성을 혹세무민시킨다면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라고 선포하는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가 참된 예언자입니다.
목회자는 기록된 말씀으로 시대와 상황을 바르게 해석해서 성도들이 어긋난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참된 뜻을 순종하며 살 수 있도록 바르게 지도할 책임이 있는 것이죠.
그렇지 않을 경우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 구덩이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5008532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거짓 선지자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베풀어주시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예레미야와 하나냐 중에 누가 참된 예언자인지 너는 분별할 수 있지 않겠느냐?”
“나라와 백성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을 숭배하고 공의와 사랑을 팽계치고 있는데 어찌 심판과 멸망을 선포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런 자녀라면 자식을 몽둥이로 때려서라도 바르게 서도록 하는 게 부모의 심정이지 않겠느냐?”
“그렇듯 고린도교회에서 예언하는 이들을 향해서 바울이 잘 분별하도록 하는 이유가 그것이지 않더냐?”
“예언의 말씀을 잘 분별하지 못하면 자치 이단과 사이비에 빠질 수 있고 멸망의 길도 치닫게 되니 말이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공적인 예배 때 방언을 함으로 인해 공동체의 덕과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골방에 들어가 홀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고린도교회의 상황에서는 기록된 말씀이 근거가 되지 않으니 여기 저기 예언자들이 나섰지만 지금은 기록된 말씀으로 누구나 분멸할 수 있지 않겠느냐?”
“너도 2025년 한 해 동안 성경을 읽으면서 거짓 예언자들의 거짓 사설에 빠져들지 않도록 분별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정치 지도자가 백성을 섬겨야 하는데도 자기 권력으로 백성을 억압하고 있다면 그 길에서 돌아서도록 마땅히 심판을 선포하는 게 그 영혼을 살리는 길이지 않겠느냐?”
“그런데도 이 땅에 목회자나 선교사가 그릇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면 그는 분명 하나냐와 같은 이들이이 거기서 돌아서는 분별력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찬양)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여 어두운 세상을 밝히러 오신 예수여
나의 어두운 맘 속에 들어오셔서 나의 어두운 맘 밝혀주소서
빛으로 오신 예수여 빛으로 오신 예수여
빛으로 오신 예수여 나의 어두운 맘 밝혀주소서
죄악된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여 죄악된 세상을 밝히러 오신 예수여
나의 더러운 맘 속에 들어오셔서 나의 더러운 맘 씻어주소서
빛으로 오신 예수여 빛으로 오신 예수여
빛으로 오신 예수여 나의 어두운 맘 밝혀주소서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2960924
(설교닫기)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시마다 때마다 당신의 선지자와 같은 이들을 통해 당신의 백성을 바른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선지자들 가운데는 하나냐와 같은 거짓 선지자도 많았고 예레미야와 같은 참된 선지자도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선지자를 분별하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도 예언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잘못된 예언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두 세 사람으로 객관해보라고 한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지금의 시대는 기록된 말씀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맡은 이들이 그 말씀으로 시대와 상황을 바르게 분별해서 선포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누군가 어긋난 행위를 하고 있고, 특별히 정치 지도자가 그릇된 삶을 좇고 있다면, 심판을 선포하고 돌아서도록 하는 게 마땅한 선포 아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은 그런 분별력을 갖고 2025년 한 해를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
'수요설교WednesdaySermon > 고린도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14:20-25) (1) | 2025.01.01 |
---|---|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고전14:6-19) (3) | 2024.12.18 |
예언하기를 원하노라(고전14:1-5) (1) | 2024.12.11 |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8-13) (1) | 2024.12.04 |
사랑은 오래참고(고전13:4-7) (2) | 2024.11.2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