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발췌) 이강애 외 여러 사람이 쓴 〈내 삶에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신유정 씨는 충청도에 사는 평범한 아줌마였습니다.
서른이 될락 말락 할 때 노처녀 딱지를 뗀 분이죠.
그녀보다 다섯 살 많은 노총각을 만나 결혼을 했기 때문입니다.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갖는 게 염려가 됐지만 이듬해 아이를 가졌습니다.
10개월 뒤에 그 아이의 산통이 와서 세로로 제왕절개를 해 뱃 속 아이를 꺼냈죠.
그런데 첫째 딸 아이가 젖을 뗄 무렵에 곧바로 둘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둘째를 지우려고 했지만 첫째 아이를 받아준 의사 선생님은 형제는 있어야 한다고 권면을 해서 지우질 않았죠.
그렇게 해서 첫째 딸아이가 17개월 됐을 때 동생이 태어나게 됐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습니다.
큰 아이는 2학년이 되었고 작은 아이는 1학년이 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속이 울렁거리고 자꾸 멀미가 나서 임신 시약 테스트를 했는데 임신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녀와 남편은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이들어 아이를 낳는 것도 힘들고, 키우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그래서 이튿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낯선 산부인과로 가서, 아이를 지웠습니다.
그날부터 그녀는 너무나도 괴로워했고 미친 여자처럼 살았습니다.
새 봄이 됐지만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전히 악몽을 시달렸고, 시한폭탄처럼 늘 불안해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7층에 사는 연우 엄마가 올라왔습니다.
연우 엄마는 마흔의 나이에 늦둥이 연우를 본 것이니, 그녀의 아들과 연우는 같은 또래였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연우 엄마가 카세트 테이프를 놓고 간다고 했습니다.
그 테이프는 교회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였습니다.
처음에는 서랍에 내던졌는데, 자꾸 궁금해서 딸아이 방에 있는 녹음기에 테이프를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씽크대 물소리에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죠.
하지만 그 속에서도 유독 또렷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어지리라.”
그 순간 뭔가 뜨거운 것이 그녀의 가슴을 끼얹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찰나 주방 옆 베란다에서 무언가 ‘쿵’하고 커다른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죠.
나가보니 선반에 엎어 둔 사기 냄비가 깨진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망치로 잘게 부순 듯 가루가 돼 있었죠.
그때 알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그 분이 먹보다 더 검은 살인죄를 눈처럼 희게 만드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퇴근한 남편에게 “내 말이 믿어져?”하고 물었습니다.
“음, 믿어져! 정말 신기해.”
그날 밤 그녀는 악몽을 꾸지 않았습slekl.
꼭 2년만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던 천근된 쇠사슬 뭉치가 사라져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며칠 뒤 연우 엄마를 찾아가 그 날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연우 엄마는 그녀에게 전에 교회 나갔던 적이 있었는지 물었죠.
“중학교때부터 결혼전까지 교회에 다녔어요.”
“하지만 무늬만 기독교인 껍데기였어요.”
그런 자신에게 이런 세계가 있으리라고는, 예수님이 찾아오시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돌아온 주일 아침, 그녀의 온 가족들은 연우 엄마가 다니는 교회에 나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깨달음) 어떻습니까?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의 복음 아닙니까?
그녀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죄의 해방을 누리지 못했다면 어찌 무거운 쇠뭉치가 사라질 수 있었겠습니까?
그녀가 죄악으로 가위를 눌리며 고통속에 살아갈 때 그녀를 해방시켜주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적용) 중요한 것은 오늘도 그런 역사 이 세상 한복판에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은혜를 체험하게 되면 일평생 그 은혜를 잊지 못한다는 사실이죠.
그리고 그 은혜를 통해 그의 신앙도 체험적인 신앙인이 되어 복음의 은혜를 나누는 습관을 갖게 된다는 것이죠.
그녀가 연우 엄마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듯이, 그녀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바로 그것이 믿음의 좋은 습관이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도 그런 은혜를 베풀어주시길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바울은 마게도냐 첫 성읍인 빌립보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곳 빌립보에 자주색 옷감 장사, 곧 상위 1%만 입는 옷의 옷감을 파는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했죠.
그리고 그 집 식구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 집에서부터 빌립보교회가 태동이 되었습니다.
이후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의 귀신을 내쫓은 일로 태장에 맞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죠.
그때 주님께서 일으킨 지진을 통해 바울은 실라와 함께 감옥 간수장이와 그 집식구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죠.
이른바 그 감옥의 간수장 식구들은 빌립보교회의 두 번째 성도가 된 셈이었습니다.
그 뒤에 어떻게 했습니까? 바울 일행은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죠.
그곳에서 악행을 한 것은 없었지만 더 이상 물의를 일으킬 수 없다는 판단하에, 그곳을 떠나기로 작정한 것이었죠.
다만 그때 누가만 홀로 그곳 빌립보교회에 남아 그곳의 성도들을 섬기기로 하고, 나머지 일행은 그곳을 떠났죠.
(본문) 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증언해주는 말씀인데, 1-3절을 다시 읽어보실까요?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깨달음) 바울 일행은 누가를 남겨 둔 채 그 이후의 장소로 옮겨간 것입니다.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서 서남쪽으로 60km떨어진 암비볼리로 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곧장 서남쪽으로 47km떨어진 아볼로니아로 간 것이죠.
이른바 빌립보에서 107km를 걸어 아볼로니아에 당도한 셈입니다.
과연 그 거리가 얼마나 걸리는 거리였을까요?
매일 25km를 걷는다 해도 빌립보에서 아볼로니아까지 4일이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지금 몸이 성성한 상태입니까?
그렇지 않죠. 빌립보 감옥에 갇히기 전에 심한 매질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로 감옥에 들어가 지낸 상태에서 풀려나, 곧장 아볼로니아로 걸어서 온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바울과 실라는 지치고 지친 상태였을 게 뻔합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 일행과 함께 아볼로니아에서 무엇을 했을까요?
저는 그곳을 가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볼로니아를 다녀온 사람들은 아볼로니아 언덕에 사도행전 17장 1절 말씀이 새겨진 동판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추측해 볼 수 있을까요?
바울이 그 일행과 함께 그 언덕에 서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그 상처를 껴안은 아픔을 안고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머물 수 있었는데, 바울은 그 일행과 함께 또 다시 이동을 합니다.
그곳 아볼로니아에서 서쪽으로 57km떨어진 데살로니가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빌립보 성읍에서 두 번째 목적지로 삼은 곳이 데살로니가인데, 그 거리는 164km가 걸리는 거리입니다.
당시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의 행정수도였습니다.
인구가 목포시 정도의 인구 곧 20만명이 살고 있는 당시의 대도시였죠.
B.C.316년 경 마게도냐의 빌립 2세의 사위였던 카산더가 창건한 도시가 그곳이고, 그 아내의 이름을 따서 데살로니가로 명명한 곳입니다.
말하자면 데살로니가는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누이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일행과 함께 데살로니가 도착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본문 1절 하반절에 밝혀주는 것처럼, 그곳 데살로니가는 빌립보와 달리 유대인의 회당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2절 상반절 말씀처럼 “자기의 관례대로” 곧 자기 습관대로 유대인 회당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들어갔죠.
그리고는 “세 안식일” 곧 3주간에 걸쳐 성경을 가지고 강론을 했습니다.
그때 그 성경 곧 구약성경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풀어서 증언하기 시작했죠.
(원해) 오늘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무엇이겠습니까?
본문 2절 말씀에 나와 있는 ‘관례’라는 단어입니다.
이 ‘관례’로 헬라어 ‘에도’(ἔθω)는 실은 ‘습관’(custom)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울은 1차 전도여행 때도 그랬지만 낯선 곳을 가면 어디를 가든지 유대인 회당을 찾아들어가는 습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왜죠? 그곳의 유대인들에게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의 몸에 습관처럼 붙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적용)이 ‘습관’이란 단어를 떠올릴 때 또 한 사람의 ‘습관’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습관이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습관을 갖고 계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는 참된 진리를 일깨워주셨죠.
그리고 제자들과 따로 있을 때는 천국복음을 가르쳐주셨죠.
그리고 예수님께서 홀로 있을 때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습관을 좇아’ 홀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원성) 바로 그 모습이 누가복음 22장 39절에도 나오고 있습니다.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이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십자가를 짊어지기 그 전날 밤이었죠.
그때 제자들과 성찬식을 나누고, 이제 산으로 올라가 기도를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만큼 주님은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어떤 위협을 받을 때마다, 습관을 좇아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바울도 예수님처럼 그 좋은 습관을 좇아, 가는 곳마다,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자 한 것이죠.
(주문)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 주님은 우리가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습관을 좇아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점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오늘 성령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어떤 습관을 갖고 있느냐?”
“너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바울처럼, 예수님처럼,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느냐?”
“바울은 적어도 6일 정도 걸리는 데살로니가에 와서도, 그 피곤한 몸을 이끌고 습관처럼 복음을 전하지 않았더냐?”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습관처럼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매사에, 매 순간 순간에, 예수님처럼 기도하는 습관을 가졌으면 좋겠구나.”
“매 순간순간에, 어떤 환경에 놓이든지, 누구를 만나든지간에, 네 주변 사람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구나.”
“설령 네가 전한 복음을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것은 신경쓰지 말고, 오직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습관을 보여줬으면 좋겠구나.”
“주님은 그런 너를 기뻐하지 않겠느냐?”
(찬양)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 먼 날 볼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 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발췌)서두에서 말씀드린 〈내 삶에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에 나오는 신유정 씨 이야기입니다.
그 분이 아이를 지운 그 죄책감과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이제 주님을 만난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입게 되었죠.
그리고 온 가족과 함께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며, 주님을 온전히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그녀의 집에서 가까운 대학병원에 둘째 할아버지가 입원을 하셨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철저한 불교신자였고, 자기 집 뒷동산에 불당과 같은 거대한 무덤을 지을 정도였죠.
바로 그 할아버지가 병원에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할아버지를 찾아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아세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할아버지는 “하나님? 알지. 부처님이 하나님이여.”
“그럼 혹시 하나님 아들은요?”
“에이. 부처가 아들이 워딨어. 그런 건 읍써.”
그날은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돌아왔고, 다음날 또다시 병원을 찾아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 할아버지는 손사레를 치며, 앞으로는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렇게 찾아갔지만 돌아누워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에는 병원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불편해 견딜 수가 없어서, 다시금 그 할아버지를 찾아 병원에 갔습니다.
그때 그 할아버지는 “어제는 왜 안 온겨?”하고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어제 내가 댕기던 절 스님이 왔었어. 몸땡이가 아파 죽겠다고 했지. 근디 암것도 못하는 겨. 내가 갖다 비친 공양이 얼만디.”
그러자 그녀는 둘째 할아버지를 위해 기도해도 되겠냐고 물었고,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때 그녀는 불쌍한 할아버지를 구원해 달라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할아버지는 내일도 꼭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은 당숙이 와 있어서, 문을 열다 말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 당숙이 붙잡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할아버지가 너만 기다리고 있단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날은 할아버지 몸이 더 안 좋아져서, 병원 지하에 있는 교회로 찾아가 전도사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그래서 그 전도사님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시키는 기도를 함께 드리도록 했죠.
다음날이었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숨을 몰아쉬면서 군대 시절에 배운 찬송가를 부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 할아버지는 천국으로 보내드렸습니다.
(깨달음) 어떻습니까?
자신의 고통 속에 찾아온 주님을 만난 신유정 씨는 그때부터 복음을 전하는 습관을 갖추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 할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 모습이, 어쩌면 그녀에게 습관처럼 자리잡게 된 것이었죠.
처음에는 어렵고, 또 몇 차례 거부당해서 어려웠지만, 그녀는 끝내 포기하지 않고, 주님의 복음,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자 한 것이죠.
이것이 어찌 그녀의 의지대로만 된 일이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그런 습관을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하신 것처럼, 신유정 씨에게도 주님께서 그런 습관을 불어넣으신 것이었죠.
(적용) 주님은 우리에게도 그런 습관을 불어넣기를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내음성) 그렇기에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도 바울을 닮고, 신유정 씨를 닮아 누구에게든지 복음을 전하는 습관을 갖게 해 주세요.”
“제 의지나 제 능력으로는 너무나 연약하기에,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기도하는 습관 복음 전하는 습관을 갖게 해 주세요.”
“바울이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에 와서도, 그 피곤한 몸을 이끌고 회당을 찾아 복음을 전했어요.”
“저도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어떤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습관을 갖추게 해 주세요.”
(찬양)내가 건너야 할 강 거기서 내 죄 씻겼네 이제 주의 사랑이 나를 향해 흐르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 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로 물든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제물 삼아주셨습니다.
그 사랑의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가 된 것이죠.
바울도 그 사랑을 알기에, 신유정씨도 주님의 그 사랑을 알기에, 만나는 사람이 누구든지 복음을 전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습관보다 이 세상에 가장 귀한 습관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때를 얻은지 못 얻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그 귀한 습관을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주님께서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 귀한 습관을 저와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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