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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WednesdaySermon/사도행전

위로하고 가니라(행16:35-40)

by 똑똑이채널 2021.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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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감옥의 바울과 실라 http://www.traditionalvaluesuntraditionalmind.com/2018/02/lessons-from-philippian-jail.html

 

(설교열기)(예화)별세목회로 널리 알려진 이중표 목사님이 있습니다.

지금은 천국으로 별세하셨지만, 한때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제일 큰 교회를 섬긴 분입니다.

그분은 어렸을 적 너무나 가난해 초중고 12년 동안 한 번도 도시락을 싸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배가 고프면 우물가로 달려가 물로 배를 채운 후 잔디밭에 드러누워 하늘을 쳐다보며 살았죠.

 

그분이 18세 한창 때에 그만 폐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습니다.

그때 피를 토하며 쓰러져 폐병 3기라는 진단을 받았죠.

당시 3-6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고 죽음을 생각하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위로하고 가니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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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친구 하나가 부흥회에서 혹시 네 병이 나을지도 모르잖아하는 말에 4km 떨어진 교회로 나갔죠.

부흥회 때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살려만 주신다면 믿겠습니다.”하고 고백을 했습니다.

놀라운 건 6개월간의 새벽기도회를 통해 그의 뚫렸던 폐의 구멍이 막히고 각혈이 멈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죠.

 

그 후 서울의 여러 신학대학을 살펴보던 중에, 민족복음화를 위해 한국신학대학이 들어갔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그 분은 동학혁명발상지 고부교회에 부임했습니다.

그 교회의 정 집사님이란 분이 있는데, 그 분은 초등학교 교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신가정으로 시집을 갔죠.

시아버지는 사사건건 며느리를 못마땅해했꼬, 교회에 다닌다고 손찌검까지 해댔다고 하죠.

그런데도 정 집사는 매를 맞으며 교회에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시아버지가 노인정을 다녀오다가 중풍을 맞고 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그때 정 집사는 정성으로 시아버지의 병 수발을 들었죠.

그런데 얼마 뒤에는 시아버지는 치매로 대소변까지 못 가렸습니다.

시아버지는 벽에 똥칠을 하고 여기저기 소변을 봐놓기 일쑤였고, 방 안이 똥냄새로 진동을 하는 거죠.

 

그럴 때 보통 사람 같으면 그 일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정 집사는 일단 집에 들어서서 무릎부터 꿇었습니다.

그 악취 속에서도 5분간 간절히 기도를 드린 것이죠.

주님 이 여종을 별세시켜주옵소서 별세시켜주옵소서.”

신기하게도 그렇게 기도를 드리고 나면 똥 오줌의 악취도 장미향기로 변한다고 합니다.

더욱이 며느리를 구박하던 시아버지도 불쌍한 마음이 들고 사랑스럽게 보였다고 하죠.

그렇게 여기저기 널린 똥오줌을 불평하지 않고 청소하면서 정성을 다해 시아버지의 병수발을 들었죠.

 

그 뒤 세월이 흘러 시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이중표 목사님이 앉아 있는데, 정 집사님 남편이 이 목사님에게 다가와 그렇게 말했죠.

목사님 저는 정말 존경하는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

뜬금 없는 말에 이중표 목사님은 내심 자신을 존중한다고 한 줄 알고, “, 하며 하며 기다렸죠.

목사님 저는 별세의 사람을 한 사람 알고 있는 데요. 그 사람에게 절을 하고 싶습니다.”

별세라는 그 말에 이중표 목사는 더욱 기가 올라갔습니다.

여태껏 자신이 외치고 가르쳤던 말이었기 때문이죠.

목사님. 제 집사람 정 집사는요. 정말 별세의 사람이에요. 저는 그 사람에게 절을 하고 싶습니다.”

그때서야 그간의 사정을 알게 되었고,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중표 목사님도 남편과 함께 정 집사를 향해 절을 하려고 했는데, 도망을 쳤다고 하죠.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아무리 구박하고 힘들게 해도, 그리스도인의 자리는 믿음의 자리라는 점이죠.

시아버지가 힘들게 해도, 정집사님은 믿음의 자리를 지키며, 오히려 시아버지의 병수발을 다 든 것이죠.

 

그런 모습 앞에 어찌 남편이 감탄하지 않겠으며,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남편도, 이중표 목사님도 절을 하려고 했던 것이죠.

 

위로란 그 곁에서 함께 아픔도 괴로움도 참고 돌봐주는 것, 그것이 참된 위로이지 않겠습니까?

 

(적용)지난 주에 말씀드린 김양재 목사님도 그런 아내의 자리, 며느리의 자리를 지키지 않았습니까?

결혼 5년만에 그녀는 집을 뛰쳐나갈 정도로 힘들고 모진 시집살이를 했죠?

 

그러나 기도원에서 주님을 만난 후에, 자신이 처할 자리는 남편을 구원하는 자리임을 깨달았죠.

강남부잣집에서 피아노도, 돈도, 쇼핑도 맘대로 못해도, 남편과 가정의 구원을 위한 자리가 주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의 자리임을 깨달았죠.

 

그렇게 구박받고, 언어폭력 받으면서도, 남편과 시댁을 위해 섬긴 그녀의 삶이 위로요 격려가 됐을까요?

비록 자기 자신은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그 눈물이 남편과 시댁어른들의 마음을 녹이는 계기가 됐겠죠?

 

오늘 우리 자신들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내가 내세울만한 거나 자랑할 만한 게 없어도, 믿음의 자리를 통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것, 중요하죠.

그것이 거룩이요,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부여하신 사명이기 때문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역배) 바울과 실라는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의 귀신을 내 좇아준 일로 빌립보 감옥에 갇히고 말았죠.

그러나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기도와 찬송으로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받아들였죠.

그런데 한 밤 중에 주님께서 지진을 일으켰고, 옥문이 열렸고, 바울과 실라의 차꼬까지 풀렸죠.

 

그때 그 감옥을 지키는 간수장이 자결하려고 하자, 바울과 실라는 우리가 여기 있소하고 말했죠.

그러자 간수장은 불을 들고 안쪽으로 들어가봤는데, 그 둘이 아무렇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걸 봤죠.

그때 그 간수장은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말했죠.

바울은 주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 가족이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하고 말했죠.

 

그때 간수장은 바울과 실라를 집으로 초대해 온 식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죠.

이후 발도 씻도록 하고, 음식까지 정성스럽게 베풀었죠.

 

그 일로 모든 사람들이 기뻐했죠.

그때의 기쁨은 간수장이 승진하거나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었죠.

이 세상에서 썩지 아니할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 때문에, 모두가 함께 기뻐했던 것이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기뻐해야 할 가치도 바로 영생을 얻고 누리는 삶의 기쁨입니다.

 

(본문) 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전해주는 말씀인데, 본문 35-36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날이 새매 상관들이 부하를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

간수가 그 말대로 바울에게 말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

 

(깨달음) 날이 샜는데, 상관들, 곧 최고 지휘자가 부하를 보내서 바울과 실라를 내 보내라고 한 것이죠.

그렇다면 전 날 어떤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그 전날 밤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렸을 때, 바울과 실라는 간수장과 그 집 식구들에게 복음을 전했죠.

그리고 세례를 베풀었고, 모두가 함께 음식을 먹으며, 구원의 기쁨을 나눴죠.

 

그리고는 어떻게 한 것입니까?

그날 밤에 다시금 감옥으로 되돌아온 것이죠.

그리고 날이 새서, 바울과 실라를 풀어주도록 한 것입니다.

 

그날 밤 바울과 실라가 달아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깨달았던 것이죠.

그 감옥 속에 다시금 들어와 있는 것이, 그 간수장을 위로하는 것이고 격려하는 것임을 알았던 것이죠.

 

그래서 지금은 간수장이 바울과 실라에게, 기분 좋게, 나가라고, “이제는 평안히 가세요.”하는 것이죠.

 

(본문2) 그런데 본문 37-39절을 보면 바울과 실라가 기분 좋게 나가는 모습이 아님을 알 수 있죠.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

부하들이 이 말을 상관들에게 보고하니 그들이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그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바울은 그냥 나가지 않고, 우리는 로마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당시에 로마 사람은 함부로 옷을 벗겨 때리는 법이 없었죠.

절차에 따라 심문을 하고, 또 변호인도 고용해서 항변을 하고, 판결을 한 후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게 돼 있었죠.

바로 그 점을 바울이 지적하면서, 왜 우리가 로마 사람인데, 당신들은 적법한 심문도 없이, 사람을 때리느냐, 하고 항변한 것입니다.

 

과연 왜 바울이 로마 사람인 것을 내세웠을까요?

사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자기가 율법학자인 것도, 로마 사람인 것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1차 전도 때도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지역에서 매를 맞고, 심지어 죽을 고비도 넘겼죠.

그때마다 바울은 로마 사람임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차 전도여행인 지금 빌립보에서 자기 자신이 로마 사람인 것을 주장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곳 빌립보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고린도가 있고, 그곳에서 배를 타고 가면 로마로 이어지기 때문이죠.

바꿔 말해 자신의 최종 복음전도의 목적지를 로마로 정해야겠다는 생각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온 것이죠.

 

그만큼 바울은 자기 의나, 자기 능력이나, 자기 신분을 자랑하려고 한 게 결코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살든지 죽든지, 그의 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는 걸 목적으로 했죠.

바로 그런 차원에서 로마인이라고 이야기를 한 것이었습니다.

 

(적용)어떻습니까?

우리의 삶도 그와 같아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중표 목사님도 한국민족을 구원하는 도구가 되겠다고 한국신학대학에 갔지만, 고부로 내려와 섬긴 것도 그런 모습이죠.

고부교회의 정집사님이 그 당시 학교 선생님이었다면, 너무나 뛰어난 분 아닙니까?

하지만 시아버지의 학대와 괴롭힘을 감내하고, 중풍으로 쓰러진 분까지 다 섬긴 모습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모습이야말로, 그 신분과 사회적인 위치를 자랑으로 여기는 게 아니었죠.

오히려 살든지 죽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려는 목적, 가정의 구원을 위한 목적의 삶이었습니다.

 

(주문)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 주님은 우리의 모든 신분과 위치 속에서 오직 복음을 위한 삶을 살도록 하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지금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나는 네게 가정이나 일터나 이 사회에서 믿음의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느냐?”

고부교회 정집사님도 시댁의 온갖 핍박과 중풍으로 쓰러진 시아버지를 극진히 돌보며 섬기지 않았더냐?”

바울과 실라도 그 간수장의 집 식구들을 온 믿음으로 섬기며 주님의 복음을 전하지 않았더냐?”

그날 밤 감옥을 벗어날 수도 있었지만, 그 간수장을 위해 스스로 감옥에 들어온 것 아니더냐?”

더욱이 바울은 로마 사람인 것을 밝혔는데,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함이 아니라 복음의 목적지를 바라본 것 아니었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이제부터 먹든지 마시든지, 살든지 죽든지 오직 너의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구나.”

네 곁에 누군가를 바울과 실라처럼 위로해주는 삶으로, 네 곁의 동료를 정집사처럼 돌보고 사랑으로 품는 삶 말이다.”

그런 삶이야말로 신실한 믿음의 삶이요, 그런 삶을 통해 주님께서 영광받지 않겠느냐?”

 

(찬양)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의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 되기 원합니다

 

(전개) 그런데 오늘 40절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원해)무엇을 깨닫게 되는 말씀입니까?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왔다는 말씀은 바울과 실라가 옥에서 나왔다는 말씀이죠.

그래서 어디로 향한 것입니까?

루디아의 집, 곧 빌립보교회를 이루고 있는 그 집이죠.

그곳에 들어가 형제들, 또 자매들을 위로하고 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가니라하는 헬라어 엑제르코마이’(ἐξρχομαι)3인칭 복수입니다.

3인칭이라면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 그들 네 사람을 말하는 것이죠.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들어가 있다가 풀려나기전까지는 디모데와 누가는 감옥 바깥에 있었던 거죠.

그러다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는 그들 모두가 루디아의 집, 곧 빌립보교회에서 모두가 위로하고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다음 장인 171절도 3인칭 복수가 주어인데, 뭐라고 나옵니까?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여기에 그들이라는 기록은 여태껏 우리에서 그들로바뀐 것을 말합니다.

우리란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를 말하는 것이고, ‘그들이란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를 뺀 나머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빌립보를 떠나갈 때, 누가는 그곳 빌립보에 남았다는 뜻이 되는 거죠.

그래서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렀다하는 기록을 남긴 것이죠.

 

(깨달음)그렇다면 왜 누가는 그곳 빌립보에 홀로 남았겠습니까?

물론 이 후에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서 3년간 복음을 전하는 중에 막판에 빌립보에 옵니다.

바로 그때 성경의 기록은 또 다시 우리라고 바뀌지만, 오늘 본문부터는 그들이라고 쭉 기록하죠.

 

어찌됐든 누가는 그곳에 왜 홀로 남았겠습니까?

그곳 빌립보교회 성도를 위로하고 격려해주기 위함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죠.

그 당시 유럽의 첫 번째 교회였고, 여러 모로 복음의 씨앗, 복음의 모판과 같은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회 성도들을 위해 바울이 누가에게 부탁해, 홀로 남아 돌봐주도록 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아파하면 함께 아파하고, 누군가 몸이 아프면 의사인 누가가 돌봐주도록 말이죠.

 

(예화)서두에서 말한 이중표 목사님이 고부교회에서 이제 옥구교회로 임지를 옮겼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이미 두 패로 나뉘어 있어서, 부임하고서 한 달 넘게 사랑해야 한다고 설교를 했죠.

그 중에 한 권사님은 언제나 자신의 목회 심방길에 동행을 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60세가 넘었지만 이중표 목사님의 발걸음을 잘 따라잡는 분이셨습니다.

더욱이 심방 때마다 그 권사님은 점심 도시락을 싸와서 목사님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셨죠.

 

그러던 어느 날 그 권사님이 폐렴에 걸렸습니다.

감기가 들었는데도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바람에 폐렴이 진행된 것이었죠.

그 권사님은 치료를 위해 군산 시내에 있는 딸 집으로 가야 했습니다.

초등학교 교사이던 딸의 극진한 병구완 덕에 봄이 되자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때 권사님은 당장 교회에 가겠다면서 성화를 부렸습니다.

얘야 나 이제 교회 갈란다. 다 나았으니 지금 당장 교회가야겠다

아이고, 엄마 무슨 소리예요. 지금 밤공기가 찬 데 가더라도 내일 가세요.”

딸의 만류에도 그 권사님은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니다. 난 목사님 곁으로 가야지 이대로는 못 살겠다. 난 목사님을 봐야 할지. 안 그러면 못 산다.”

어머니의 고집에 딸도 어쩔수 없어 짐을 챙겨 들고 같이 집을 나섰습니다.

엄마, 그럼 몸 조심 하세요

딸은 엄마가 못내 걱정이 돼서 택시를 잡아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택시를 타는 것이 부의 상징이던 때에, 그 권사님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습니다.

야야. 아기 운다. 빨리들어가 봐라. 택시는 내가 알아서 탈테니 차비나 좀 주고 가려무나.”

딸에게 택시비를 받은 그 권사님은 서둘러 골목을 돌아나왔고, 그 돈으로 약국에 가서 피로회복제 한 통을 샀습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8km를 걸어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교회에 돌아온 그 권사님은 사모님을 만나 피로회복제를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모님. 이거 목사님께 드리세요. 저는 요 목사님께 제 살을 깎아 드려도 아까운 게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은 이것밖에 드릴 게 없네요.”

그때 그 목사님이 그걸 받아들었는데, 도저히 눈물이 나서 마실 수가 없었다고 하죠.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이중표 목사님이 그 후에 관악교회로 갔다가, 다시 개척을 해서 한국장로교회 중에 가장 큰 한신교회를 목회했는데, 그 비결이 거기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이름없이 빛도 없이 목회자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권사님 같은 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 말이죠.

 

바울이 어떻게 위대한 목회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유럽의 첫 번째 교회인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가는 곳마다 위대한 헌신의 사역을 감당한 교회였습니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바로 누가와 같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위로자요 격려자가 있었기 때문이죠.

누가는 그저 성도들 곁에서 동행하며 위로자요 격려자로 살았다면, 그 너머에 성령님 곧 파라클레토스이신 성령님께서 참된 위로와 격려를 베푸신 것 아니었겠습니까?

 

(적용) 우리도 마찬가지죠.

내가 주님을 위해 나의 동료에게, 나의 성도들에게, 나누고 베푸는 그 위로와 격려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더욱 크고 놀라운 위로와 격려가 되게 하신다는 것 말입니다.

 

제가 우리교회에서 목회할 수 있는 것도 우리 권사님같은 위로자요 격려자들이 있기 때문이죠, 그것을 성령님께서 친히 역사하고 위로로 사용하시는 줄 믿습니다.

 

(내음성)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주님, 그래요, 나는 한 없이 작고 연약한 자예요.”

하지만 주님 나라와 교회를 위해 나의 작은 것을 섬기고 나누고 베풀 때, 성령님께서 그것을 큰 위로와 격려로 역사하시는 줄 믿어요.”

이중표 목사님에게 그 권사님이 아픈 몸으로 8km가 넘는 길을 마다않고 피로회복제를 가져왔을 때, 주님께서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로 사용하셨겠어요.”

바울 일행이 누가에게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위로자와 격려자로 남겨 놓을 때, 그 순종함을 통해 성령님께서 더욱 크신 역사와 위로를 베풀어주신 줄 믿어요

주님, 제가 저의 동료에게, 저의 성도들에게, 나누고 베푸는 삶을 성령님께서 더욱 큰 위로로 사용해 주실 줄 믿어요.”

 

(찬양)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의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 되기 원합니다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그 위로와 권면을 우리를 통해 일하시길 원하시는 주님이시죠.

비록 내가 누군가를 위해 베푸는 사랑과 섬김과 위로는 작아도 성령님이 사용하시면 놀라운 역사와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법이죠.

 

이중표 목사님이 이중표 목사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별세의 삶을 산 정집사님과 그 권사님같은 분이 있었기 때문이죠.

바울이 바울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누가와 같이 빌립보교회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위로하고 권면하는 삶을 산 이들이 있끼 때문이죠.

 

비록 우리가 작고 연약할지라도, 주님을 위해 누군가를 섬기고 위로하며 살 때, 성령님은 그를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실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은혜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전자책] 눈을 뜨면 볼 수 있어요

2020년 한 해 동안 코로나19로 인해 너무나 답답했다. 지금도 그게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고 모든 게 답답하기만 하다. 청년들도 꿈을 꿀 수 없는 상태다. 초등학생

www.ala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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