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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WednesdaySermon/사도행전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행17:3-4)

by 똑똑이채널 2021.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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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에 세워진 승리의 기념물 '갈렐리우스의 기둥' https://www.worldhistory.org/Thessalonica/

 

(설교열기)(성화)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합 왕에게 직선적으로 전하고 선포한 왕이죠.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라고 말이죠.

그때까지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왕궁의 지원 속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먹이고 입혔죠.

 

그걸 내려놓거나 포기하지 못할 때,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850명과 갈멜산에서 대결을 벌였죠.

제단을 쌓고 나무를 올려놓고 번제물을 올리고, “바알 신이여, 아세라 신이여하고 오전부터 오후 무렵까지 소리쳤죠.

심지어 자기들 몸에 피를 흘려, 그 피를 바알과 아세라에게 바치면서 제단에 불을 내려달라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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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엘리야는 무너진 제단을 다시 쌓도록 했고, 그 제단 주변에 도랑을 파서 물을 왕창 부었죠.

왜냐하면 하늘에 불이 임했을 때 누군가 성냥으로 붙인 것 아니냐는, 그런 이야기가 아예 못 나오도록 하기 위함이었죠.

그때 엘리야는 하나님께 불을 내려달라고 간구하고 기도했죠.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하면서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서 그 번제물을 모두 태웠고, 도랑의 물도 완전히 핥아서 없애주셨죠.

마치 홍해의 강물을 갈라 마른 땅처럼 통과하게 해 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와 같은 놀라운 소식이 어디에까지 전해졌겠습니까?

그 당시 디셉 사람 엘리사에게까지 전해졌겠죠.

더욱이 엘리야는 3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아 가물었던 그 땅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를 내리게 하는 통로가 됐죠.

그러니, 그런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나타났을 때, 엘리사가 어떻게 했습니까?

엘리사는 자기가 밭을 갈던 기구들을 불태워서 소를 잡아 동네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고 그 길로 엘리야를 따랐죠.

 

(깨달음)그런데 만약 엘리사가 자기 능력만 믿고, 자기 가진 것만 의지하는 사람이었다면 과연 엘리야를 따랐을까요?

결코 그렇지 못했을 것입니다.

적어도 엘리사는 어린 꼬마들이 대머리여, 대머리여할 정도로 놀려댄 것으로 봐서, 엘리사는 못 생긴 외모를 지녔죠.

그와 같은 자기 결핍, 자기 부족함을 인식하고 있던 엘리사였기에, 기꺼이 엘리야를 스승으로 모시고 따라나설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적용) 이것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제자들을 부를 때도 다르지 않는 모습이죠.

그 당시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숫가의 제자들을 부르실 때 처음 찾아와서 부르신 게 아니었죠.

얼마 동안 갈릴리 주변을 다니면서 병자도 고쳐주시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을 돌보는 삶을 사셨죠.

당연히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흘러들어갔고, 그때 비로소 12명의 제자들을 차례로 부르신 것이었죠.

 

그때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도, 요한과 야고보 형제도 마찬가지였죠.

너는 나를 따르라.”할 때, 그들 역시도 자기 결핍, 자기 부족함을 알고 있었기에, 참된 구원자이신 주님을 따라나설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가항력적인 부르심 아니겠습니까?

그런 부르심, 그리고 그렇게 제자로 따라나선 모습은, 바울도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이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을 향한 주님의 부르심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 누가를 남겨둔 채 데살로니가로 떠나왔습니다.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까지 서남쪽으로 164km걸리는 거리요, 당시의 걸음으로 적어도 6일 이상은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물론 바울과 실라는 온전한 몸이 아니라 이미 태장으로 매를 맞은 상태로서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했습니까?

바울은 자기 관례, 곧 자기 습관을 좇아 유대인 회당을 찾아 복음을 전했죠.

빌립보는 유대인 회당이 없어서 시냇가를 찾아 기도하고자 했는데, 그곳에서 만난 루디아 여사장에게 복음을 전했죠.

그것으로 루디아의 집에서 빌립보교회가 탄생했고, 곧이어 태장에 맞아 감옥에 들어간 그 간수장 식구들이 2호 교인이 되었죠.

 

그런 빌립보와 달리 마게도냐의 속주였던 데살로니가는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도시였죠.

당시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의 행정수도였습니다.

당시의 인구가 목포시 인구와 맞먹는 20만명이 살고 있는 대도시였죠.

B.C.316년경 마게도냐의 빌립 2세의 사위 카산더가 창건한 도시로서, 그 아내의 이름을 따서 데살로니가로 명명했죠.

말하자면 데살로니가는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 누이의 이름이었습니다.

 

그곳의 유대인 회당이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수많은 유대인들이 그곳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유대인 회당을 찾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세 안식일에 걸쳐”, 다시 말해 3주 동안에 걸쳐 그 회당을 찾아 주님의 복음을 전했던 것이었죠.

 

(본문)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본문 3-4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원해) 여기에 누가 등장합니까?

바울이 들어가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한 그곳은 유대인 회당입니다.

유대인 회당은 유대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죠.

 

그런데 여기에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귀부인들, 곧 상류층 헬라 부인들도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이 무엇입니까?

유럽 대륙의 데살로니가 지역 사람들 중에, 다시 말해 유대인이 아닌 이방 사람들 중에 유대인으로 개종한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중에 상류층 귀부인들도 유대교로 개종을 한 상태였습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바울과 실라를 따랐다는 거죠.

 

여기에서 우리말 따랐다”, 바울과 실라를 따르다하는 헬라어 동사 프로스클레로우’(προσκληρω)입니다.

그 뜻은 단순히 따르다’, ‘믿다’, ‘받아들이다하는 뜻을 넘어서서 결합하다’(consorted)는 의미입니다.

일명 배우자가 되다는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산 그 삶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마치 엘리사가 엘리야를 스승으로 모시고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함께 먹고 자고 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죠.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까?

유대인 회당에서 주님의 복음을 전해들은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이 그때부터 바울과 실라와 함께 삶을 나누었다는 의미죠.

마치 예수님을 따라나선 제자들처처럼, 엘리야를 따라나선 엘리사처럼, 데살로니가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이 그런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까?

그 헬라인들과 상류층의 귀부인들은 외적으로는 가진 게 많고, 유대인들에 비하면 변방인이 아닌 주류의 사람들이었죠.

그런데도 그들이 유대교에 들어온 것은 실은 하나님을 믿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그들입니다.

그러나 그곳의 유대인 회당에서 구원의 교리를 들은 것은 예수님과 무관한 구약의 율법주의 구원이었죠.

 

하지만 바울이 전한 예수님의 구원은 십자가와 부활의 구원이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은 외적인 자랑거리나 자신이 가진 것, 자신이 지킨 행위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 값없이 베푸신 사랑이었죠.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구원입니다.

그렇기에 그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이 주님을 따라사는 삶을 결단했다는 것은 그들 속에 있는 결핍과 부족함을 깨달았던 것이었죠.

 

(적용)이 세상에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으로 모실 수 있는 것입니까?

자신이 죄인이라는 자기 결핍, 자기 부족함, 자기 연약함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사람만 주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것이죠.

자기 힘과 능력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결코 주님의 구원을 갈망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만큼 자기 부족함과 자기 연약함을 깨닫고 사는 자에게 오히려 주님의 크신 은혜와 구원이 임하는 것이죠.

 

(주문)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죠.

(은혜)주님은 우리 속에 있는 결핍, 부족함, 연약함을 깨닫게 하셔서 더욱더 크신 은혜와 구원을 베풀어주신다는 거죠.

 

(주음성)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하나님은 지금도 자기 결핍, 자기 부족함, 자기 연약함을 인정하며 사는 자들에게 부르심의 은혜를 베풀지 않더냐?”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엘리사를 부를 때, 그가 어떤 마음과 형편이었는지 너는 알고 있지 않느냐?”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어부 출신 제자들을 부를 때, 그들이 어떤 형편과 처지였는지 너는 알고 있지 않느냐?”

데살로니가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을을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 부를 때 그들이 왜 따라살았는지 알 수 있지 않느냐?”

그들은 모두 자기 결핍, 자기 부족함, 자기 연약함을 알고 있기에,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산 것 아니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네 속에 있는 결핍과 부족함과 연약함을 인정하고 주님을 모시며 살고 있느냐?”

누구든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자는 넘어짐의 앞잡이인데, 그런 마음 속에 주님께서 함께 하는 것은 아니란다.”

지금도 자기 결핍과 부족함과 연약함을 아는 자에게 더욱 큰 은혜와 구원의 손길을 베푸시는 주님이시지 않겠느냐?”

엘리사를 부를 때도, 갈릴리 어부 출신의 제자들을 부를 때도, 데살로니가 헬라인들과 귀부인들도 마찬가지였지 않더냐?”

주님은 네 안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고백하며 주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너에게 어찌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겠느냐?”

 

(찬양) 기도를 멈추지 마라 눈앞의 상황이 마음을 눌러도

원망치 마라 너의 입을 지켜라 저들은 너의 입을 보고 있다

마음을 뺏기지 마라 내가 널 도우지 않는단 소리에

너의 모든게 모든게 불리해도 너는 기도를 계속해라

너 기도를 멈추지 마라 내가 너의 그 모든 상황을 바로 역전시키리니

너 기도를 멈추지 마라 내가 잠시도 쉬지 않고 모든 걸 지켜보고 있으니 바로 역전되리라

 

(발췌) 대의그룹 채의숭 장로의 하늘경영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채의숭 대의그룹 회장이 있습니다

그의 고향은 충청도였는데, 공부를 열심히 해서 건국대 4년 장학생이 되었습니다.

졸업한 후에는 삼성그룹 공채 8기로 1966년에 입사해 67개월간 근무를 했죠.

 

당시에 그는 삼성에 들어갔지만 자기 고향이나 아는 대학의 선배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입사 후 다른 동기들은 다 발령이 났는데 그 자신은 그렇지 못한 형편이었습니다.

그때 그가 느낀 것이 있었습니다.

삼성이 이토록 텃새가 심한 곳이었나, 하는 생각이었죠.

 

그래서 사표를 던져야 하나 싶었고, 그때 화장실에 잠시 앉아 묵상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계속 이 회사를 다녀야 합니까?”

그런데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감동을 주신 음성이었죠.

너에게 더 좋은 일이 주어질 것이다. 기다려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보타 30분 먼저 출근하고, 30분 늦게 퇴근하거라.”

 

그때 는 주님의 그 은혜로운 음성을 좇아 곧바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남들보타 아침에 30분 일찍 출근해서 모든 것들을 준비해놓았고, 남들보다 30분 늦게 퇴근해서 모두 정리하고 집에 갔죠.

그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중요한 일을 맡게 된 그였습니다.

그는 그것을 ‘30분 성공철학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자기 결핍, 자기 부족함과 연약함을 주님 앞에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였던 것이죠.

 

(발췌2) 최병락 목사의 부족함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대한민국 제 1호 커뮤니케이션 박사학위를 받은 분이 있습니다.

바로 KBS 김은성 아나운서가 그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TV방송국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하게 된 사연은 너무나 은혜롭습니다.

그날 그토록 준비하고 기다리던 아나운서 시험 면접날이 됐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입이 돌아가 버리는 구안와사에 걸린 것이었죠.

아나운서의 생명이 말하는 것과 얼굴 표정인데, 얼굴이 한쪽으로 돌아가버린 구안와사는 치명적이었습니다.

발음이 새고 표정이 일그러진 사람을, 과연 누가 뽑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그날 면접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그는 고민 끝에 그 면접에 나서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떨어질 것을 각오하고, 그토록 떨리는 마음을 안고 대기실에서 기다렸죠.

드디어 그의 차례가 되어서 면접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을 본 3명의 면접관들은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면접관 대표가 얼굴에 대한 사연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구안와사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했죠.

 

그러자 그 면접관 대표가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자네는 그 얼굴을 하고 어떻게 아나운서가 되려고 생각했나?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해도 아나운서의 생명은 자기 관리인데 말이야.

자기 관리가 그렇게 소홀해서 얼굴이 돌아갔다면, 뉴스를 진행하다가 얼굴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보장을 어떻게 하겠나?”

 

그렇게 말하면서, 이제 불합격 판정을 내리려고 했습니다.

그때 그는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이렇게 담대하게 말했다고 합니다.

지금 일시적으로 제 얼굴이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이 얼굴은 조금만 지나면 정상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면접관님들도 인생에서 어려운 순간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때 포기하셨더라면 오늘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가 얼굴이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까지 포기하지 않고 나왔다면, 얼마나 사명감이 투철했으면 그랬겠습니까?

뽑아 주신다면, 정말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 KBS아나운서에 뽑혔다고 합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그날 면접관 중에 가장 상관인 가운데 분이, 마음속에 잊혀진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고 하죠.

자신이 그 방송국에서 처음 입사 시험볼 때, 자신도 구안와서에 걸렸던 것 말입니다.

그것이 생각나서, 입이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당돌한 그 젊은이의 가능성을 보고 최고 점수를 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옆에 있던 면접관들도 당연히 그 리더를 따라 최고 점수를 줘서 합격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깨달음) 어떻습니까?

이와 같은 부족함이, 때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소통의 도구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채의숭 장로도 그 젊은 시절에 삼성에 들어갔을 때, 자기 결핍과 부족함을 놓고 주님께 간구했을 때 그 은헤를 베풀어주셨습니다.

KBS 김은성 아나운서도 면접 당일 구안와사에 걸렸을 때, 그런 자기 결핍의 갈급함을 주님께 의지하듯 고백하며 발힌 것 아닙니까?

 

(적용) 이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도,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내가 내 능력과 허세와 내 가진 것을 내세우면 내세울수록 불통의 화근이 되지만, 나의 부족함은 주님의 은혜를 가져오는 통로가 된다는 것 말입니다.

주님께서 엘리사를 부르신 것도, 갈릴리 제자들을 부르신 것도, 본문의 데살로니가 이방인들과 귀부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도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내음성) 그렇기에 주님께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는 제 결핍과 제 부족함과 제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저는 건강도 자신할 수 없고, 제 가진 것이나 제 지식도 내세울 만한 게 없어요.”

주님, 저는 엘리사보다도 형편없고, 갈릴리 어부들이나 본문 속 데살로니가 이방인들가 귀부인들에 비해 자랑할 게 하나도 없는 자예요.”

주님. 이런 저에게, 저의 가정과 자녀들에게 긍휼의 은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이를 위해 더욱더 주님을 의지하며 기도를 멈추지 않고 더욱 간구하며 살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찬양) 기도를 멈추지 마라 눈앞의 상황이 마음을 눌러도

원망치 마라 너의 입을 지켜라 저들은 너의 입을 보고 있다

마음을 뺏기지 마라 내가 널 도우지 않는단 소리에

너의 모든 게 모든 게 불리해도 너는 기도를 계속해라

너 기도를 멈추지 마라 내가 너의 그 모든 상황을 바로 역전시키리니

너 기도를 멈추지 마라 내가 잠시도 쉬지 않고 모든 걸 지켜보고 있으니 바로 역전되리라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데살로니가 성읍의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을 구원하실지 누가 감히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바울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성령님께서 그들의 마음 속에 결핍과 부족함과 연약함을 보시고 긍휼을 베푸신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엘리사에게도, 갈릴리 어부들에게도, 그리고 오늘 우리들을 향한 은혜와 사랑도 동일합니다.

이 세상 누구든지, 어떤 사람들이든지 간에, 자기 자신의 능력과 자랑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볼 수가 없죠.

오히려 자기 결핍을 아는 사람, 자기 부족함과 연약함을 주님께 고백하며 의지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크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채의숭 대의그룹 회장에게 베푸신 그 은혜, 김은성 KBS 아나운서에게 베푸신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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