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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WednesdaySermon/사도행전

유대인들은 시기하여(행17:5-9)

by 똑똑이채널 2021.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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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는 모습

 

(설교열기)(성화)마태복음 20장에 보면 포도원 주인이 품꾼들을 불러 일을 시키고 삯을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포도원은 천국을 가리키는 비유이고, 포도원에 일꾼을 불러 일을 시킨 주인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키죠.

 

유대인들은 시기하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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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 주인은 제 1, 곧 오전 6시부터 일꾼을 데려다가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시켰습니다.

또 제3, 우리 시각으로 오전 9시에 또 다른 일꾼을 사서 포도원 데려다가 일을 하도록 했죠.

요즘 식으로 치면 하루하루 일을 하고 품삯을 벌어가는 인력시장과 같은 곳에서 데려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6시 곧 정오 12시에 일꾼들을 또 사서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도록 했습니다.

그 뒤 제 9시 곧 오후 3시 무렵에 또 다른 일꾼들을 데리고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도록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제 11시 곧 오후 5시에 인력시장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일을 시켰습니다.

 

그 당시는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12시간 정도 일하던 시대였습니다.

이제 오후 6시가 되어 일한 품삯을 주기 시작했죠.

그 당시 하루 일한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12만원-15만원 정도 되는 셈이죠.

 

그런데 차례로 품삯을 받는데 오후 5시에 온 사람이나 오전 6시에 온 사람이나 차이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일꾼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포도원 주인을 향해 왜 똑같이 주는 것이냐고, 시기하면서, 따져 묻지 않겠습니까?

그때 그 포도원 주인이 그렇게 대답을 해 주었죠.

친구여, 어찌하여 성을 내는 것이냐?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않았느냐?”

내가 내 것을 가지고 선하게 하는 것인데, 왜 너는 나를 악하게 보는 것이냐?”

 

(깨달음)어떻습니까?

포도원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고,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 아버지를 뜻하는 것인데, 무엇을 일깨워 줍니까?

하나님 나라의 관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비유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오히려 연약한 자들을 더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는 것이죠.

유능하고 힘는 자들이 이른 아침에 팔려나가는 구조였죠.

하지만 힘이 없고 연약한 자들은 돈이 안 되는 일을 해야했고, 그도 안 되면 도저히 팔려나갈 수 없는 모습이죠.

 

그러나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그렇게 힘없고 연약한 자들도 동등하게 대우하신다는, 그런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죠.

 

(적용) 그것은 구원의 관점도 동일하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죠.

유대인은 본래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민족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이 해방되어 가나안 땅에 뿌리를 내렸죠.

그 뒤에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태어날때부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며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살았죠.

그러면서 그들 나름대로 613가지나 되는 율법을 성경말씀에서 가져와 철두철미하게 지키려고 했죠.

그리고 그 율법준수를 구원의 조건처럼 생각하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들을 무시하고 짓밟기 시작했죠.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들이 아무리 완벽하게 지킨다 한들, 하나님께서 율법을 정해주신 그 정신과 의미까지 잘 지키는 그들이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았죠.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사람들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은 사랑하되 형식적으로 사랑할 뿐이었고, 사람에 대한 사랑은 완전히 땅바닥에 떨어졌죠.

자신들과 한 피 받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향해서는 상종조차 하지 않고 개나 돼지처럼 짐승취급할 정도였죠.

 

그 까닭에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들, 그리고 우리 같은 이방 사람들을 위해서도 뒤늦은 구원의 길을 허락해 주셨죠.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원이었죠.

예수님의 그 구원은 구원받을 공로가 있거나 어떤 율법의 행적 때문에 받는 게 아니죠.

주님께서 선택하신 자라면 오후 5시 무렵, 인생의 황혼기에도 얼마든지 구원을 베푸시는 은혜죠.

 

평생을 악하게 살다가, 뒤늦게 병이 들어, 주님 앞에 나온 사람이 그런 경우라 할 수 있죠.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아가 나이 70세가 넘어 딸의 죽음의 문제로 주님의 긍휼을 받은 이어령 교수도 그런 경우죠.

평생을 조직 깡패로 살다가 뒤늦게 주님의 은혜로 부름받은 김익두 목사도 그런 경우죠.

 

그런데 어떻게 그런 무신론자가, 어떻게 그런 조폭이 구원받을 수 있어?

자신들처럼 율법을 잘 지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저런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어, 하고 생각하는 이유가 뭘까요?

시기심 때문이죠.

자신들은 왠지 의롭다고 생각하는데, 자신들은 하나님 앞에 잘 한다고 생각하는데, 저런 형편없는 자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왠지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 이유 말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 시기심에 의해 촉발된 일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역배)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데리고 빌립보에서 서남쪽으로 164km 걸리는 데살로니가로 이동해 왔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심한 매질을 당한 상태라 온전치 못한 몸을 이끌고 온 셈이었죠.

그러나 바울은 자기 관례, 곧 자기 습관을 좇아 유대인 회당을 찾아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당시 빌립보에는 유대인 회당이 없었지만,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의 속주라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데살로니가는 인구 20만 명이 넘는 곳으로 목포시와 견줄만한 도시였습니다.

당시 성인 10명 이상만 있으면 유대인 회당을 삼을 수 있었고, 구약성경을 읽으며 기도하는 모임을 갖고 있었죠.

 

바로 그런 유대인 회당에 바울 일행이 들어가 함께 구약의 두루마리 성경을 읽으며, 그를 통해 복음을 전했죠.

그때 바울이 전한 복음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복음을 세 안식일3주 동안 전했는데,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그를 통해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따랐죠.

 

그때 바울과 실라를 따랐던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들은 본래 데살로니가 사람이든지 마게도냐 사람들인지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본래부터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이었죠.

하지만 데사로니가로 이주해 들어 온 유대인들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을 믿고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입니다.

 

다만 그들은 구약의 율법주의를 강조하는 유대인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꿔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구원이 아니라, 선한 행위, 열심, 자기 의로움에 따라 구원받는 것을 배운 이들이었죠.

 

바로 그런 율법주의 구원, 자신들의 열심과 선한 행위를 통한 구원을 강조한 그곳에서 바울이 십자가 구원을 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구원은 율법이나 행위나 자기 의를 통해 구원받는 게 아니죠.

오전 6시에 일한 사람이나 9시나, 12시나, 오후 3시나, 이제 한 시간 밖에 남지 않는 오후 5시에 나온 사람에게도 구원을 베푸시는 은혜에 의한 구원, 긍휼의 구원인 것이죠.

 

그러니 유대인 회당을 찾은 그 헬라인들과 귀부인들, 유대교로 개종한 그들이 어떤 감동을 받겠습니까?

그야말로 한 없이 긍휼히 여기시는 구원, 그저 마음 문을 열고 마음 속의 주인으로 모셔들이면 받을 수 있는 구원이라, 다들 감격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만큼 인간의 행위로 구원받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로 받는 구원은 한계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들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들 중에 많은 이들이 바울과 실라를 따랐던 것이죠.

그냥 함께 따라다녔다는 뜻이 아니라, 바울과 실라처럼 주님을 닮은 삶을 좇아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바울과 실라는 얼마나 기뻤겠으며, 주님께서도 얼마나 흐뭇해하고 기뻐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 뿐만 아니라 그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도, 유대인들이 하나님이라고 섬기는 그 하나님께서도 정말로 기뻐하실 일이었죠.

 

(본문)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전해주는 말씀인데, 본문 5-6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원해) 무슨 말씀입니까?

유대인으로 개종한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이 바울 일행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모습 앞에 유대인들이 시기했다는 것이죠.

그로 인해 불량배를 동원해서 떼를 지어 성읍을 소동케 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불량배를 동원해 야손의 집에 침입해 들어가 바울 일행을 끄집어 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 일행을 발견하지 못하자, 야손과 그 동료들을 끌고 읍장 앞에 가서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부린 것이죠.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바울이 참된 구원을 전한 게 아니었기 때문입니까?

바울은 값없이 베푸시는 주님의 구원을 전했는데, 오히려 유대인들이 시기심이 들끓어 이런 일을 벌인 것이었죠.

 

여기에 시기라고 번역된 헬라어 젤로우’(ζηλω)열심’, ‘열정을 뜻하는 젤로스’(ζλος)에서 파생된 단어죠.

매사에 열정적으로 불타 오르는’(to burn with zeal) 그런 사람이 시기하게 돼 있는 것이죠.

자기 일에 열심히 없는 사람은 시기하는 법도 없습니다.

그만큼 본문 속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관해 자기 열심, 자기 의, 자기 자랑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 그들의 의로움, 그들의 자아가, 오전 6시나, 오전 9시에 나온 사람들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에 관한 한 자기 열심, 자기 행위로만 판단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서려는 자들 말입니다.

그만큼 그들의 열심은 하나님을 위한 열심히 아니라 오히려 자기들의 열심, 자기들의 자랑과 의로움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시기심이 일어나, 그들과 다른 자들을 함부로 짓밟으려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벌인 거죠.

 

(깨달음) 그와 같은 모습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바가 무엇입니까?

내게 하나님의 긍휼과 인애가 없으면 나도 본문 속의 유대인들처럼 얼마든지 돌변할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이죠.

아버지의 마음이 없으면 오후 늦게 나온 일꾼에게 동일한 임금을 줄 때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처럼 말이죠.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왜 무신론자와 깡패에게 구원받게 하시는 것이냐고 시기하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부어주셔서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오히려 긍휼로 품는 은혜를 베푸시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어떤 마음이겠느냐?”

네가 본문 속의 유대인들이라면 너에게는 시기심과 질투심이 일어나지 않겠느냐?”

네가 포도원 주인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녀라면 오후 5시에 나온 이들에게 동일한 품삯을 줄 때 너는 시기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열심을 품고 살 때 그것이 주님의 열심과 사랑인지 아니면 너의 열심과 너의 사랑인지, 늘 분별하며 살아야 한다.”

그 모든 초점을 주님께 맞추지 않고 너에게 맞추면 너도 자칫 본문 속의 유대인들처럼 시기심으로 남을 짓밟으려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너의 생각과 너의 뜻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맞출 때 그 어떤 사람이라도, 그 어떤 무신론자라도, 조폭이라도 주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네가 그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아버지 하나님의 긍휼가 사랑의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주님의 뜻을 좇아야 하지 않겠느냐?”

 

(찬양)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자매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예화) 송병주 목사님의 오후 5시에 온 사람이란 책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시기한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발하려고 나손의 집에 처들어간 모습이 실은 교회에서도 볼 수 있는 모습이죠.

그런 성도는 주님의 은혜보다 자기 공로를 앞세우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분노하기도 하죠.

심지어 새로 나온 사람이 활개를 치는 것 같으면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내려 한다면서 화를 내기도 하죠.

부족하고 연약한 자기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쉽게 잊어버리면서, 자기 공로, 자기 열심, 자기 의는 절대로 잊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죠.

 

송병주 목사님이란 분이 있는데, 그 분이 섬기던 예전 교회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집사님 한 분이 교회에 온지 얼마 되지 않는 분과 그렇게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것을 봤다고 하죠.

내가 이 교회에 와서 마신 포도주가 몇 잔인 줄 알아?”

넌 세례 받은 지 2년도 안 됐다면서?”

그럼 박카스 병으로 한 병도 안 되면서, 뭘 안다고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깨달음) 성찬식 때 마신 포도주 양으로 자기 자신을 인정해달라는 그런 유세였던 것입니다.

그런 집사님은 보다보다 처음 보는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그 목사님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하죠.

 

이 분은 주님의 성찬 주님의 보혈을 경험한 게 아니라 포도주만 술만 드셨구나.”하고 말이죠.

 

(적용) 우리도 마찬가지일 수 있죠.

내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멀어지면 내 수고 내 열심 내 의만 추억하려고만 할 수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은혜보다 나를 앞세울 때 본문 속에 시기심으로 들끓은 유대인들처럼 전락할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내가 남들보다 나를 앞세울 때, 내가 행한 행위를 자랑하려 할 때, 그것은 주님의 은혜와 멀어지고 있다는 신호인 셈이죠.

그때는 빨리 주님께 나와 은혜의 무릎을 꿇는 게 최고 아니겠습니까?

 

(예화) 송병주 목사님이 전문인 선교모임에 간 적이 있습니다.

발제를 담당한 분들 모두가 대단한 전문인들이었다.

어떤 분은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강남의 소아과 전문의로 활동하다가 중앙아시아 선교지로 가는 사람도 있었죠.

어떤 분은 세무대학 교수로 지내다가 동남아시아 대학 교수 선교사로 가는 사람도 있었고요.

또 어떤 분은 카이스트에서 원자력 공학박사학위를 받고 중앙아시아 대학의 교수 사역자로 가는 사람도 발표했죠.

 

그만큼 그 분들 한 분 한 분의 이력이 다양하고 놀라웠습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 순서에 등장한 한 사람의 모습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분은 외모가 수더분했고 말투도 어눌한 분이었는데, 이렇게 운을 뗐습니다.

 

여러분, 저도 나름대로 전문인이라고 생각하고 오늘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런데 다른 선교사님들을 보니 제가 나설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계속 고민을 했습니다.

저는 대학도 나오지 못한 소위 공돌이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평생 닦고 조이고 기름 치자라는 구호를 붙들고 기름땀 흘리며 살아온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가 선교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깨달은 점이 있었다는 것이죠.

공산권이든 이슬람권이든 십자드라이버와 멍키스패너가 안 들어가는 나라가 없다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결단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십자드라이버와 멍키스패너 뒤에 십자가를 품고 어디든 들어가겠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영혼을 닦고 조이고 기름 치며 섬기겠습니다.

십자드라이버나 멍키스패너가 필요 없는 곳이면 걸레질이라도 하며 섬기겠습니다.”

 

(깨달음) 그 젊은 선교사, 말은 비록 어눌했지만, 그 분의 짧은 메시지에 다들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왜 그런 감동을 자아내는 것입니까?

왜 그런 분을 통해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까?

 

자기 자신의 작음을 알고 그 분의 크심을 믿고 온전히 섬기고자 할 때, 그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이죠?

 

(내음성) 그렇기에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할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도 저 자신의 작음을 알고 주님의 크신 은혜를 구하며 사는 자게 되게 해 주세요.”

주님은 자기 열심과 자기 능력과 자기 의를 드러내는 자가 아니라 언제나 겸손한 자를 더욱 크게 사용하시는 은혜의 주님인 줄 믿습니다

주님은 오전 6시에 팔려나가는 능력있는 자도 눈여겨보실 뿐만 아니라 오후 5시에 팔려나가는 연약한 자도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주님은 먼저 구원하신 은혜를 베푼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헬라인과 귀부인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품으시는 은혜를 베푸어 주셨습니다.”

주님, 어떤 경우에도 포도주 잔을 먼저 먹었다면서 자기 공로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도록, 늘 티끌이요 먼지임을 기억하며 살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 형제의 허물과 티가 있을 때 오히려 덮어주기를 원하는 주님의 마음을 품게 해 주시옵소서.”

 

(찬양)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자매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인간의 열심과 능력과 자랑의 크기에 따라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오전 6시나 오전 9시에 나온 이들 뿐만 아니라 오후 5시에 나와 있는 이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율법의 행위와 열심을 좇는 유대인들만의 구원이 아니라 죄 많은 세리와 창녀와 우리 같은 이방인들을위해서도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이십니다.

바울은 그런 주님의 마음을 알기에 유대인 회당에서 값없이 베푸시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를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능력, 자기 열심, 자기 의로움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은 온갖 시기심에 들끓어 바울 일행을 고발하여 짓누르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그와 같은 마음이 싹 터 올 수도 있기에, 늘 나의 나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하고 고백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공로, 나의 자랑, 나의 열심히 내 속에서 솟아 오르는 그때가 주님의 은혜와 멀어지는 때임을 알고, 더욱더 주님 앞에 티끌처럼, 주님 앞에 먼지처럼 더욱더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유능한 인물보다 자기 부족함을 알고 주님을 의탁하는 이들을 더욱 귀하고 더욱 큰 능력으로 감싸 세워주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축복의 주인공들 다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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