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1-9장까지는 아담에서 아브라함을 거쳐 야곱 곧 이스라엘의 12 지파들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중 지난 시간에 읽은 역대상 1장에는 아담의 계보에서부터 시작해 아브라함, 그리고 에서의 계보까지 잇고 있었습니다. 그 이름만 해도 200여 명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는데, 그 이름 하나 하나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의미있는 이름이듯이, 우리도 우리가 아는 사람들에게도 의미있는 인생, 하나님 앞에서도 착하고 충성된 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아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한 컷의 영상’으로 기억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도 실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면서 족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만 1장에 기록된 족보와 비교하면 사뭇 다른 흐름이 전개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장이 아담에서부터 아브라함을 거쳐 이스마엘과 에서의 계보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면, 2장부터는 야곱과 그 열두 아들의 족보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과연 무슨 차이일까요? 1장은 하나님의 관심이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 이방 민족에게까지 퍼져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함이고, 2장부터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집중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본문 1절에 “이스라엘의 아들은 이러하니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과 단과 요셉과 베냐민과 납다리와 갓과 아셀이더라.” 야곱 곧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 12지파에 대한 족보를 기록해 나가는데, 그 첫 번째로 야곱의 열두 아들의 이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선뜻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야곱의 장자는 분명 르우벤인데 ‘유다’를 맨 먼저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창세기 35장 23절에서 “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요 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그렇게 분명하게 밝혀주는데, 본문 3절에서 “유다의 아들은”하고 시작하죠. 장자 르우벤의 자리를 유다가 차지한 모습입니다. 이유가 뭘까요? 르우벤이 아버지 야곱의 침상 곧 배다른 어미를 더럽혔던 사건으로 인해서 장자의 명분을 박탈당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죠. 창세기 49장 3절에서도 그 사실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르우벤이 장자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권한을 침범한 죄로 인해 장자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장자의 명분을 이어받은 요셉의 아들 므낫세나 에브라임이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합니다.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에 들어가 잘 살 수 있는 근거를 요셉이 세워줬기 때문이죠. 그래서 르우벤을 대신할 장자의 권한은 요셉 곧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돼야 하는데, 본문 3절은 요셉과는 관련이 없는 유다를 먼저 세우고 있죠.
과연 무슨 이유이겠습니까? 그것은 역대기를 기록한 목적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미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 있듯이 바벨론 포로 70년의 삶에서 이제 막 벗어나 고국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근원과 뿌리를 상기시키는 게 역대기의 기록목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 제국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지금은 페르시아의 압제 속에 있어서 모든 게 잿더미가 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 속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그것을 증명할 길이 다윗 왕족의 영예를 되찾는 길이요, 그 계보를 밝히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다윗 왕의 선조가 곧 유다요, 야곱의 장자를 르우벤이 아닌 유다로 치켜세운 것도 바로 그런 이치인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가장 강성한 대국을 이끌었던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유다로부터 시작한 다윗의 계보를 맨 먼저 언급함으로써 그들이 여전히 하나님과의 언약과 은총 안에 있는 민족임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들은 혈통으로나 육적으로나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 그러나 유다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 모두도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셈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과 앗수르라는 거대 제국의 침략을 받았던 것처럼 영적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들도 세상의 거센 공격을 받을 수 있죠. 예루살렘의 성벽이 무너지고 성전이 파괴된 것처럼, 우리들의 거룩한 믿음이 세상의 거친 공격을 받아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른바 우리가 세상의 죄와 유혹에 넘어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언약,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은총의 언약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고,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압제를 받고 있다 하더라도, 그 크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의 언약 안에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큰 사랑의 언약과 은총이 우리를 여태껏 붙잡고 이끌어 주신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가끔씩 넘어지고 쓰러지더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금 세워주시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6장 6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구원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는 쓰러져 있는 우리들을 내버려 두시지 않고, 우리를 일으켜 세우셔서, 하나님의 영광의 날까지 이끌고 가신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압제를 받으면서도 고국으로 돌려보내게 한 고레스 대왕의 뜻도 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하에서 일어난 일임을 상기시킨 것이고, 그래서 그 모든 근원적인 토대를 유다의 후손인 다윗과의 언약에 맞추고 있는 이유입니다.
본문 3-4절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유다의 아들은 에르와 오난과 셀라니 이 세 사람은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이 유다에게 낳아 준 자요 유다의 맏아들 에르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죽이셨고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유다에게 베레스와 세라를 낳아 주었으니 유다의 아들이 모두 다섯이더라.” 여기에서 유다 지파의 계보를 잇는 두 명의 여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 그리고 다말입니다. 사실 이 두 여인의 이름은 굳이 족보에 기록할 필요가 없습니다. 첫번째 여인은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 즉 이방여인이었고, 두 번째 여인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로서 대를 잇기 위해 창기의 모습으로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아들을 낳은 여인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의 율례와 법도에 비춰봤을 때 결코 떳떳하지 못한 두 여인입니다. 그런데도 왜 유다의 족보에 두 여인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죄에 대한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보여주기 위함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코 죄를 싫어하신 분이시죠. 죄는 속성상 하나님과 원수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죄 때문에 독생자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제물 삼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두 여인을 유다 족보에 넣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녀들의 죄를 그냥 덮고 넘어가는 관점이 아니라, 그렇게 온전치 못한 인생까지도 하나님께서는 친히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주도해 가신다는 점을 밝혀주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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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여자들만 그런 게 아닙니다. 본문 3절에 나오는 유다의 맏아들 ‘에르’도 마찬가지요, 또 7절에 나오는 갈미의 아들 ‘아갈’ 곧 ‘아간’도 마찬가집니다. 에르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범한 자요, 아간은 하나님께서 진멸토록 한 물건을 훔친 죄인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이들의 이름을 유다의 족보사에 삭제하지 않고 다시금 기록한 이유는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단호하지만, 그런 연약한 자들을 통해 태어난 후손들을 긍휼히 여겨 사용하신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의 관계 안에 있는 자들만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죠.
*사랑하는 주님.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약백성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은혜 안에 있을 때 어떤 실수와 허물에도 우리는 다시금 일어설 수 있고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 언약 속에서 우리는 더욱 죄를 미워하고 주님의 거룩한 삶을 닮아 살 게 하시옵소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하루하루 언약백성의 삶을 신실하게 살게 하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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