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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6장의 초반부에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문안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남녀노소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각 가정을 중심으로 연합체 교회를 이루고 있는 게 로마교회였고, 때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 희생당한 이들이 있어서 더 애절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문안인사를 나누었죠. 그만큼 바울은 그 가정 교회를 이루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 분들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부드럽고 더 따뜻한 어조로 문안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16장의 마지막 후반부는 조금 색다른 어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전과는 달리 바울은 강한 어조로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해 권면하죠. 본문 17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바울이 권면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교회 안에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야기하거나 믿음에 장애물이 되는 자들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그러한 자들이 있다면 과감하게 그들에게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왜죠? 거룩한 믿음 공동체 안에 분쟁을 만들어 공동체를 허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들이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신앙생활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죠.
왜 그들을 경계하고, 그들에게 떠나라고 하는지, 본문 18절에서 더 명확하게 밝혀줍니다.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한글 성경에는 빠져있지만 원어에는 ‘왜냐하면’ 이라는 헬라어 접속사가 기록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을 향해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사람들을 멀리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첫째는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는 자들’이고, 둘째는 ‘자기들의 배만 섬기는 자들’이고, 셋째는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케 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로마교회 안에 분쟁을 야기시키고 믿음을 방해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멀리하라고 권면하는 것이죠.
이런 바울의 권면 속에서 어떤 면에 떠오릅니까? 마치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자식을 사랑하되 악한 길에 들어서가나 패망의 길을 걷고 있는 자식들을 보면 호되게 책망해야만 하는 아버지의 마음 말입니다. 그 어떤 부모가, 그 어떤 아버지가 자식이 망하는 길로 들어서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것처럼 바울은 로마교회를 힘써 섬기는 각 가정교회의 리더들을 향해서 부드럽고 따뜻한 말로 문안인사를 나누지만, 악한 길에 빠져들어가는 자,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하고 자기 배만 섬기는 자들을 향해서는 단호하게 멀리할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죠. 그것이 그들의 영혼을 주님 앞에 굳게 지키는 길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하죠. 그러나 악한 길이나 패망의 길로 가려고 할 때 단호하게 야단도 치는 그런 아버지의 마음, 그런 참된 마음이 필요할 줄 믿습니다. 실은 제가 교우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그래야 할진데, 제가 너무도 연약하여 바울처럼 호되게 책망할 줄 몰라, 하나님 앞에 너무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강하고 단호한 어조로 권면한 바울이 19-20절에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선한 것을 따르는 데에는 ‘지혜롭고’ 악에 이끌리는 데에는 ‘미련하라’고 권면합니다. 왜죠? 그렇게 함으로써 ‘거짓 선생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가 아닌 율법의 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따고 강조하는 그런 거짓 교사들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를 주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그와 비슷한 표현을 고린도전서 14장 20절에서도 밝히고 있습니다.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나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고린도전서에서는 악에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나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같이 되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만큼 그리스도인들이 지혜롭게 선한 일을 행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부분을 야고보서 3장 13절에서는 좀 더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지혜롭게 선한 일을 행한다는 것은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한 삶을 사는 실제적인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주일날 오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무대 위의 배우가 시편 23편을 낭독하는 것과 인생의 경륜을 거쳐 온 은퇴한 노신사 장로님이 23편을 읽은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고 했죠. 그 배우는 목소리도 또렷하고 표현력도 완벽할지 몰라도, 그는 시편의 내용 자체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배우에 비해 목소리도 발음도 표현력도 한 참이나 부족하고 모자랄지 모르지만, 그 노신사의 낭독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고 말입니다. 왜죠? 그분은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시편 23편의 목자 되시는 주님을 직접 체험으로 알았기 때문에 말입니다. 바로 그것이 지혜요, 온유함의 모습이라는 점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선한 일 곧 온유한 일에는 지혜롭고, 악한 데는 미련하기를 원하노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죠. 여기에서 악한 데는 미련하기를 원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악행을 일삼는 자들을 멀리해야 할 뿐만 아니라, 선한 자를 공격하고 비방하는 자들을 일일이 대응하고 보복하기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믿고 맡기며 나아가라는 것이죠. 물론 법적인 상황까지 치닫게 된다면 그것은 다른 일이지만, 그렇지 않는 일상의 삶에서 그렇게 하나님께 맡기며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죠.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허물고, 성도들을 미혹하는 자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시지 않고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죠. 그만큼 겉으로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거룩한 신앙인인척 살지만, 실제로는 예수그리스도를 섬기지 않는 자들, 자기 배만 채우는 자들, 교활하고 아첨하는 말로 믿음의 사람들을 속이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하나님께 내어 맡기라는 것이죠.
이제 바울은 본문 21-23절을 통해 다시금 앞에서 나누던 문안인사를 계속 이어나갑니다. 동역자 디모데, 누기오, 야손, 소시바더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문안한다고, 그리고 바울을 대신해서 로마서를 대필한 더디오도 문안한다고, 더 나아가, 고린도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와 고린도 성읍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문안하고 있다고 밝혀줍니다. 그만큼 그들 모두가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문안하면서 로마교회 성도들을 보고 싶어하는 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죠. 그만큼 그들 모두가 교회 성도들을 향해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25-27절을 통해 지금까지 자신이 전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요약하면서 매듭을 짓습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일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바울은 그 일의 부르심을 위해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떠났었고, 3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에 머물면서 이 편지를 쓴 것이었죠. 마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순종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미지의 세계에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알지 못했지만 아브라함이 떠났듯이 바울도 미지의 세계에 어떤 역사가 펼쳐질지 모른 채 주님만 의지하며 떠난 것이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으며 주님께서 이끄시는 세계로 기꺼이 따라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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