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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엇을 행하든지 그것이 정말 주님을 위한 것인지, 바른 믿음으로 행하는 것인지, 날마다 분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14장의 전반부 말씀이었습니다. 과연 내 판단과 내 생각이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와 같이 분별력이 없이 남을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그것은 결국 내 욕심을 위한 일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판단의 수준으로 남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나도 주님 앞에 종이자 하인이라는 관점으로 남을 바라본다면 본질적인 것이 아닌 부분들은 얼마든지 품고 수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사람으로서 품고 살아가야 할 삶의 자세라는 것이죠.
본문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자기가 옳다고만 주장하며, 상대를 비판할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장애물이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직장인이 술을 끊었다고 하십시다. 그러면 술을 마시는 동료는 술을 끊은 동료에게 기어이 술을 먹여 결단을 허물어 버리게 하고 맙니다. 그래서 술을 끊으려는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참 많죠.
왜 서로가 서로에게 장애물이나 걸림돌이 되지 말아야 합니까? 본문 14절에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무언가가 속되지 않다 할지라도, 그것이 속되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정말 속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음식을 속되다며 먹지 않는 사람에게 그 음식은 정말 속된 것이므로,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1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음식으로 인해 넘어지게 하고 실족시키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술을 마음껏 먹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합법적인 근거를 성경에서 찾아내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즐겨 이야기하는 구절이 디모데전서 5장 23절입니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이스라엘은 물에 석회질이 많아 그곳 사람들이 물 대신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디모데는 예수님을 믿고 나서 밥을 먹을 때 포도주 마시면 정신이 혼미하다고 해서 포도주를 끊고 물만 마셨습니다. 그러다가 속을 버리게 되었죠. 바울은 그런 디모데의 속병을 위해 포도주를 약으로 쓰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는 “술 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잠언 23장 29-35절에서는 왜 술에 취하지 말아야 하는지 이유를 제시해 줍니다. 그것은 재앙과 분쟁을 부르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요, 술에 취해 구부러진 말을 하고 감각도 없어지고, 결국엔 중독이 되어 감각도 없어지고, 술에서 깨어났을 때는 다시금 술을 찾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도 술을 먹고 추태를 보였기 때문에 아예 술을 쳐다보지도 말라고 잠언을 통해 교훈을 주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6절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이게 과연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나 홀로 의롭고, 선한 것도 좋지만, 그것이 타인에게 비방거리가 되지 않게 하라는 뜻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이 이전에는 술고래였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술을 끊고 신학교에 입학해 목사가 되었죠. 이제 성찬식을 집례하는 날이 되었는데, 그 날 따라 준비하는 집사님이 성찬용 포도주스가 준비를 준비하지 못한 채 가게에 가서 독한 포도주를 사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성찬식을 거행하게 되었는데, 이전에 술고래였던 그 분이 그 성찬식을 거행하고 난 뒤에 2시간 넘게 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목회하면서 체질이 완전히 바뀐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있잖습니까? 만약 그날 그 목사님이, 성찬식을 준비한 집사님에게 그렇게 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니, 집사님. 어떻게 그런 독한 포도주를 쓸 생각을 했어요. 그런 포도주였다면 아예 성찬식을 하지 말라고 했어야지, 그 독한 술로 주님의 거룩한 성찬식을 하려고 했어요. 그게 뭡니까? 믿음이 있는 분입니까? 제정신이에요? 목사가 교인에게 술을 먹인 꼴이 되었으니, 제 체면이 뭡니까?” 만약 그렇게 이야기했다면 그 목사님은 의로운 목사님이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죠. 만약 그랬다면 그 목사님은 ‘사랑이 없는 목사’가 되고 마는 것이죠. 사랑이 있다면, 그 분을 탓할 게 아니죠. 오히려 그런 술을 가지고 성찬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그 분의 절박함을 헤아리는 것이 맞겠죠. 그만큼 내가 의로운 것을 좇는 것도 좋고, 나 홀로 선한 것도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타인의 비방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되도록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랑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의롭고 선하다 할지라도 결국은 비방거리 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17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의 나라는 음식을 어떻게 먹느냐 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이루는 데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아무리 40일 금식을 하고, 산에서 기도한다 해도, 또 많은 훈련을 받았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의와 평강과 희락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죠. 믿음은 점이 아니라 선으로 돼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 평강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한 법이죠. 더욱이 그것은 인간의 노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가능하게 해 주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 있을 때에만 사랑의 바탕 위에 설 수 있고, 의와 평강과 희락을 이룰 수 있고, 그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수 있는 것이죠
본문 19-20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업’은 본질적인 것이고, 음식문제는 비본질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업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그 고백 위에 예배를 드리고, 진리를 전파하여 구원받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사업이죠. 그런 구원에 관한 진리와 본질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것과도 타협해서는 안되겠죠. 하지만 우리의 관습이나 의식의 문제 같은 것들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는 뜨입니다. 이른바 기독교인이 춤을 춰도 되는가, 술을 마셔도 되는가, 세례가 옳은가 침례가 옳은가 등등은 16세기 종교개혁가들이 ‘아디아포라’, 즉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디아포라의 문제는 타협 불가능한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상호공존 가능한 ‘덕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관습과 의식들은 서로 존중해주는 자세를 지키라는 것이죠.
그래서 사도 바울도 믿음이 강한 자들이 먼저 양보하고 희생할 것을 21절에 권면해 줍니다.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또 22절에서는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것은 앞의 16절과 똑같은 말씀이죠. 너희의 선한 부분이 비방을 받지 않도록 하라는 것 말입니다. 형제로 하여금 죄에 걸려 넘어지지 말게 하고, 또 네 안에 있는 믿음으로 남을 비난하고 정죄하지 말라고 말이죠.
그만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비본질적인 것들에 대해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우상에게 드려진 제사상 위에 올랐던 고기라 할지라도, 그 고기 자체가 불결한 것이 아니기에 먹어도 전혀 양심에 가책이 없음을 그는 알고 있는 자유했습니다. 하지만 신념이 부족하고 아직 믿음이 연약한 자들 앞에서 그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자기 자유를 스스로 제한했던 사람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사업을 위한 것, 곧 전도하고 화평을 세우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23-24절의 말씀을 새기는 것으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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