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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3장 1-7절은 크리스천과 국가의 의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앞 뒤 구조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 본문 앞에 있는 로마서 12장 9-21절은 사람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로마서 13장 8절부터도 사람에 대한 사랑이 핵심 내용이죠. 사람 사랑에 대한 내용이 나라와 국민의 관계를 다루는 본문을 앞뒤로 감싸고 있는 셈입니다.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람에 대한 사랑 없이는 국민이 나라를 사랑할 수도 없고, 집권자가 국민을 사랑할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을 때, 비로소 집권자가 권력의 노예가 되지 않고, 선한 청지기가 되어서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한 봉사의 도구로 권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죠.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부모의 권위만을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의 진정한 대리자로 자식을 이끌어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 없이는 나와 가까운 가족을 사랑할 수도 없음은 물론이고, 국가에 대한 의무를 행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뜻이죠.
오늘 읽은 8절 상반절 말씀이 이렇습니다. “피차 사랑의 빛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절대로 져서는 안 될 빚이 있습니다. 내 능력 이상의 물질적인 빚, 금전적인 빚을 져서는 곤란하죠. 빚은 사람과의 관계를 틀어지게 하기 때문이죠. 채권자만 보면 비굴해지고 할 말도 못하게 됩니다. 카드를 남발하면 처음에는 돌려 쓰도 쉽지만 나중에는 그 카드만 봐도 주눅이 들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후서 3장 11절에 “규모 없이 행하지 말라”고, 규모 없이 흥청망청 쓰지 말라고 한 이유가 거기에 있죠.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반드시 져야 할 빚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사랑의 빚이 그것이죠. 이 빚은 일방적으로 지는 빚이 아니라, 서로 피차에 지는 빚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왜 서로 간에 사랑의 빚을 져야 할까요? 빚과 선물의 차이가 있죠. 선물은 내가 받으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빚은 내가 받은 다음에 반드시 되갚아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빚을 지면 그 빚을 되갚아야 합니다. 바꿔 말해 사랑을 받아 본 사람만이 사랑을 행할 수가 있다는 점이죠.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서로 간에 사랑의 빚을 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8절 하반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또 9-10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어떻게 사랑하면 율법의 완성을 이룰 수 있습니까?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의 빚을 진 것을 깨닫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면, 사람들에게 악을 행할 수가 없겠죠. 그런 마음으로 사는데 어떻게 간음을 하고, 살인하고, 도둑질하고 탐낼 수 있겠습니까? 사랑을 받고 사랑을 베푸는 사람은 사기를 칠 수도, 거짓을 행할 수도 없죠. 그렇게 사랑하면서 살면, 그 사랑이 율법을 완성시켜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11절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여기에서 말한 ‘시기’란 ‘시간’ 곧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자체가 시간이죠.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간을 소유하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켜 죽음이라고 말을 합니다. 인생은 시간이고, 인생을 관리한다는 것은 시간을 관리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죠. 그런데 본문에서 ‘시기’로 번역된 헬라어 ‘카이로스’는 인간이 임의로 정하거나 조절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는 시간을 뜻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때는 어느 때를 말하는 것입니까? ‘구원의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다’는 것, 곧 종말의 때가 가까웠다는 뜻입니다. 종말에는 두 가지가 있죠. 우주적인 종말, 그리고 개인적인 종말입니다. 우주적인 종말이란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이 땅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이죠. 그리고 개인적인 종말이란 각 개개인이 최후를 맞이하는 날 곧 하나님의 천국에 가는 날입니다.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종말을 맞건, 우주적인 종말을 맞건, 그 때는 하나님께서 정해 주시는 카이로스라는 점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카이로스가 1초 1초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은 더 이상 의미 없이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더 아름답고 더 가치 있게 주님의 안아주심 속에서 남은 인생을 꾸려간다는 점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잠에서 깰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새 날을 맞이할 수 있습니까? 본문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벗고 입는 것이 그 해답입니다. 밤이 깊어졌다는 것은 곧 날이 새기 직전을 말합니다. 바로 목전에 다가와 있는 새 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벗을 것을 벗고, 입을 것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가 잠잘 때 입는 옷과 일어나서 입는 옷이 다릅니다. 내가 잠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여전히 잠잘 때 입는 곳을 입고 있다면, 아직까지 일어날 의사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정말로 깨어 있다면, 진리 안에서 새 날을 얻기 위해 벗을 것을 빨리 벗고 입을 것을 빨리 입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그렇다면 벗어야 할 어둠의 일은 무엇이고, 입어야 할 빛의 갑옷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본문 13절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우리가 진리 안에서 깨어 있지 않으면, 모양과 무늬만 다를 뿐이지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은 사실 전부 방탕과 술 취함과 음란과 호색과 다툼과 시기의 옷이라는 것이죠.
반면에 입어야 할 옷은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사람들이 낮에는 단정히 행하나요? 낮에는 빛에 의해 자기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이죠. 빛이 있는 낮 동안에는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있음을 의식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나의 실상을 보고 바로 잡는 것,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나를 보고 계심을 의식하는 것, 그래서 우리 자신을 단정하게 하는 것, 이것이 빛의 갑옷을 입고 사는 삶입니다.
그 말씀을 기억하도록 쉽게 정리해 주는 말씀이 14절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벗어야 할 옷은 육신, 곧 정욕의 옷입니다. 그리고 입어야 할 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옷이라고 말씀하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가 바로 깨어나는 순간이고, 그 순간부터 그에게 새 날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읽은 13-14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이 알려진 구절입니다. 그 이유는 2천년 교회사에 가장 큰 거목으로 알려진 아우구스티누스, 우리식으로 말하면 ‘어거스틴’이 이 구절을 통해 깨어났기 때문이죠. 어머니의 기도로 어렸을 때 믿음의 옷을 입고 살았던 그가 한때 방탕하여 여자를 끼고 살고 술 취함과 방탕함의 삶을 살다가, 밀라노의 한 정원에 앉아 있을 때 우연히 아이들이 노래소리를 들었던 것이죠. 그 노래의 가사 중에 다른 노랫말은 들리지 않고 오직 “톨레 레게 톨레 레게”만 들렸던 것입니다. ‘톨레 레게’란 ‘들어서 읽으라’하는 뜻이었죠. 그때가 그거 성경을 펴서 읽은 부분이 오늘 본문의 13-14절 말씀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그 전까지 방탕하게 술집을 기웃거리며 여인의 치마폭에 빠져 살던 그 모든 삶을 다 청산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새 옷을 입고 새 날을 시작하게 됐던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던 그 때가 32살이었던 것이죠. 그때 비로소 그의 나리 새롭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사의 날도 새 날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주님 안에서 내가 새 날을 맞이하면 이전의 내 인생이 새로워질 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의 역사도 새로워질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할 수 있기 바랍니다. 그래서 광야교회와 같은 이 땅위의 삶을 주님께서 안아주시는 새로움의 역사를 덧입을 수 있기 바랍니다. 그때 개인적인 종말이든 우주적인 종말을 맞이하든 그 모든 때를 주님께 의탁하며 기쁨으로 맞이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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