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중표 목사는 왜 한국신학대학을 갔나
그는 1938년 8월 29일에 태어났다.
그 스스로 한일합방 국치일에 태어났다고 여긴다.
그것이 한국신학대학에 진학한 계기가 된다.
어렸을 적 너무나 가난해 초중고 12년 동안 한 번도 도시락을 싸 가본 적이 없었다.
배가 고프면 우물가로 달려가 물로 배를 채운 후 잔디밭에
드러누워 하늘을 쳐다보며 살았다.
18세 한창 때의 나이에는 그는 폐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피를 토하며 쓰러져 폐병 3기라는 진단을 받은 것이 그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틀어놓는 계기가 댔다.
당시 3-6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고 죽음을 생각하는 절망에 빠졌다.
그런데 친구 하나가 “부흥회에서 혹시 네 병이 나을지도 모르잖아”하는 말에 가을 찬바람을 맞으며 4km 떨어진 상서교회를 나갔다.
그 부흥회때 절박한 심정으로 “살려만 주신다면 믿겠습니다.”하고 고백했다.
놀라운 건 6개월간의 새벽기도회를 통해 뚫렸던 폐의 구멍이 막
히고 각혈이 멈췄다는 사실이다.
거짓말처럼 병이 깨끗이 나았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다.
그 후 신학교를 답사할 생각에 서울에 올라갔는데 신학교마다 장로교 성결교 감리교 명칭이 붙어 있었지만 수유리에 있는 한국신학대학이 들어왔다. 나라 잃은 설움, 한국 민족 복음화를 위해 목사가 되겠다는 뜻이었다.
2. 그의 부모
그의 아버지는 늘 술 아니면 도박이었다.
그 속에서 그는 일찍 철이 들었고, 어머니를 보호해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돈이라도 잃는 날이면 억울한 마음에 애꽃은 자식들에게 화를 내며 때렸다.
다행이 그의 형은 많이 맞았는데, 그때마다 그는 분노했다.
어른이 된 후 그 마음 속에 잠재된 분노가 꿈트거렸다.
그와 가까운 사람이면 더욱 그랬다.
자식에게도, 그리고 가깝게 지내던 부목사에게 자주 화를 냈다.
교인과 마찰이 심하던 관악교회에도 분노가 거세가 일어났다.
오죽했으면 설교하던 도중에 떠드는 교인을 향해 성경책을 던졌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용서했을까?
감정적으로 안 되면 의지적으로, 의지적으로 안 되면 억지로라도 용서했다고 선언해야 할까?
그는 그 답을 별세의 원리에서 찾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실 때 우리의 아픔을 다 맡으셨다고 말씀했듯이, 그 말씀대로 그가 예수님의 별세로 들어가 아픔을 다 죽인 것이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들어가 완전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십자가상에서 그의 열등감도, 분노도, 아픔도 다 죽고, 상처도 다 녹아내렸다.
그것이 주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치유의 극약이었다.
3. 고부교회 정집사
동학혁명발상지 고부교회를 섬길 때 정 집사란 분이 있었다.
초등학교 교사다.
그 분은 불신가정으로 시집을 갔다.
시아버지의 학대는 정말 가혹했다.
사사건건 며느리를 못마땅해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 다닌다고 손찌검까지 해댔다.
그 집사님의 고충이 얼마나 심했겠는가?
그런데도 정 집사는 매를 맞으며 교회에 나왔다.
예배를 사모하며, 선포되는 말씀 하나 하나를 놓치지 않고 귀담아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시아버지가 노인정을 다녀오다가 중풍을 맞고 자리에 눕고 말았다.
정 집사는 정성으로 시아버지의 병 수발을 들었다.
그런데 얼마 뒤에는 시아버지는 치매로 대소변까지 못 가렸다.
시아버지는 벽에 똥칠을 하고 여기저기 소변을 봐놓기 일쑤였다.
방안에는 오물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럴 때 보통 사람 같으면 그 일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정 집사는 일단 집에 들어서서 무릎부터 꿇었다.
그 악취 속에서도 5분간 간절히 기도를 드린 것이다.
“주님 이 여종을 별세시켜주옵소서 별세시켜주옵소서.”
신기하게도 그렇게 기도를 드리고 나면 똥 오줌의 악취도 장미향기로 변한다고 했다.
더욱이 며느리를 구박하던 시아버지도 불쌍한 마음이 들고 사랑스럽게 보였다고 한다.
그렇게 정 집사는 여기저기 널린 똥오줌을 불평하지 않고 청소하면서 정성을 다해 시아버지의 병수발을 들었다.
그런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은 함께 울고, 함께 찬송하며 함께 청소했다.
세월이 흘러 시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마치고 이중표 목사님이 앉아 있는데, 정 집사님의 남편이 이 목사님에게 다가와 그렇게 말했단다.
“목사님 저는 정말 존경하는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
뜬금 없는 그의 말에 이중표 목사는 내심 자신을 존중한다고 말하려는 줄 알고, “아, 예” 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에게서 그 다음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목사님 저는 별세의 사람을 한 사람 알고 있는 데요. 그 사람에게
절을 하고 싶습니다.”
별세라는 그 말에 이중표 목사는 더욱 기가 올라갔다.
여태껏 자신이 외치고 가르쳤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내심 자신에게 그 남편이 절을 하려나 보다 하고,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절은 하지 않고 뭔가 쑥스러운 듯 머뭇거리기만 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목사님. 제 집사람 정 집사는요. 정말 별세의 사람이에요. 저는 그
사람에게 절을 하고 싶습니다.”
그때서야 그간의 사정을 알게 되었고,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이중표 목사님도 남편과 함께 정집사를 향해 절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 집사는 극구 사양하며 끝내 그 자리를 피해 도망갔다.
그때 이중표 목사는 깨달은 게 있었단다.
별세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목회자 자신이 별세해야 한다는 것.
그 별세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골방의 기도가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4. 목사는 교인들을 자기 신부로 알아야 한다.
영적인 의미에서 신부는 자기 몸에서 나온 자이다.
아담에게서 하와가 나왔듯 예수님에게서 교회가 나왔듯 교인들은 목사의 몸의 일부분이다.
따라서 교인들을 자기 몸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목사라면 성도를 미워할 수가 없다.
어머니로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일까?
바로 아이에게 젖을 물릴 때다.
많은 어머니들이 자기 아이에게 젖을 먹일 때 창조의 신비감을 맛보았다고 고백한다.
예수님께서는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린 양은 풀을 먹지 않는다.
사료를 먹는 것도 아니다.
어미 양의 젖을 먹어야 산다.
어미의 젖을 먹는다는 말은 어미의 피를 먹는다는 뜻이다.
어린 아이도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란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어머니 가슴에서 나오는 젖을 먹는 게 아니다.
어머니를 먹는 것이다.
어머니가 밥을 지어 먹이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 자신을 먹이는 것이다.
그는 어렸을 때, 어머니가 밥을 해서 상을 차려 주시고 당신은 남은 밥이 없어 누릉지만 잡수시는 모습을 자주 봤다.
형제들이 많다 보니 때로는 어머니가 드실 누릉지까지 자식들 몫이
되는 날이면 어머니는 그날 끼니를 꼬박 굶으셨던 기억도 있다.
밥알 하나라도 더 먹겠다고 누릉지 바닥까지 박박 긁는 형제들을 보시며 눈물 흘리시던 어머니였다.
그 눈물을 보면서 그는 어린 마음에도 마음이 참 많이 아팠다.
‘아 우리 어머니는 이 흉년에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더 주지 못하
는 안타까움에 울고 계시는구나,’
그는 어머니의 그 눈물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어머니에게 배운 그 정신으로 목회를 하려고 부단히 노력해왔다.
그는 강단에 설 때마다 교인들에게 은혜를 더 끼치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에 울 때가 많았다.
먹고 싶어하는 어린 양들에게 더 주지 못하는 어미 양의 마음처럼.
목사의 행복이란 교인들에게 자기 존재 전부를 내어줄 때 맛볼 수
있다.
그렇기에 목사는 목회를 하면서 끊임없이 자기가 양들에게 지금 무엇을 주고 있는가에 대해 스스로 진단해야 한다.
5. 그는 7년마다 한 번씩 병원에 들어가서 수술을 했다.
왜 그토록 힘들게 목회를 하는지, 그 원인을 규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 번째 수술을 받을 때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았다.
서울대학병원에서 수술에 들어가기 전, 의사가 병실에 들어왔다.
살펴보니 마취가 잘되었는지를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의사는 뾰족한 것으로 그의 살을 찔렀다.
“아야”
갑자기 터져 나온 그 비명 소리에 의사는 ‘마취가 아직 안됐네’하고 말했다.
잠시 뒤 다시 그의 살을 찔렀다.
“아야”
그러자 의사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아직도 안 죽었네”
그 말 한 마디는 수술을 앞두고 있는 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렇구나. 죽어야 수술할 수 있는데, 난 아직도 살아 있구나.’
그가 목회를 하며 7년마다 한 번씩 병원을 찾아야 했던 이유를 깨달은 게 그것이다.
‘내가 살아 있었구나. 내가 완전히 죽지 못했기 때문에 삶이 지치고 피곤했구나.’
6. 성도의 피를 먹고 사는 목회자
그는 동학혁명발상지 고부교회에서 옥구교회로 목회지를 옮겼다.
부임한 그 교회는 이미 두 패로 나뉘어 있었다.
그곳에 부임해 사랑을 설교했다.
그 중에 한 권사님은 언제나 그의 심방길에 동행해 주셨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그의 빠른 걸음을 쫓아올 수가 없었는데, 유독 60이 넘은 그 권사님만 그의 걸음을 따라올 수 있었다.
심방 때마다 권사님은 점심 도시락을 싸 오거나 간식거리를 싸왔다.
그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권사님이 폐렴에 걸렸다.
감기가 들었는데도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바람에 폐렴이 진행된 것이었다.
권사님은 치료를 위해 군산 시내에 있는 딸 집으로 가야 했다.
초등학교 교사이던 딸의 극진한 병구완 덕에 봄이 되자 많이 회복되었다.
그때 권사님은 당장 교회에 가겟따면서 성화를 부렸다고 한다.
‘얘야 나 이제 교회 갈란다. 다 나았으니 지금 당장 교회가야겠다’
“아이고, 엄마 무슨 소리예요. 지금 밤공기가 찬 데 가더라도 내일
가세요.”
딸의 만류도 소용이 없었다.
“아니다. 난 목사님 곁으로 가야지 이대로는 못살겠다. 난 목사님을 봐야 할지. 안 그러면 못 산다.”
어머니의 고집에 딸도 어쩔수 없어 짐을 챙겨 들고 같이 집을 나섰다.
“엄마, 그럼 몸 조심 하세요”
딸은 엄마가 못내 걱정이 되어 택시를 잡아 드리려고 했다.
당시로서는 택시를 타는 일이 흔치 않은 일이었다.
택시를 탄다는 것 자체가 부의 상징이던 그런 때였으니까.
그러자 권사님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야야. 아기 운다. 빨리들어가 봐라. 택시는 내가 알아서 탈테니 차
비나 좀 주고 가려무나.”
딸에게 택시비를 받아든 권사님은 서둘러 골목을 돌아나왔고 그 돈
으로 약국에 가서 피로 회복제 한 통을 사들고는 이십 리 길을 걸어 교회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교회에서 사모를 만나자 그 피로 회복제를 내밀며 반갑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사모님. 이거 목사님께 드리세요. 저는 요 목사님께 제 살을 깎아
드려도 아까운 게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은 이것밖에 드릴 게
없네요.”
그는 그걸 받아들긴 했지만 도저히 눈물이 나와서 마실 수가 없었다.
그럴 때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성전으로 올라가는 것.
“주님. 여종이 피의 향유를 담아서 이 종에게 가져왔어요. 이 향
유를 받으소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엎드려 기도했다.
그러자 성령께서 감동을 주셨다.
“그래, 마셔라. 너는 성도의 피를 마시고 사는 자다. 성도들이 바치
는 헌금이 바로 피의 헌금이 아니더냐? 성도들이 네게 주는 것은 모두
자기 피를 말려서 주는 것이다. 마셔라. 너는 성도의 피를 마시고 사
는 사람이다.”
정말 그랬다.
목사는 성도의 피를 마시고 사는 사람이다.
양의 피를 마시고, 양의 살을 먹고 사는 게 목자가 아닌가?
그리고 그 피를 마신 자는 성도를 위해, 지역사회를 위해, 다시 그 피를 쏟아야 한다.
그는 그것을 실감하고 싶었다.
그 피가 흐르고 흘러 옥구의 거리를 다 적셨으면 했다.
왜냐하면 그는 성도의 피를 먹고 사는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7. 서울 관악교회 시절 목회 실패 후, 한신교회 개척
고부교회에 이어 옥구교회로 옮겼을때 대부흥을 경험했다.
그때 서울 관악교회로 초빙이 와서 서울로 떠났다.
300명이 모인 교회였다.
한 달 넘게 옥구교회를 잊지 못해 금식기도까지 할 정도였다.
그런데 관악교회는 전임자의 여동생이 전도사로, 그 친인척이 장로 피택을 받아 놓은 상태였다.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기보다 자기 권위를 내세우려 했다.
그로 인해 말썽이 생겼다.
심지어 예배시간에 성경책을 던지기까지 했다.
그 일로 경찰서에 고발당하고, 설교도 못하고 끌려내려왔다.
그때 아들 녀석은 무섭다고 벽장 속으로 숨기가 일쑤였다.
전화도 매일 걸려왔다.
받아보면 온통 욕설이었다.
“야, 이 개자식아”
그 후 한동안 전화벨만 울리면 겁이 났다.
밤에 전화벨 소리만 들리면 피가 쏟는 것 같았다.
결국 부임한 지 1년 3개월 만에 그는 관악교회를 사임해야 했다.
어느 주일 아침 저는 강단에 서지 못한 채 사택에 있었다.
그때 달려온 한 피택 장로의 부인은 고무신을 벗어들고 그의 뺨을 마구 때렸다.
그는 조용히 맞고만 있었다.
그때 말리려고 쫓아온 한 청년은 이중표 목사의 얼굴이 처음에는 붉어지더니 나중에는 천사처럼 빛나더라며, 그 순간 ‘저 분은 참 하나님의 종이구나.’하는 감동을 받았다.
그 계기로 신학교에 갔다고 하는데 그가 바로 박진구 목사다.
그런데 그런 고통의 상황에서도, 그의 아내는 달랐다.
지진이 나도 무서워할 것 같지 않은 아내였다.
당시에도 그는 그런 아내가 있어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아내가 자신에게 교회 개척을 적극 권유해 왔다.
물론 이중표 목사는 군산의 시골 교회로 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다 시골 교회 장로님들이 올라와 이삿짐까지 차에 실었다.
그때 그의 아내는 개척이 아니면 안 된다면서 집을 나가버렸다.
그러던 차에 초등학교 동창 이윤식 목사를 만났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도 제게 교회 개척을 권해 왔다.
“이 사람아. 자넨 서울에서도 할 일이 많네. 10년 후를 생각하면서
꿈을 갖고 목회를 해야지.”
그 친구의 말을 듣다 보니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그럼 어디 가서 목회를 한단 말인가”
“신반포로 가게나. 거기는 개발지역이니 앞으로 비전이 있을 걸세”
신반포는 처음 듣는 동네 이름이었다.
하지만 한 번 가보기로 했다.
그 즈음 아내가 꿈을 꿨다.
아내와 그가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는데, 경비 한 사람이 문을 열어 줬고, 그 안으로 들어선 그가 막대기로 문을 건드리자 거기서 뼈들이 나오더니, 부쩍부쩍 살이 찌더라는 꿈이었다.
그 꿈을 꾼 뒤로 아파트 목회를 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창립 예배를 놀이터에서 드렸고, 예배 처소는 아파트로 정했다.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14만원을 내고 아파트로 들어갔다.
개척 당시, 700세대가 아파트에 입주했기 때문에 시기적으로도 대단히 좋았다.
말하자면 인구 이동이라는 사회적 외부 요인이 교회 성장의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후 그 아파트 안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자 18평 상가를 얻었다.
그때 1천만원이 필요했는데,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내서 그 빚을 해결케 해 주셨다.
그런 과정을 통해 기장교회에서 가장 큰 한신교회를 하나님께서 세워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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