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재 목사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창세기 첫 번째 규티 노트다.
특별히 결혼과 가정의 중요성을 새기도록 일깨워준다.
결혼은 자기 성공을 위한 게 아니라 거룩한 사명이라는 것.
남편과 아내, 그 중에서도 아내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면 하나님께서 회복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
김양재 목사도 젊은 시절 강남 사는 의사가 기사를 대동하고 나타났을 때 부요함에 이끌려 결혼을 했지만, 너무나 고통스런 삶이었다.
그 때문에 5년만에 가출했지만, 인격적인 주님을 만나 그 자리를 십자가의 자리로 굳게 지켰다.
이 책을 읽고 깊이 깨닫게 되는 부분이 있어서 몇 가지 내용을 정리했다.
1. 미국의 사회 심리학자인 앨리어트 애런슨은 〈거짓말의 진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은 유리한 내용은 덧붙이고 불리한 내용은 빼곤 한답니다.
그러다보면 결국에는 자신이 손질한 이야기가 사실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서 어려서부터 매를 맞았고, 그래서 지금도 화가 나 있다”라고 진술하지만,
“내가 얼마나 참을성이 없고 아버지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음녀 아버지가 나를 때렸을까”하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억이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지만,q ks대로 이야기가 기억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우울증과 폭식증을 앓던 폴리 라모나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심리 치료사는 그녀의 질병이 어러서 성폭행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폴리는 그런 일은 없다고 부인했습니다.
결국 이 심리치료사는 의사를 동원하고 최면술까지 사용해서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반복적으로 성폭행 당한 일을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격분한 아버지가 심리치료사와 의사를 고소했습니다.
결과는 아버지는 무죄 판정, 심리 치료사와 의사는 유죄판정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비참한 경험을 했다고 주장을 하는 뒤에는 ‘나는 사실 똑똑하고 유능한데 내 환경 때문에 지금 이 모습이 되었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내가 내 사건 속에서 주님을 만나야 하는데, 옳고 그름을 따지며 선악의 문제만 관심을 둘 때 그런 원망이 나오는 것입니다.
상대를 탓하고 나 자신을 정당화하려니 사실을 왜곡하고 기억을 가감하는 것입니다.
2. 〈거짓말의 딜레마〉를 쓴 클라우디아 마이어는 1990년대 초 ‘방어적 자기 연출 모델’을 소개했다.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자기를 방어하면서 첫 번째로 나오는 반응은 ‘부정’입니다.
아이가 꽃병을 깨트리고 엄마의 추궁을 받을 때 “제가 안 그랬어요”하면서 부정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사건을 새롭게 재해석하려고 합니다.
“거실에 오니까 이 꽃병이 바닥에 떨어져 깨져 있었어요.”
세 번째로 자신이 그 장본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동생이 그랬어요.”하는 겁니다.
네 번째로 변명을 합니다.
“꽃병이 저기에 있으니까 부딪힐 수밖에 없었어요.”
다섯 번째로는 자신의 통제 능력을 부인합니다.
“양탄자에 걸려서 넘어지다 보니까...”
여섯 번째로는 자신의 연류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합니다.
“원래 저 평소에는 굉장히 조심성 있는 것 엄마가 알잖아요.”
마지막 일곱 번째가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방어하다 겨우 마지막에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용서를 구하기가 어려운 것이 인간의 자의식입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하나님의 낯을 피한 게 그것입니다.
죄의식은 우리를 숨고 피하게 만듭니다.
자의식이 발전하고 똑똑해질수록 교묘하게 피하는 기술만 늘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아담을 부르시며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3.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면 방어적 자기 연출 단계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먼저 바람 피운 사실을 부정하겠지요.
다른 증거를 들이대면 사건을 재해석하면서 이렇게 말하겠죠.
“그 여자랑 잔 건 사실이지만 그건 실수였어. 딱 한 번 뿐이야”
세 번째로 자신이 장본인임을 부인하면서 그렇게 말하겠죠.
“그 여자가 작정을 하고 나를 유혹한 거야”
네 번째로 변명입니다.
“당신이 나한테 관심이 없고 잘 못하니까 내가 바람이 난 것 아니야”
다섯 번째로 자신의 통제 능력을 부인합니다.
“그때 내가 너무 취해서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였다고.”
여섯 번째로 자신의 연류를 최소화 합니다.
“내가 바람둥이가 아닌 것, 가정에 충실한 것, 당신도 알고 있잖아.”
그래도 안 되면 마지막으로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처음부터 용서를 구하면 좋을텐데 똑똑한 사람일수록 단계가 늘어납니다.
이것이 자기 죄를 모르는 타락한 인간의 현주소입니다.
4. ‘남편을 원한다’는 표현은 물이 넘쳐 흐르는 것 같은 강렬한 갈망을 의미합니다.
굶주린 자가 먹을 것을 찾아 뛰어다니듯이 여자가 남자의 사랑을 갈망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남자가 남편이 되는 순간부터 여자가 남편을 원하기 때문에 수없는 고통을 겪습니다.
반면 남편이 여자를 다스린다고 할때는 가혹하고 착취적인 예속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남자들이 죄성을 가지고 여성을 다스리기 때문에, 인격적인 다스림보다는 폭력적이기 쉽습니다.
이 ‘다스린다’는 동사는 미완료형으로 지속적인 다스림을 말합니다.
원하는 것이 형벌이 되고, 그 원하는 남편이 나를 예속하며 다스리기 때문에 인류 이래로 여자는 남편 때문에 깨어집니다.
내가 남편을 아무리 원해도 남편은 결혼 후에는 나를 사모하지 않습니다.
집에 데려다 놓은 아내는 그저 공기 같은 존재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결혼생활이 얼마나 갈등 충만하겠습니까.
남편을 독점하고자 하는 갈망으로 요리도 하고 애교도 떨지만,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밖에서는 사랑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기 주장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죠.
자기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었던 사이가 갈망하고 착취하는 지배와 피지배의 사이로 변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결혼 생활은 고통과 수고뿐입니다.
그럼에도 이 원리에 순종해야 합니다.
고생하면서 아이를 낳고 남편을 사모하고 그 다스림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야 자녀들이 나를 인정합니다.
이것이 원죄의 형벌이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잘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여자에게 힘든 형벌을 주십니까?
여자의 재료가 남자보다 훌륭하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뼈로 지어졌고 남자는 티끌에 불과한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영리했기에 뱀과도 먼저 이야기했습니다.
아담은 거기까지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교회에서도 여자들이 더 영성이 있고 말씀도 잘 알아듣습니다.
게다가 얼마나 잘 참는지 모릅니다.
잘난 사람이 못난 사람을 섬기가 어렵고 무지하기가 쉬운데, 재질이 좋은 여자가 흙인 남편을 무시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잘난 여자에게, 말도 안 되는 티끌 같은 흙으로 지어진 남편을 사모하는 벌을 주신 것입니다.
여자의 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 하기에 이 벌을 잘 받아야 합니다.
중심을 잡으면서 잘 참다 보면 나의 인내를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 가정에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흙인 남자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여자의 몸을 열 달 동안 빌려서 오셨습니다.
남자의 후손이 아닌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이 적용을 남자와 여자에 국한시키지 않고 내가 먼저 돕는 자가 되어서 남을 섬기고 약한 사람을 섬기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게 많을수록 내 권한을 쓰지 않고 낮아지고 죽어져야 한 알의 밀이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발꿈치가 상하는 고통이 따릅니다.
살기 힘들면 그냥 이혼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굳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가 싫습니다.
그러나 제가 제 인생에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혼하지 않고 결혼을 지킨 것입니다.
제가 결혼 전에 입시와 성공을 위해 인내하는 것은 결혼생활의 인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가정을 지키기가 어렵고 괴롭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최고의 면류관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결혼은 지킬 가치가 있습니다.
어떤 남편이든 간에 다스림을 잘 받으면서 가정을 지킬 때 우리에게 축복이 됩니다.
힘든 생활을 하시는 분은 그만큼 여러분의 재료가 좋은 것입니다.
5. 히브리서 11장 4절에서는 아벨의 제사에 대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십자가의 제사, 피의 제사입니다.
남편을 섬기고 지의 소원을 다스리고 해산하고 임신하는 고통, 노동하는 고통이 십자가의 고통입니다.
이 고통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손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삶은 부모와 배우자를 다 버리고 헌금만 내고 교회에 나오는 것이 가인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기 싫다고 하십니다.
헌금을 얼마 내느냐가 중요한 아니라, 내 삶의 현장에서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
아내를 사랑하는 것.
아이가 가출해도 끝까지 기다리는 것.
그런 관계와 질서에 얼마나 순종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런 순종을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 헌금만 열심히 드리겠다는 예배를 하나님은 받지 않으십니다.
아벨의 예배는 십자가의 예배입니다.
가죽옷이 나의 모든 부끄러움을 감추어 주듯이, 아무리 힘든 고난 속에서도 십자가를 지면 하나님이 가려주셔서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인간의 의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내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십자가를 지는 적용을 하셨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이 상급이 되시고 우리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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