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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장은, 7장의 내적 갈등과 번민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이들이 누리는 승리와 영광을 다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제 읽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이 알아야 할 네 가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14절을 통해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인도하신다는 것, 둘째로 15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아빠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 셋째로 16절을 통해 성령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사실을 날마다 증언해 준다는 것, 넷째로 17절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때때로 고난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아픔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픔이 없는 곳에는 죽음만 있죠. 암이 무서운 이유는 암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아픔을 주지 않기 때문이죠. 아픔을 느끼기 시작할 때는 이미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죠. 반면에 감기는 감기가 든 순간부터 코가 막히고 기침이 나고 목이 아픈 반응을 하죠. 우리에게 고난이 다가오면 아픔이 찾아오지만 그런 그것으로 인해 생명을 더 바르게 가꿀 수 있도록 이끄신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사람인 증거입니다.
그래서 오늘 18절 말씀을 통해 고난에 대해 권면해주고 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현재의 고난이 어떻게 장래의 영광이 된다는 말씀입니까? “생각하건대”, 곧 영광이 임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고난이란 아픔이고 괴로움이지만, 그 속에서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모든 게 합력하여 선으로 귀결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덧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과연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 하는 점이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날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해 주신 분이죠. 그렇기에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고난에 처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 자체를 주고자 하심이 아니라 다른 목적과 계획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나 같은 미물을 살리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셨다면, 어찌 더 좋은 것들로 채워주지 않겠는가 하는 걸, 생각하며 사는 것이죠.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이 다 같은 고난이 아닙니다. 첫째로는 믿지 않는 이들을 구원시키기 위한 고난이 있죠.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가다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났는데, 그 고난이 왜 닥쳤습니까? 배에 탄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고 구원키 위함이죠. 둘째로는 구원받은 이들이 잘 못된 길을 갈 때 돌이키도록 고난을 주시죠. 요나가 바로 그 경우입니다. 요나로 하여금 순종의 자리로 부르시기 위함 말입니다. 셀째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으로 세우고자 훈련시키기 위한 고난이 있습니다. 요셉의 경우가 그렇죠. 형들에게 미움과 시기를 받아 애굽에 노예로 팔려, 종살이하다가 거짓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혔지만,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었죠.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고난을 통과한 뒤에 영광스러운 존재로 승화시켜 주신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게 해 주신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 우선 본문 19절입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여기에서 ‘피조물’이란 하늘의 별, 구름, 땅, 벌레 등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피조세계가 고대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 곧 하나님의 자녀들을 고대한다는 것이죠.
왜일까요? 본문 20-23절에서 밝혀줍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피조물이 탄식하는 상황 속에서 속량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바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믿음 안에서 고난을 겪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으신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에도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느끼며 비로소 생명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까닭 없이 사울에게 쫓겨 다녔습니다. 그 고난을 통해 비로소 자기라는 껍질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죽이려 하는 사울을 용서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압살롬도 용서할 수 있었죠. 또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헌신하면서 이타적인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쓴 시편 8편 1절에 이렇게 고백한 것이죠.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다윗의 눈에 풀 한 포기가 그냥 풀 한 포기가 아니고 벌레 또한 그냥 벌레가 아니라, 온 피조 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을 뒤덮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 이유가 분명하게 되죠. 참 생명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로서 온 피조 세계를 구원하는 구원의 도구로 삼기 위함 말입니다.
그리고 본문 29-30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네 가지 개념으로 압축해서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이 네 가지에 대해 신학자들은 ‘복음의 황금 사슬’이라고 말합니다. 그 첫째가 선행적인 은총입니다. 29절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에 ‘미리 아신 자들’ 그리고 ‘미리 정하셨다’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 선택하셨다는 것, 이것이 선행적인 은총입니다.
둘째는 불가항력적인 은혜입니다. 30절에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30)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 정하셨다 해도 불러주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리 선택하시고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필승불패의 은혜입니다. 30절 중반 말씀입니다.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라는 말씀이죠.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자기 형 암논을 죽이기 위해 날짜를 정하고, 그 날이 되자 멋지진 잔칫상을 차리고 형을 불렀죠. 부름에 응답한 암논은 그날 잔치 석상에서 목이 날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 정해 놓고 불러주기까지 하셨는데, 그러고 나서 ‘불러 놓고 보니 네가 별 것 아니구나’하시며 심판을 내리셨다면, 우리는 부름받지 않는 게 더 낫겠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미리 선택하시고 부르셨을 뿐만 아니라, 부르심 받은 우리를 전적으로 의롭게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는 성화의 의무입니다. 30절 하반절에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죠.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은 ‘존재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미리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게 여겨주셔서, 이후에는 영화로운 존재로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화의 과정이자 의무를 부여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신분의 삶을 살라는 뜻이죠.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세 번째 단계에 머무는 경향이 강합니다. 주님께서 미리 선택하시고, 불러주시고, 의롭게 여겨주시는데, 그 다음 단계인 성화의 삶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멈춰버린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면 비록 넘어지는 좌절을 맛보더라도 네 번째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그런 은혜 안에 거할 수 있기 바랍니다. 그것이 체험적인 신앙인의 모습인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은 저희들의 공로나 능력에 달려 있는 게 아님을 압니다. 오직 주님께서 저희를 미리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또 의롭게 여겨주셔서 저희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줄 믿습니다. 그러나 의로운 단계에만 머무르지 않게 하시고 영화로운 존재로 살게 하셔서 성화의 단계로 올라서게 하시옵소서. 비록 넘어지는 좌절을 겪는다 해도 성화의 삶을 위해 몸부림칠 때 주님께서 더 큰 은혜로 세워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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