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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로마서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롬7:1-25)

by 똑똑이채널 2024.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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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는 로마서 6장 23절 말씀은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는 로마서 5장 12절과 더불어 로마서에서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것을 도식화하면 ‘한 사람의 죄- 모든 사람의 죄-모든 사람은 죽음’ 이렇게 할 수 있죠. 아담의 죄가 온 인류를 죽음으로 몬 것 말이죠.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영생의 선물이죠. 그것이 곧 구원이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이죠. 그런데 구원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뿐 아니라 두 가지 자유를 더 의미합니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와 ‘죄로부터의 자유’죠. 오늘 로마서 7장 1-6절은 율법의 형식으로부터의 자유, 7-13절까지는 율법의 내용적인 측면의 자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4-25절까지는 성화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어떤 법도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죽고 나면 더 이상 그 사람에게 그 법이 효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죠. 그것을 2-3절에서 남편과 아내의 예로 들어주죠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예수님 당시의 유대사회에서 이혼에 관한 결정권은 오직 남편에게 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죽기 전에는 이혼할 방법이 없었죠. 그래서 여자에게 있어서 남자는 살아 있는 법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그 남편이 죽으면 더이상 아내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남편이라는 법의 시효가 끝났기 때문에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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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작 바울이 중요하게 전하려고 하는 내용은 4절입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그리스도인은 율법에 대해 죽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에 대해 죽었든지, 율법이 나에 대해 시효를 상실했든지, 율법은 더 이상 내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 상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것이 바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었다고 해서 율법이 폐기되었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율법이 무용하다는 것도 아니죠.

그렇다면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율법의 내용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율법의 형식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갈 때 제사장을 통해야 하고, 짐승의 피를 뿌려야 하는 것 형식 말이죠. 그런데 그런 율법의 형식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을 단 번에 제물로 드렸기에 더 이상 율법의 형식을 좇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이 6절 하반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율법 조문의 묵은 것’이 곧 율법의 형식을 말하는 것이고, ‘영의 새로운 것’이 곧 율법의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의 새로운 것이란 매 순간 성령님의 음성을 좇아 사는 삶입니다.

 

본문 7-13절은 율법의 내용적인 측면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호소하는 말씀입니다. 본문 7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율법이 죄인가, 하는 질문에 바울은 아니라고 단호히 말합니다. 율법의 본래 용도는 우리에게 죄를 가르쳐주는 것이기 때문이죠. 율법이 없었다면 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예로 ‘탐심’을 들어 설명하죠. 탐심은 분명 죄이지만, 율법이 없으면 탐심이 죄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9절에서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자는 죽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율법은 우리의 비참한 실체를 적나라하게 비춰줘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소망을 내다본다는 것입니다.

 

이제 14-25절까지는 율법의 내용적인 측면에서 죄를 깨닫고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자가 겪는 내적인 갈등과 번민에 대해 말씀해 줍니다. 14절에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율법이 신령하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나의 죄인 됨을 율법의 말씀 안에서 밝혀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깨닫기 전까지 나는 육신의 죄 아래 팔려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고 교회를 잔멸했던 그 삶이 그랬다는 뜻이죠. 그래서 신령한 율법 앞에 서면, 자신이 완전히 죄에 팔려 죄의 종이 된 존재임을 발견케 된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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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심각한 것은 15절입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자신이 지금 무언가를 행하고는 있는데,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이것을 하고 싶은데, 실제로는 저것을 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것이 19절에 나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이 말씀은 두 종류의 내가 있음을 알려 줍니다. 하나는 원하는 바로서의 나와 행하는 바로서의 나죠. 원하는 바로서의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나요 그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죠. 그런데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 괴리감이 좀체 좁혀지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16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이 구절을 새번역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입니다.무슨 말입니까? ‘이건 말씀대로 사는 게 아닌데’하면서 마음에 가책이 드는 것, 율법이 선하다는 걸 인정한다는 뜻이죠.

또 17-18절에서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선을 행하고는 싶지만 내 속에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것이죠. 그래서 20절에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0절 말씀이 실은 17절 말씀의 반복입니다. 선을 행하고 싶어하는 내가 실종되고 죄가 나를 지배한다는 것이죠. 21-23절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내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데, 내가 죄에게 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법이 나를 포로로 만든다는 것이죠. 그래서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여기에서 ‘곤고한’의 원어는 ‘비참하다’는 뜻입니다. 원하는 바는 할 수 없고 원치 않는 바를 행하기 때문에 비참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죠. 죄의 삯은 사망뿐인데, 죄에서 벗어날 길이 없고, 그래서 누가 건져낼 수 있으랴, 하고 통탄하는 상태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바로 성화의 단계 속에 있는 고백이라는 점입니다. 이 고백은 바울의 고백입니다. A.D.56년 곧 그의 나이 56살에 한 고백이죠. 도둑질 때문에, 간음이나 살인 때문에 이런 곤고함을 고백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더 살지 못한 갈등의 고백입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도,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내면속에도 나타난다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프랑스의 소설가 프루스트가 나팔꽃에 대해 말한 것처럼, 나팔꽃이 줄을 타고 올라갈 때 떨림 가운데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그리스도인이 성화를 위해 도약해 갈 때 이런 갈등과 번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장성한 믿음의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과정이라는 점이죠.

오늘도 세상 속에서 이런 내면의 갈등이 있을 때, 내 믿음의 나팔꽃이 한 단계 올라서기 위함이구나, 생각하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좇아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어도 저희의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나팔꽃도 밤 사이에 파르르 떨면서 줄기를 타고 한단계 올라섭니다. 저희도 주님의 성화를 이루기 위해 갈등과 번민을 할때가 있사오니 그때마다 믿음의 진일보를 이루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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