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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장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주님의 의에 연합한 자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사실 은혜와 구원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보다 잘 아는 주제죠. 그런데 은혜와 구원을 폭넓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원을 죄에서 건져주는 정도로, 은혜는 죄인을 향한 사랑 정도로 이해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좁은 이해죠. 의와 은혜는 우리 신분의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는 죄에 대해 죽었고, 더 이상 과거의 죄가 우리를 침탈하지 못합니다. 완전히 과거와 단절된 것입니다. 물론 교리적으로 그걸 이해하지만 실제의 삶 속에서는 난해하게 생각할 때가 많죠. 때때로 죄의 유혹 앞에 걸러 넘어지거나 악을 악으로 갚을 때가 많기 때문이죠.
본문 12-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곧 우리 자신에게 불의의 무기가 아닌, 의의 무기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불의의 무기가 무엇이겠습니까? 육체로 대변되는 자기 자랑과 자존심과 자기 자아로 볼 수 있죠. 예수님을 통해 구원 받고 은혜를 누리고 있어도 가정과 직장과 세상은 똑같죠. 그때 과거의 방식 곧 불의의 도구로 살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방식 곧 의의 도구로 살 것인지 선택하게 되죠. 그때 그리스도인은 적극적으로 은혜의 방식 곧 의의 도구로 사는 길을 좇아야 한다는 것이죠. 물론 가정이나 세상 속에서 곤란을 겪으면 사랑보다 미움이 싹트고, 이해보다 불편이 더 앞서죠. 그래서 이렇게 고백을 하죠. “말씀대로 살아보려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그렇죠. 이것이 우리 자신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때 두 가지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잘 안 되기 때문에 쉽게 포기해 버리는 그리스도인, 반대로 그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자기를 죽여가는 그리스도인 말이죠.
그래서 14절에 이렇게 말씀해 주죠.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은혜 안에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구하며 사는 자들이죠. 이 땅에 살아도 하나님의 나라를 실제 구현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그것이 과연 어떤 모습인지는 사울 왕과 다윗 왕을 예로 들 수 있죠. 그들의 공통점은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결말은 판이했습니다. 사울은 질투의 대상이었던 다윗을 잡는 데 평생 혈안이 되어 살았죠. 그만큼 사울은 은혜의 영향력 아래에서 불의의 병기 곧 시기와 질투와 미움에 자기 자신을 내주고 말았던 것이죠.
그런데 다윗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는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그래서 골리앗을 쓰러트리는 공적을 세웠지만 곧이어 사울의 칼날을 피해 다니는 도망자 삶을 살았죠.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렇게 도망자의 삶을 살면서도 현실 속에서 하나님 앞에 의의 병기로 드린 자였죠.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을 때에도 죽이지 않았던 말입니다. 악으로 악을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대한 것 말입니다. 물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죄를 은폐하려고 한 적도 있었죠. 하지만 그렇게 불의의 병기가 되는 그 순간에도 그가 은혜 아래 있었기에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그를 책망하여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 아래 거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5-16절입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사울이 그렇게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더 깊어졌는가? 아니죠. 그는 다윗의 선대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거절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다윗은 숙적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음에도, 기름 부은 왕을 죽이는 것이 옳지 않다며 칼을 거두고 선대했죠. 그것이 곧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른 사울의 모습이고, 순종의 종으로 영생에 이른 다윗의 모습이라는 점이죠.
17-18절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사울은 죄의 종의 길, 다윗은 의의 종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마침내 사울은 왕좌에서 내려오고, 다윗은 새로운 은혜의 시대를 열어갑니다. 이것이 곧 주님의 피값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우리 자신들이 본받고 좇아야 할 하나님 나라의 질서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곧 과거의 내가 죽고 예수님과 접붙여 영생의 삶을 사는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주님의 은혜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나의 기준이 아닌 주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9-20절을 표준새번역으로 보겠습니다. “여러분의 이해력이 미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방식으로 말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겨서 불법에 빠져 있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종으로 바쳐서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죄의 종일 때에는 의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의의 종으로 사는 삶을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현실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울과 같이 행동하고자 할 때가 있죠. 어쩔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불의의 무기가 되려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성령님의 음성을 좇아 나의 고집과 혈기와 자존심과 자아를 죽이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의의 병기가 되는 삶입니다. 물론 내가 하려고 하면 잘 안 됩니다. 그때마다 주님께서 나를 이끄시는 음성과 감정과 의지를 갖고 결단하면 의의 병기로 드릴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바쁜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현대인들은 어떻게 의를 좇아 살 수 있을까요? 성경에 나오는 악(惡)의 헬라어 원어 ‘포네로스(πονηρὸς)’는 ‘바쁘다’라는 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악의 근원은 사람을 분주하게 만들어 정신 차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죠. 분주함은 내 영혼의 상태를 파악하지 못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독대할 기회조차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악(惡)이 곧 죄(罪)가 되고, 마침내 사망(死亡)이 되게 하는 것이죠. 사울은 다윗을 바쁘게 쫓아다녔고 결국 죽었습니다. 같은 시간, 쫓기던 다윗은 주님을 향해 수많은 시와 찬양을 지었고 기도를 올렸습니다.
본문 21-22절 말씀이 그것이죠.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사울이 악의 열매 곧 증오와 죽음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거룩한 열매 곧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영원한 열매를 얻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바쁨 가운데서도 다윗은 하나님 앞에 독대하는 시간을 통해 끝까지 선을 추구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본문 23절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선물)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오늘도 우리의 현실은 퍽퍽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당장 열매가 없다고 의의 삶을 포기하면 안 된다는 것이죠. 오히려 그 삶을 붙들고 씨름하며 살아야 하죠. 때로는 악에 동조하는 가족들도, 불친절한 직장동료들도, 성령 안에서 품을 수 있도록 몸부림쳐야 하죠. 그때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영생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실 것이고, 실은 그 삶을 산 내가 영생의 열매 안에 있다는 사실이죠.
*사랑하시는 주님.
죄로 인해 죽은 우리에게 가장 고귀한 영생의 선물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은혜의 감격도 현실 앞에 마주하면 의의 도구로 살기를 포기하고 싶을때가 많습니다. 사울처럼 핑계를 대며 육체의 소욕을 좇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다윗처럼 주님의 은혜에 매여 살게 해 주시옵소서. 그때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의의 열매 영생의 열매를 맺게 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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