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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에게 구원의 믿음이 주어진 게 할례시였는가? 할례받기 이전의 무할례시였는가? 무할례시였다고 했죠. 하란에 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와 주셔서 그를 불러내주셨고, 그때 믿음을 좇아 가나안 땅으로 옮겨간 것 말이죠.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행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가 100세가 되어 이삭을 낳기까지 믿음이 약해지거나 흔들리지 않았는가? 그도 수없이 흔들렸죠. 그런데도 어떻게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가? 흔들리고 넘어질 때마다 주님께서 은혜로 붙잡아주셨기 때문이죠.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의 본보기요, 우리 자신의 본보기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선택해주셨고 지금까지 붙잡아주고 계시기에 흔들리고 넘어지는 가운데서도 믿음의 삶을 굳게 살아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에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무엇에 관한 말씀입니까? 주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책임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을 누리는 것’, 그것이 믿음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특권이자 책임이죠.
그런데 하나님과 나 사이에 화평이 되면,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도 화평이 나타나야 하는 건 당연한 것이죠. 창세기 21장에서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았습니다. 당시 중동의 우물은 생명이자 재산입니다. 히브리어로 우물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베엘’이고 다른 하나는 ‘보르’입니다. ‘베엘’은 지하에서 솟아나는 우물물이고 ‘보르’는 비가 와서 저장해 놓는 ‘물저장고’죠. 팔레스타인 땅의 우물은 물저장고가 많죠. 그런데 아브라함이 판 우물은 그야말로 지하에서 쏟아나는 샘물이었습니다. 퍼도 퍼도 마르지 않는 저금통장과 같은 것 말이죠. 그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는가? 아비멜렉과 싸워서 자기 우물을 빼앗았는가? 그렇지 않죠.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값을 치러서 자기 우물로 확정하죠. 그 아들이삭의 시대에도 아버지 우물을 두 번씩이나 뺏앗겼지만 세 번째 또 파서 ‘르보홋’이라 이름 하죠. 그만큼 아브라함도 이삭도 다른 사람들과 화평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화평은 하나님과 나 사이 또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나와 나 자신의 관계에서도 나타나야 한다는 점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내가 나 자신과 화평하지 못하면 나는 나의 노예가 된다는 점입니다. 내 안의 열등감과 화해하지 못하면 열등의식을 감추기 위해 폭력적이 되고 거칠어진다는 점이죠. 저에게도 성인아이 기질이 남아 있었을 때, 그것이 열등감으로 드러나면, 거친 생각과 거친 말과 거친 심성을 그대로 표출할 때가 있었습니다. 이른바 저의 연약한 고집, 자아, 열등감이라고 할 수 있었죠.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되고 자아와 화평의 관계가 되면, 나의 연약한 자아는 여전히 흠결 투성이 이지만 이런 나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성취된다는 사실을 믿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때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기란 쉽지 않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사랑하기가 쉽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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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두 번째 특권이자 의무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2절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주일날 살펴봤지만 애굽 전역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마지막 장자를 쳐서 죽이신 것, 그러나 이스라엘 땅에는 아무런 재앙이 없었던 것, 그 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가로막혔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 왔을 때, 왜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셨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만 천하에 드러내여 그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영광을 받으신 것 말이죠. 그만큼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삶의 초점을 ‘하나님의 영광’에 두고 살아간다는 것이죠.
세 번째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의무는 ‘협착한 길’을 좇는다는 것입니다. 본문 3-4절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니라.” 본문은 환난을 즐거워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말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그날로부터 모든 환난과 고난과 고통과 어려움이 사라지는가? 그렇지 않죠. 애굽에서 구원받아 가나안 땅을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영적으로 본다면 천국에 입성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그들에게 시험과 고통과 괴로움이 없었습니까? 첫 번째 환란과 고난과 고통이 바로 홍해 앞에 서는 것이었죠. 그 뒤에도 광야 40년 삶, 그 광야 40년 삶을 ‘광야교회’라고 사도행전에서 말해주는데, 그 40년 신앙생활해 가면서도 숱한 고통과 괴로움과 환란에 직면해야 했던 그들이죠. 하물며 우리 자신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죠. 하지만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새번역에서는 환란을 ‘자랑한다’고 번역하고 있고,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기뻐한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왠지 적극적인 의미를 띠고 있지 않습니까? 왜죠? 환난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연단이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져오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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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무리 믿음이 훌륭한 사람이라 해도 환난은 우리를 의심케 하고 지치게 만들죠. 작은 환난이야 버틸 수 있지만, 큰 환난 앞에 장사가 없습니다. 더 이상 인내하기 힘들고, 더 이상 회의감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5절에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넘치도록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심이 싹트고, 고난이 길어지고, 환란이 극심해질수록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그 환란과 고통을 모면케 해 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넘치게 부어주시도록 구하는 것이죠.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치고 태풍이 불어쳐도 부모의 품 안에 있는 어린 아이는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바울이 유라굴로 광풍 속에서 14일간 떠밀려 다녔어도 걱정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죠. 그 환란과 고통속에도 주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확신한 것 말이죠.
그래서 본문 8절에 이렇게 권면해 줍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란에 머물러 있는 아브라함을 불러주시고 의롭게 여겨주셨듯이,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 제물삼기까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께서 어찌 우리가 겪는 시험과 환란을 모른 채 하시겠냐는 것이죠.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죠.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믿음의 사람 곧 순종의 사람으로 세워가는 과정 속에서 그 환란과 시험을 통과하게 하신다는 뜻이죠.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십자가의 제물삼기까지 확증해 주신 그 주님께서 어찌 우리가 간절히 구하는 바를 들어주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본심은 시험과 환란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죠.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가3:33)하신 말씀처럼 환란과 시험 이후에 분명코 미래와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죠. 그래서 11절 마지막 부분에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하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구원받은 특권과 책임이 있지만 때로 흔들리고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시험과 환란으로 인해서 주님을 의지하기조차 힘들 때도 있죠. 하지만 독생자까지 내어주면서까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해 주신 그 주님을 향한 시선을 견지해야 하죠. 모세가 홍해 앞에서 손을 펴 올린 것이 바로 그런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환란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소망하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주님. 구원받은 자녀로서 하나님과도 사람과도 화평의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살게 하시고, 시험과 환란 가운데서도 독생까지 내어주신 주님을 신뢰하며 오직 주님이 주신 소망을 품고 살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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