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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고린도의 외항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고, 에베소에 잠깐 들린 다음에 곧장 가이사랴에 도착하여 수리아 안디옥교회로 돌아왔습니다. 물론 고린도에서 주님의 복음 앞에 감동을 받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도 함께 에베소로 따라 왔지만, 바울은 그곳 에베소에 두 부부를 놔두고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만 데리고 수리아 안디옥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얼마 후에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떠나지 않았습니까? 3차 전도여행의 목적지는 2차 전도여행 때 가고자 했던 아시아 지역이었습니다. 물론 2차 전도여행 때 성령님께서는 아시아가 아닌 마게도냐 지역 곧 유럽대륙으로 바울 일행을 이끄셨습니다. 그래서 이번 3차 전도여행의 길목은 아시아 지역으로 가고자 2차 전도여행 때 밟았던 노선을 따라 수리아 지역 길리기아 다소 그리고 그 왼쪽의 갈라디나 남부지역인 더베-루스드라-이고니온-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다가, 소아시아의 첫 번째 지역인 에베소에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 읽은 사도행전 18장 후반부에는 그 에베소에서 활약하던 한 인물에 대해 조명해주고 있었습니다. 누구였습니까? 그렇죠. 아볼로라는 사람이었죠.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출신(행18:24)으로 신약시대의 초대교회에서 유명한 설교자였습니다. 그 당시 아볼로의 고향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 대왕이 건설한 도시로서 주민의 상당수가 유대인이었고, 구약성경의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이 편찬된 곳이기도 하죠. 그곳 알렉산드리아는 해상과 육로가 모두 열려있는 입지조건 때문에 상업이 발달했고, 헬라문화의 상당한 철학자들이 모여들어 아테네에 버금가는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후에는 영지주의와 헬라철학으로부터 기독교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거대한 신학의 줄기가 형성이 되었는데, 그때 배출한 알렉산드리아 학파 출신이 클레멘트(A.D.150-215년), 오리겐(185-254년), 아타나시우스(293-373년)등이 있죠. 그들은 초대교부 중에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아볼로가 바로 그곳 출신으로 언변이 좋고 구약 성경에 능통한 자였던 것이죠. 더욱이 그는 일찍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배워서 에베소에서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가 전한 주님의 복음을 들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그의 복음이 단편적인 복음임을 알고 주님의 온전한 복음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복음을 깨달은 아볼로는 이후에 아가야 곧 ‘고린도’로 건너가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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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시점에 바울 일행이 그 에베소에 들어온 상황인데, 본문 1-2절이 이렇게 소개합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여기에서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녔다는 것은 갈라디아 남부에 이어 비두니아 지역 곧 비시디아 안디옥 지역을 말하는 것이고, 이제 에베소로 왔는데, 그곳에서 ‘어떤 제자들’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이때 만난 ‘어떤 제자들’은 누구일까요? 바울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아니라 그 이전에 활약한 아볼로를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온전한 주님의 복음을 들은 제자들이 아니었던 것이죠. 한마디로 말하면 아볼로가 그들을 제자로 키워낸 셈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바울이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주님을 믿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까?”하고 말이죠.
그때 그들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했습니다.”하고 대답을 하죠. 그만큼 그들은 아볼로를 통해 주님을 배우긴 했어도 온전치 못한 복음을 전해 들은 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재차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슨 세례를 받았습니까?”하고 말이죠. 그러자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하고 본문 3절에서 대답하죠.
그때 바울은 본문 4-5절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말한 요한의 세례가 무엇입니까? 요한이 요단강에서 베푼 세례를 말하는 것이죠. 그때 요한은 많은 사람들에게 회개의 삶을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요한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누가복음 3장 16절에서 그때의 세례요한이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다.”하고 외친 것으로 증언하죠. 씻는 물보다 태우는 불이 더 강한 것처럼, 세례 요한의 세례는 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없지만, 예수님의 세례는 사람의 내면에 있는 동기까지 근본적으로 변하게 하시는 세례라는 점입니다. 지금 바울이 아볼로의 제자들에게 한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되고, 6절에서는 그들에게 바울이 안수할 때 성령이 임하여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는데, 그 수가 12명 쯤 되었다고 밝혀주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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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가 중요하겠습니까? 왜 성령세례가 더 중요한 것입니까? 세례 요한의 세례는 단지 인간 요한의 제자를 삼는 세례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세례이기 때문이죠. 더욱이 성령세례는 인생의 주권이 바뀌는 세례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그것과 같은 격입니다. 내가 이전까지는 내 인생의 자동차를 내가 운전하고 살아왔습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원하는 곳으로 자동차를 몰고 다니죠.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에 대해서 듣고, 그 분에 대해 부분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때 그분이 내 조수석까지 찾아오셔서 내 인생의 길을 코치해주십니다. 나는 그분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운전하죠. 그런데 문제는 아직까지도 내가 주인이 되어 자동차를 몰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분의 코치를 받긴 하지만 자동차의 주인이 바뀌지는 않은 것이죠. 그런데 예수의 영 곧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이란 내 인생의 자동차를 주님이 운전하시도록 내어 맡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그 때부터는 내 인생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확증해 주시는 것이죠. 바로 그것이 성령세례입니다.
그런데 성령세례를 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두 가지 선물이 있죠. 본문 6-7절에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사람쯤 되니라”
성령세례를 통해 주시는 첫 번째 선물이 무엇입니까? 방언이져. 두 번째 선물은 예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외부적인 은사로만 이해할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내적인 은사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일날 오후 시간에 말씀을 드린 바 있죠. 다시 말해 방언은 ‘소통하는 능력’ 즉, 사람과의 공감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예언이란 사람에게 ‘감화력’을 주는 것으로 승화돼야 하는 것이죠. 그만큼 성령을 받은 자는 타락으로 인해 상실된 하나님과의 소통이 회복이 되고, 그때부터 주님의 마음을 공감하게 됩니다. 그렇듯이 이제부터는 더 많은 사람과 소통이 가능해지도록 하고, 또 더 많은 사람과 공감력이 깊어지는 삶, 그것이 성령세례의 확실한 표증이 되는 것입니다. 바벨탑에서 죄악 때문에 나뉘게 된 인간의 언어가 성령세례의 방언을 통해 회복된 것처럼, 진정한 성령세례의 사람은 소통력과 공감력이 확장되는 걸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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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무엇입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세례를 받은 자인가?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생명의 세례를 받았는가? 그리고 성령의 세례를 받은 자인가? 하는 점이죠.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세례가 남아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는데 성령세례가 더없이 중요하죠. 그런데 그 표증으로 받은 방언과 예언은 내적인 의미와 인격으로까지 승화돼야 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주님의 은혜 안에서 주님과 소통하듯이 다른 사람과 더 많이 소통하며 살아야 하고, 또 내가 주님의 말씀에 감동과 감화를 받듯이 내 말과 내 삶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감화를 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성령세례를 받은 자라는 점입니다. 오늘도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그렇게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감화를 주는 그런 은혜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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