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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사도들을 통하여 역사하게 하신 성령님의 행전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역사와 능력이 사도들을 덮고서 역사하신 복음의 행적이었죠.
물론 사도들 스스로는 예루살렘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복음이 예루살렘 안에서만 충만하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당신의 증인이 되는 데에는 전혀 무감각했던 것입니다. 그 까닭에 주님께서 그들을 흩으신 방법이 있었죠. 바로 초대교회에 일어난 스데반 집사의 순교와 교회의 박해였죠.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촉발된 교회의 박해를 통해 많은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빠져나가 주님의 복음을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전파할 수 있게 되었죠.
그렇다면 그 보다 더 먼 지역의 사람들, 곧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벗어나 ‘땅 끝’의 사람들에겐 어떤 경로를 통해 주님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이 바로 그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촉발된 교회의 박해로 인해 주님의 제자들 다시 말해 12제자가 아닌 다른 제자들이, 더 먼 지역에까지, 다시 말해 그 당시 예루살렘의 입장에서 보면 ‘땅 끝’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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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9절입니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사도행전 7장에 일어난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촉발된 교회의 핍박을 맞이해 많은 주님의 사람들이 땅 끝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제자들이 어디로까지 흘러들어가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합니까?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주님의 복음을 전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베니게’는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가사-욥바-가이샤라-톨레마이-두로-시돈-베니게로 이어지는 지중해 해안가를 따라 자리잡고 있는 최북단 지역을 가리키는 곳입니다.
‘구브로’는 또 어떤 곳일까요? 구브로는 지중해 동북부에 자리잡고 있는 길이224km, 폭 69km에 이르는 현재의 ‘키프러스’(Cyprus) 섬을 가리키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에서 가장 가까운 룻다로, 또 룻다에서 지중해 해안가 남쪽인 욥바로, 또 욥바에서 가이샤라, 가이샤랴에서 톨레마이로 톨레미아에서 두로와 시돈으로 그리고 ‘베니게’까지 들어가사 복음을 전파한 주님의 제자들이 있었고, 또 다른 제자들은 점점 더 북쪽으로 향해 올라가다가 다메섹보다 더 위쪽인 ‘수리아’ 다시 말해 ‘시리아’의 안디옥에까지 들어가서 그곳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 중에 어떤 제자들은 그 수리아 안디옥에서 배를 타고 지중해 동북부에 자리잡고 있는 구브로, 곧 키프러스 섬까지 들어가서 주님의 복음을 전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 제자들에게 박혀 있는 고정관념이 문제였습니다. 그렇게 이방 땅까지 들어가서 주의 복음을 전하는데도, ‘같은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어제 읽은 사도행전 11장 전반부에 보인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제자들이 베드로의 행위를 보고 비난하는 것과 똑같은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그렇게 말했죠. 어떻게 로마 장교 백부장과 그 집안 사람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세례까지 베풀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마실 수 있냐고 말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주님께서 시키시는데 내가 어찌 막을 수 있겠냐면서, 그렇게 세례를 베푼 일이라고 증언을 했었죠.
중요한 것은 오래된 신앙인일수록 내면에 자리 잡은 전통을 하나님처럼 여기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교회의 전통이 중요하긴 하지만, 자칫 주님의 복음까지 흔들어버릴 수 있는 위험요소가 교회의 좋지 않는 전통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주님의 복음 앞에 깨어있어야 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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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20절 말씀은 그들과는 다른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당시 수리아 안디옥, 다시 말해 ‘시리아 안디옥’은 이스라엘의 북쪽 사마리아보다 훨씬 위쪽에 자리잡은 도시입니다. 당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로마 제국의 3대 도시 중 하나가 수리아 안디옥이었습니다. 그런데 지중해 북동부에 자리잡고 있는 구브로 출신과 아프리카 구레네 출신이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곳 수리아 안디옥까지 가서 헬라인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파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명실상부한 이방인 선교사역의 첫발걸음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기대하고 계셨겠습니까?
그와 같은 주님의 제자들이 이방 지역의 이방 사람들, 이방 지역에 사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 사람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자, 주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주를 믿고 돌아왔다고 전해줍니다.
그때 예루살렘교회에서 어떻게 대응합니까? 이미 베드로의 간증을 들은 바가 있기 때문에, 이제는 이방인 선교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죠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에 가장 믿을만한 바나바를 그곳 시리아 안디옥에 보내게 되죠. 본문 22-23절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안디옥에 가서 교인들에게 복음을 가르쳤고, 복음 안에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른바 교회가 뿌리를 내리고 터전을 세우는데 크게 공헌한 제자였죠.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향 다소에서 칩거하던 바울에게 친히 찾아가 시리아 안디옥교회의 공동목회자로 섬기자고 청을 하죠.
그렇게 해서 본문 25-26절은 이런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더라” 바나바와 바울이 함께 공동목회자로 안디옥교회를 섬기며 이끌어가는 데 그때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얻게 됩니다. 그야말로 진심과 신실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그만큼 시리아 안디옥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처럼 한 알 밀알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훗날 이방 선교의 중심축을 이루는 공동체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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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렇게 좋은 소식이 전해 오는데, 예기치 않은 위험이 감지됩니다. 본문 27-28절입니다.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만일 하나님께서 앞으로 닥칠 큰 문제를 우리에게 알려주신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선 알려주셨기에 감사하고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또 가능하면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겠죠? 그런데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은 천하에 닥칠 큰 흉년 앞에 자신의 안전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또한 재난을 막아달라고 간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주님을 신뢰하며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일들을 찾습니다. 29-30절입니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안디옥교회의 성도들이 왜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는지 여실히 깨닫게 해 주지 않습니까?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무늬만 목사요 장로요 권사요 집사인지, 아니면 누가 뭐래도 신실한 그리스도인인지, 그런 모습들을 통해 깨닫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의 밀알로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하루를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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