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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입니다. 사도들의 행적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즉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주인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공이며, 사도들이 핵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었는지가 핵심입니다.
사도행전은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1장부터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7장 초반부까지 계속되었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복음전파, 곧 교회의 시작 말입니다.
그리고 7장에서 스데반 집사의 순교와 더불어 시작된 교회에 박해가 시작되었고, 그것은 예루살렘을 넘어 온 유다와 사마리아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12사도가 아닌 스데반과 빌립 집사와 같은 이들이 있었죠. 그것이 곧 8장에서 활약한 빌립 집사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9장에서도 온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그 중심 인물이 사울이라는 청년, 후에 바울이 된 사람이었죠. 그의 회심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는 게 사도행전 9장인데, 오늘 본문부터는 다시금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사도들의 복음 전파에 대한 이야기가 12장까지 나옵니다. 그리고 13장부터는 다시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한 사도들의 행적이 끝까지 이어집니다.
지난 시간에는, 그릇된 자기 신념에 사로잡혀 있던 사울이 빛이신 주님을 만나 회심하고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으며, 다메섹과 예루살렘을 거쳐 자신의 고향인 다소로 낙향하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울에게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는 동안, 사도 베드로는 무슨 일을 행하고 있었는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32절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여기서 그 때에는 바로 사울이 회심하고 복음을 전하다가 다메섹과 예루살렘을 거쳐 자신의 고향인 다소로 낙향한 그때를 말합니다. 그때 베드로는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 내려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왜 내려갔는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룻다에서 중풍병에 걸린 애니아를 고쳐주는 사건을 통해서 애니아를 치료해 주시려는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성령께서 베드로를 룻다로 이끄셨다고 우리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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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3절입니다.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중풍병으로 고생한 기간이 여덟 해, 8년이라고 했습니다. 말이 8년이지 병상에 누워있는 애니아와 그를 간병해야 하는 가족들에게 8년이란 세월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룻다에서 애니아를 본 순간, 베드로는 애니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34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 대 곧 일어나니” 베드로는 애니아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정돈하라'는 헬라어 '스트론뉘오'는 '펴다' '깔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리를 편다, 자리를 깐다는 의미는 뭔가를 위해 '준비한다'는 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애니아의 입장에서 8년 동안 깔고 덮고 생활했던 그 자리를 준비하라는 말은 더 이상 그 자리가 필요없으니 정리하라는 말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애니아의 중풍병을 치료해 주시면서, 그 자리를 정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애니아의 삶의 자리를 정리한다는 것은 곧 애니아의 육신의 병을 고쳐주시는 것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어쩌면 육신의 병고침과 더불어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바로 내 삶의 자리를 정리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육신의 병은 치료되었으나, 내 마음은 여전히 중풍병으로 누워있던 때와 동일하다면 육신의 병이 고침받은 것이 진정한 고침이 될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육신의 병보다 더 큰 문제는 마음의 병일 수도 있습니다. 내 삶의 문제를 정리정돈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질병의 치유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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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베드로는 룻다에서 가까운 욥바로 건너갑니다. 이때 베드로가 욥바로 건너간 이유를 36절 이하에서 이렇게 알려줍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베드로가 욥바로 건너간 이유는 욥바에 있는 여제자 다비다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간 이유는 다비다가 죽었기에 문상하러 간 것이 아니라, 죽은 다비다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본문 40절입니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다비다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36절에 보면,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다비다(도르가)가 죽었을 때, 그의 죽음을 슬퍼한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내어 보인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39절에 보면, 다비다가 살아 생전에 만들어 주었던 속옷과 겉옷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비다로 인해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그의 선행과 구제의 증인으로 나선 것입니다.
룻다의 애니아를 고치고, 욥바의 다비다를 살린 베드로의 치유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룻다의 애니아는 욥바의 다비다와 다른 점이 많았습니다. 먼저 욥바의 다비다는 여제자로 소개하고 있는데 반해 룻다의 애니아는 그런 소개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일 수 있고 혹 믿음이 있을지라도 열심있는 신앙의 소유자는 아닐 수 있습니다. 또한 욥바의 다비다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에 열심인 사람이었는데 반해 룻다의 애니아는 그런 소개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베드로를 통해 치유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 치유의 근거가 그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치유의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지, 사람의 선행이나 믿음에 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나의 질병이나 고통의 이유가 내 믿음 없음도 아니고 내 착한 행실의 부재 때문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에게 닥치는 질병이나 고통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것이지 믿음이나 인간의 노력으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질병을 통해서건 고통을 통해서건 그 무엇을 통해서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룻다의 애니아, 욥바의 다비다를 통해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를 성경은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먼저 35절입니다.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또 42절에서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성경은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 주를 믿는 이들이 많아지는 역사가 일어난 곳마다 주님이 함께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큰 희망인 이유는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의 구원자 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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