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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 집사가 순교를 당하고,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죠.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죽이는데 주모자 역할을 한 이가 사울이었고, 그가 교회를 잔멸하는 일, 곧 멧돼지가 옥수수 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는 것과 같은 박해의 선동자로 초대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통해 주님께서는 당신의 복음을 유대와 사마리아 땅까지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그 중심의 한 인물로 스데반 집사와 같은 빌립 집사를 사용하셨죠.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 땅까지 가서 주님의 복음을 전했는데, 그때 민간이 기사와 표적이 일어났죠. 그것은 곧 주님의 복음이 생명의 복음이요, 주님의 복음이 치유의 복음이요, 큰 기쁨의 복음이 되게 해 주셨던 것이죠.
그 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며 세례를 받았는데, 그 모습을 본 마술사 시몬도 그 일에 놀랐죠. 여태껏 자신은 사람을 속여서 그렇게 존중받고 살아왔는데, 그 일은 사람의 인생 내면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생명력임을 알았기 때문이죠. 그때 그도 세례를 받았는데, 그 이상의 놀라운 사건도 목격하게 되죠. 사마리아 땅에 구원의 은총이 주어졌다는 소식을 접한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 곧 베드로와 요한이 그것을 확인코자 왔고, 그것이 사실임을 알고서 그들에게 안수를 했죠. 그때 성령께서 임하셨는데, 그 모습을 본 마술사 시몬은 그것을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죠.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은 “너는 여전히 악독이 가득하고 불의에 매여 있는 자다”하면서, “너의 악함을 회개하고 기도하라”고 했죠.
무엇을 일깨워주는 사건이었습니까? 사도들의 안수를 통해 성령님께서 임하시는 그 모습이 마치 사도들의 능력인 것처럼 생각했고, 그것을 돈을 주고 자기 것으로 삼으려 했던 사람이었죠. 그만큼 하나님의 능력을 자기 방식으로 컨트롤 할 수 있는 분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마술사 시몬의 마음 뿐이라 할 수 있겠냐는 것이죠. 우리 속에 도사리고 있는 나의 탐욕과 욕망도 그럴 때가 있다는 사실이죠. 그렇기에 우리 인생의 모자이크판의 색지를 내가 붙이려고 하기보다 언제나 하나님께 내어맡기는 자세가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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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빌립 집사와 에디오피아 내시와 만난 사건을 전해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26절에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빌립 집사가 예루살렘에서 온 베드로와 요한 사도를 만난 이후의 모습이죠. 베드로와 요한은 이때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안수하여 성령이 임하는 모습을 봤고, 그 이후에 곧장 예루살렘의 교회로 돌아간 것 같죠. 하지만 빌립은 아직 그 사미라아 성읍에 남아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때 성령께서 남쪽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서 ‘가사’로 내려가라고 전합니다. 그 길목은 광야라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27-28절을 보면 빌립 집사가 어떻게 합니까?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의 감동과 지시하심에 순종했는데, 그 광야 길목에 누가 있었습니까?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의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이제 돌아가는 길목이었던 것이죠. 바로 그 사람을 만나도록 성령님께서 지시했던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같으면, 나 같으면 과연 그 길목을 향해 갔겠습니까? 그 길목을 분명 ‘광야’라고 말씀하셨는데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편하고 안전한 길을 원하지 않습니까? 내가 주님의 모자이크판이 되길 원하고, 주님께서 붙여나가시는 색지를 잘 붙여주시길 기도하지만, 실은 광야와 같은 삶은 아니었다면 하는 게 우리 자신의 바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빌립 집사는 그 길목이 광야라고 하셨는데도 순종하며 나아갔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성령님께 전적인 순종의 자세를 보여주는 모습이죠.
그런데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지시하신 곳,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그 길목이 광야요, 거기에 에디오피아 내시가 있을 것이라고는 말씀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무엇을 깨닫게 해 주시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를 향한 계획을 다 보여주시거나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완성된 모자이크판을 보여주는 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저 한 걸음 한걸음 주님의 말씀을 좇아 나아갈 때에 그 다음 단계를 보여 주시는 분입니다. 모든 그림을 완성한 채 내 인생의 비전을 보여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저 색지 하나 하나를 붙여나가게 하신 그 다음 그 다음 그 다음 단계를 보여주시면서 나가게 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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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빌립이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갈 때, 누구를 만났습니까? 에디오피아 내시였죠. 그가 어떤 사람임을 소개하고 있습니까? 여왕 간다게의 국고, 곧 왕의 곳간 전체를 책임지고 있던 관리자였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하러 왔다가, 이제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있다고 했죠. 과연 그런 위치에서 그가 탄 수레는 어떤 수레였을까요? 한 나라의 재무장관으로서 그가 광야 길을 오가며 타고 간 수레 역시 최고급의 수레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재물과 최고급의 수레는 생명의 말씀을 간절히 찾는 그의 영혼을 채워 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들도 자기 인생의 수레를 타고 이 세상이라는 광야를 지나가는 자인데, 어떤 사람은 에디오피아 내시처럼 최고급의 수레를, 또 다른 사람은 볼품없는 수레를 탈 수 있겠죠. 하지만 그것이 어떤 수레이건 간에 그것 자체가 내 영혼을 온전하게 채워 줄 수는 없다는 것이죠. 오직 주님의 복음만이 내 영혼을 채워주십니다. 그는 또 유대인이 아닌 이방 흑인 사람이었고 내시였습니다. 율법의 관점으로 그는 유대인과 상종조차 못할 이방인이고,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었죠.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예배하러 예루살렘 성전까지 왔는데 어떻겠습니까? 그는 유대 공동체에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변두리에 머물 수밖에 없었겠죠. 예루살렘의 성전예배와 축제가 벌어져도 외로운 이방인에 지나지 않았다는 거죠.
그러니 결국 씁쓸한 마음으로 자기 고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를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가진 그에게 빌립집사를 보내셨죠. 그래서 29절에 성령께서 빌립에게 그 내시가 타고 가는 수레에 가까이 나아가라고 말씀하시고, 30절에서는 빌립은 그냥 걸어간 게 아니라 “달려갔다”고 증언해 줍니다. 왜죠? 수레를 타고 가는 그를 따라잡고자 달려간 것이었습니다. 사실 예루살렘에서 북쪽 사마리아까지는 70km가 걸리는 거리이고, 예루살렘에서 가사까지는 또 70km가 걸리는 거립니다. 140km를 지금 빌립 집사가 걸서 온 것입니다. 그에 비해 에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는 1,500km가 걸리는 거리죠. 병거를 타고 왔어도 최소한 5일 이상이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그만큼 서로가 힘든 거리요, 지친 거리였습니다. 그런데도 빌립 집사는 오직 성령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나아간 것이었습니다.
그때 에디오피아 내시는 이사야 53장 7-8절 말씀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부분이 본문 32-33절이죠.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깍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그만큼 그는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목마른 자였던 것이죠. 주님은 그런 자를 위해 빌립 집사를 140km나 걸리는 거리에도 불구하고 그를 찾아가 복음을 전하게 하고, 세례까지 베풀게 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2천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영생에 대해 목마른 자가 있을 때, 주님을 위한 일꾼을 그에게 보내서 주님의 생명을 전하는 통로로 사용하길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에디오피아 인생 속에서 빌립집사를 만나게 될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성령님께서 빌립 집사를 에디오피아 내시를 위한 개인전도자로 보내실지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두 사람과의 만남은 하나님께서 만들어가시는 모자이크 그림판이라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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