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발췌) 김양재 목사님의 〈그럼에도 살아냅시다〉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날마다 큐티하는 여자’로 널리 알려진 분당 ‘우리들교회’ 김양재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녀는 장사하는 아버지를 따라 4년 정도 어머니와 헤어져 살았습니다.
어머니와 떨어져 사는 것에 대한 불안 때문인지, 그녀는 아버지 돈을 훔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야단과 매를 맞아도 도벽이 끊이지 않았고, 그런 죄의식으로 밤에 화장실까지 가는 야뇨증까지 생겼습니다.
그러던 중에 집에서 제일 먼저 둘째 오빠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오빠의 전도로 그녀도 초등학교 6학년 때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로 좀체 끊을 수 없었던 도벽이 치유되었습니다.
그녀는 학창시절에 부모님의 구원을 위해 금식과 새벽기도를 하며 믿음을 지켰고 꼭 믿음의 결혼을 결단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친정 아버지를 속인 체 불신남편과 결혼을 해버렸죠.
그 남편과 결혼하기 전에 혼전관계를 가졌고, 언변이 뛰어나고 용모가 준수한 그 남자에게 끌린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남편이 이미 두 번의 결혼과 이혼 전력이 있었고, 그 외도 여자 관계가 복잡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도 5년의 동거 끝에 가정을 이뤘고, 자신이 믿으니까 남편도 따라 믿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었죠.
하지만 자기 예상과는 달리 남편은 여전히 세상 죄를 먹고 마시는 삶에 취해 살았죠.
그렇게 동거 중에 큰 딸이 태어났는데, 그 남편은 다른 여자와 혼인신고까지 해 버렸습니다.
그 일로 친정에서 그녀와 남편과 아이를 떼어놓으려고 했고, 그때 큰 딸은 상처받아 애정결핍증을 앓게 되었죠.
그렇게 살아가는데, 결혼생활 18년이 넘도록 도무지 변화가 없는 남편을 보며 그녀는 영적인 공허감에 빠졌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못 살아온 게 두렵고 떨렸습니다.
어떻게든 회복하고 싶어서 남편의 구원을 위해 조금씩 기도를 드렸죠.
하지만 그 남편은 악에 빠져 살았고, 주일예배도 등한히 한 채 유원지 영업으로 폭리를 취하며 살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 부부가 영업하던 한탄강에 두 번씩이나 큰 홍수를 부어서 모든 걸 쓸어가버렸습니다.
그 후에 그녀는 자기 남편에게 교회에서 집회를 여는데 한 번만 참석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했습니다.
그때 남편은 마지 못해, 자기와 살아준 것에 고마운 보답이라며, 집회에 나가게 되었죠.
그런데 그때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가 임했고, 남편은 그때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만났는데, 믿음이 깊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돈을 더 벌 생각에 성매매하던 건물을 경매로 낙찰받았죠.
그런데 그 남편은 건물의 전 주인이 휘두른 흉기에 맞아,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깨달음) 어떻습니까?
그런 고통과 힘든 일을 겪었다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신앙을 포기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때 그녀에게 찾아와 남편의 죽음에 대해 그렇게 말씀해주셨다고 하죠.
“네 남편의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할 것이다”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 남편이 병상에서 죽어갈 무렵에 그렇게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주님, 나 같은 죄인도 어디에 쓸 데가 있으면 써 주세요”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남편의 기도대로 남편의 영혼을 건져주셨고, 김양재 목사님의 간증 속에 그 남편이 등장합니다.
그만큼 그 남편은 누군가 힘들고 지칠 때, 어려움에 처할 때, 그를 격려하는 통로로 사용되고 있는 셈입니다.
(적용) 우리가 김양재 목사님의 간증을 통해 깨닫게 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녀의 남편이 술과 폭력에 빠져 있을 때, 결코 그 자리를 이탈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부부의 동거중에 태어난 큰 딸이 애정결핍 때문에 동생을 힘들게 하지만, 그 속에서도 엄마의 자리를 지켜준 것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이란 자기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믿음이란 거창한 게 아니라, 내게 주어진 부모의 자리, 내게 주어진 일터의 자리, 내게 주어진 교회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습니다.
빌립보의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의 귀신을 내 좇아준 일로, 그 상전들이 달려와 바울과 실라를 시장법정에 끌고갔죠.
그때 그 상전들은 바울과 실라가 유대인으로 로마법도 따르지 않고 로마법과 어긋나는 풍속을 퍼트린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고라의 최고 관리는 아랫 사람을 시켜 바울과 실라의 옷을 벗기고, 심한 매질을 가하도록 했죠.
물론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죠.
바울과 실라는 곧바로 로마 지하 감옥에 감금시켰고, 손과 발에 차꼬가지 채웠죠.
그때 바울과 실라가 무엇을 했습니까?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께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하나님껫 찬양과 기도를 올려드렸죠.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양소리는 같은 감옥에 갇힌 다른 죄수들에게까지 전해졌죠.
그만큼 그 죄수들에게 진정한 소망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도록 하라는 뜻이었죠.
그런데 그때 바울과 실라가 무엇을 놓고 기도를 했다고 했습니까?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자신들을 풀어달라고, 감옥을 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게 아니었죠.
오히려 그 감옥 속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죠.
이 감옥 속에서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주어진 상황을 전적으로 내어맡길 수 있도록 말이죠.
(깨달음)우리도 마찬가지죠.
내 삶이 힘들고 고달픈 지경에 내몰렸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한다고 일이 해결되겠습니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붙잡고 하소연한다고 그 문제가 해결되겠습니까?
오직 이 문제와 상황을 직면케 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 간구하는 것이 중요하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당신의 임재 가운데 그 응답을 베풀어주는 줄 믿습니다.
(본문)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전해주는 말씀인데, 본문 27-30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실라가 찬양를 할 때, 그때 감옥 속에 지진을 일으키셨고, 옥문을 열어주셨죠.
물론 그때 일어난 지진으로 땅이 갈리고 건물과 벽면이 무너진 게 아니었죠.
그만큼 자연현상으로 일어난 지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지진이었습니다.
그때 감옥의 문이 열리자 다른 죄수들은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바울과 실라는 도망가지 않고 그 감옥 속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왜죠?
그 속에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음을 믿었기에, 그래서 기도할때도 그 뜻을 헤아리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이죠.
그리고 지금은 감옥의 문이 열렸을 때, 정말로 하나님께서 이 감옥 속에서 영광받으실 일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이죠.
그래서 그 감옥을 지키던 간수장이 자결하려고 할 때, 바울과 실라가 소리친 것이었죠.
“이보시오. 간수장. 당신은 자결하지 마시오. 우리가 여기 그대로 있소.”하고 말이죠.
그러자 그 간수장이 불을 밝히면서 안쪽 감옥으로 들어갔는데, 정말로 바울과 실라가 그대로 있는 모습이었죠.
그때 어떻게 합니까?
그는 다른 죄수들이 다 도망가는 판국에 왜 저들이 저렇게 초연할 수 있지 하면서 놀랐겠죠.
그리고는 곧장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겠습니까?”하고 물었던 것이죠.
(깨달음)이와 같은 사실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바로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하는 점이죠.
믿음이란 뜬 구름 잡는 게 아니라 내 삶에 주어진 자리를 굳게 지켜나가는 것이 참된 믿음이라는 점입니다.
만약 바울과 실라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그 감옥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결코 그 간수장이가 바라는 구원, 곧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겠죠.
그만큼 바울과 실라는 그 감옥 속에서 영광받으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그 자리를 지켰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김양재 목사님의 남편이 여자 관계가 복잡하고 성매매 빌딩을 경배로 받고자 하는 돈벌이에 미쳐 있었도, 아내의 자리, 엄마의 자리를 굳게 지켰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토록 남편의 학대와 바람기 속에서 가정을 지키는 게 힘들었어도, 주님을 바라보고, 남편의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그 자리를 지켰던 것 아니었습니까?
(주문)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 주님은 우리가 어떤 환경에 굴하지 않고 그 자리, 믿음의 자리를 지키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실까요?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믿음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 수 있지 않겠느냐?”
“믿음이란 거창한 게 아니라 너의 자리, 남편과 아내의 자리, 엄마와 딸의 자리, 가정과 일터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지 않더냐?”
“바울과 실라가 그 감옥의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면 어찌 그 간수장이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겠느냐?”
“김양재 목사가 아내의 자리, 엄마의 자리를 이탈해버렸다면 어찌 지금의 목사로서 그 남편을 건져낸 간증을 할 수 있었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환란과 역경이 몰아쳐올 때, 너의 믿음의 자리를 굳게 지켰으면 좋겠구나.”
“너의 가정과 일터에 어려움이 몰아쳐올 때, 그때도 더욱도 그 자리를 굳게 지켜나가길 원한다.”
“그리하여 너도 누군가에게 믿음의 산 증인이 되었으면 한다.”
(찬양) 기도를 멈추지 마라 눈앞의 상황이 마음을 눌러도
원망치 마라 너의 입을 지켜라 저들은 너의 입을 보고 있다
마음을 뺏기지 마라 내가 널 도우지 않는단 소리에
너의 모든 게 모든 게 불리해도 너는 기도를 계속해라
너 기도를 멈추지 마라 내가 너의 그 모든 상황을 바로 역전시키리니
너 기도를 멈추지 마라 내가 잠시도 쉬지 않고
모든 걸 지켜보고 있으니 바로 역전되리라
(성화) 우리가 알고 있는 창세기 4장과 5장에는 족보가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창세기 4장의 족보는 가인의 족보, 일명 죽음의 족보요 심판의 족보입니다.
그 족보 속에는 당대에 이름값을 떨치는 유명인들이 등장하죠.
목축의 조상, 구리장색의 조상, 음악인의 조상 등 각기 명성을 날린 조상과 그 후손들의 이름입니다.
창세기 5장은 어떤 족보가 나옵니까?
셋과 에노스의 족보입니다.
그 족보의 조상과 후손들은 세상에 이름값을 떨치지도 못했고 유명인들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 그것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족보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족보이자, 영생의 족보입니다.
그 이후에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죄로 물든 세상, 죄악으로 온통 가득한 세상을 물로 심판코자 하시죠.
그러나 노아와 그의 가족들만큼은 살려주십니다.
그를 위해 방주를 짓도록 했고, 그 방주에 들어갔을 때 노아와 그 가족들은 홍수 심판때 모두 구원받았죠.
중요한 것은 노아가 구원받을 자격이 있어서 구원받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절대고 그렇지 않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었기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죠.
노아와 그 식구들이 방주에 들어가 살게 된 1년 17일간의 과정입니다.
사람들은 그 방주 안이 천국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 방주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리고, 똥 오줌을 싸고, 새들이 지저귀기 때문에, 밤잠을 설쳐야 하는 곳이죠.
그런데도 노아와 그 가족들은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그 방주 안에서 1년 17일을 잘 지켰습니다.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노아와 그 가족들이 구원받은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방주 안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힘들고 짜증나고 냄새난다고, 더럽다고, 불평과 원망을 쏟아부었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 방주 안에서 살면 온전한 사람이라도 정신병자가 될 수 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해서 방주를 뛰쳐나간다면요?
그랬다가는 죽음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적용)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는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 세상은 거대하는 욕망의 물결이 넘치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 욕망의 바다에 뛰어드는 심정으로, 내 믿음의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면 어떻게 디겠습니까?
거기에는 죽음의 심판, 영벌의 심판만 닥쳐오는 것 뿐이죠.
(내음성)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드리는 걸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도 노아처처럼 온전히 방주 안의 자리를 굳게 지키는 믿음을 허락해 주세요.”
“빌립보 감옥을 박차고 나가지 않은 바울과 실라의 그 믿음의 본을 따를 수 있게 해 주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의 잔을 피하지 않고 온전히 마셨어요.”
“지금 저에게 주어진 고난의 잔이 있을 때 회피하거나 달아나지 말고 온전히 마실 수 있게 해 주세요.”
“그 모든 게 나의 영광이나 자랑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영광이 되게 해 주세요.”
(찬양) 기도를 멈추지 마라 눈앞의 상황이 마음을 눌러도
원망치 마라 너의 입을 지켜라 저들은 너의 입을 보고 있다
마음을 뺏기지 마라 내가 널 도우지 않는단 소리에
너의 모든 게 모든 게 불리해도 너는 기도를 계속해라
너 기도를 멈추지 마라 내가 너의 그 모든 상황을 바로 역전시키리니
너 기도를 멈추지 마라 내가 잠시도 쉬지 않고
모든 걸 지켜보고 있으니 바로 역전되리라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이란 크고 거창한 게 아닙니다.
믿음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모의 자리, 일터에서 직원의 자리, 교회에서 직분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죠.
바울과 실라도 빌립보 감옥에 주어진 그 자리를 온전히 믿음으로 굳게 지켰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 간수장과 그 집 식구들 모두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영광을 덧입게 되었죠.
노아와 그 가족도 방주 안에서 사는 게 정신병자가 될 수밖에 없었지만 하늘 창문을 바라보고 온전한 믿음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때 노아와 그 가족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중시조가 되는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와 같은 놀라운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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