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어지럽고 죽을 것 같다고 하여 한국병원 응급실에 모셨다. 압해도 군민체육관에서 코로나 2차 백신을 접종한 뒤였다. 어머니의 피와 혈압을 조사한 담당의는 피 수치가 떨어졌다고 했다. 평소 10 정도 됐는데 지금은 6.9로 떨어졌고, 방치할 경우 쇼크사가 올 수 있다고 했다. 그날 오후에 어머니를 중환자실에 입원시킨 경유였다.
다만 응급실에 머물 때 엄마는 내게 땅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다른 자식들은 모두 땅을 이전해줬고, 이제 형과 내 몫만 남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안산 밭을 형과 공동명의로 이전할 것인지, 아니면 뒤굴 윗밭을 형 앞으로 이전해 공원묘지를 관리케 할 것인지, 결정하라는 뜻이었다. 그 일로 나는 시청 관계자와 통화했고, 작지만 뒤굴 윗 밭을 내 명의로 이전할 거라고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왜 그랬을까? 어쩌면 엄마가 죽음을 내다보고 그렇게 서두르는 모습이지 않았을까. 물론 그날 밤 400cc 두 팩을 수혈받은 엄마의 피 수치는 9.6으로 올라섰다. 다음날 일반 병실로 곧바로 옮길 수 있는 이유였다. 하지만 며칠 더 입원해서 엄마의 상태를 지켜봐야 했는데, 엄마는 병실이 답답하여 다음날 퇴원하고 말았다.
지도 집으로 엄마를 모시고 가는 길에 잠시 읍사무소에 들렀다. 증여로 인한 소유권이전등기에 필요한 ‘농지취득자격증명원’을 미리 신청해 놓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인감증명’과 등기부상에 나오는 ‘주민등록초본’도 함께 뗄 수 있었다. 더욱이 집에다 엄마를 모셔드리고, 앞마당과 뒤뜰에 풀 약을 쳤는데, 그 사이 등기권리증까지 엄마는 내줬다.
“왜 이렇게 서두른가?”
“이렇게 해야 나중에 다툼이 안 생기지?”
“아니, 그래도.”
“텔레비전 안 보냐. 땅 문제 때문에 얼마나 다투고 시끄럽냐?”
“알았네.”
“이렇게 해야 형제들 사이에 의도 안 상하고 순리대로 살 수 있어야.”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삼하6:8-10)
다윗이 여부스 성읍을 점령하고 헤브론에서 그곳으로 천도(王都)했다. 그때가 37세의 일이고, 그곳 이름을 ‘예루살렘’(יְרוּשָׁלַם) 곧 ‘평화의 터전’(shoot of peace)으로 명명했다. 그때 다윗은 법궤를 모셔오고자 했다. 그것이 군사 3만 명을 동원해 ‘바알레 유다’ 곧 ‘기랏 여아림’(수15:9, 수18:14, 대상13:6)1)으로 간 이유였다.
사실 법궤는 그런 이동 경로를 거쳤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전투를 벌일 때 실로에 있던 법궤를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투 현장에 가져갔다. 부적처럼 사용코자 함이었다. 하지만 전투는 패했고 법궤도 빼앗겼다(삼상4). 그때 법궤는 블레셋의 아스돗, 인근 가드, 또 에그론으로 옮겨갔다. 곳곳에 독종의 심판이 임했던 까닭이다. 결국 7개월 뒤 그들은 새 수레에 법궤를 싣고 젖 나는 암소 두 마리로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로 끌고 가도록 했다. 그때 벧세메스 주민들은 그 인근 ‘바알레 유다’ 곧 ‘기럇 여아림’에 법궤를 모시도록 했고, 이후 40년이 흘렀다.
사울은 왕이 됐어도 그 법궤를 기브아 왕도(王都)로 모실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과는 거리가 먼 사울이었다. 하지만 다윗은 왜 모시려 했을까? 다윗이 여부스 성읍을 점령하기 전 헤브론에 살 때는 북쪽 11개 지파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추종했고, 남쪽 유다 지파만 다윗을 섬겼다. 더욱이 북쪽 기브온은 사독이 대제사장 또 남쪽 헤브론은 아비아달이 대제사장으로 있었다. 그만큼 분열된 이스라엘을 통합하고 경쟁하던 사제직도 합치고자 법궤를 모셔오려 한 것이었다.
그런데 신실한 그 마음에 찬물을 끼얹기라도 하듯 문제가 터졌다. 법궤를 새 수레에 ‘싣고’(삼하6:3) 오는데, 아비나답(אֲבִינָדָב, my father is noble)의 아들 웃사(עֻזָּא, strength)와 아효(אַחְיוֹ, brother)2)가 법궤 앞에 나선 것이었다. 더욱이 나곤의 타작마당에 소들이 뛸 때 웃사가 그 법궤를 ‘붙들자’(삼하6:6, 민4:15) 하나님께서 치셨다. 그때 두려움을 느낀 다윗은 법궤를 모시는 일을 잠시 멈추고 오벧에돔의 집에 안치했다.
왜 하나님은 웃사를 쳤을까? 같은 내용을 전하는 역대기엔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다”(대상13:9-10)는 말씀을 두 번 강조한다. 웃사는 벧세메스 지역 사람들이 법궤를 들여다보다가 죽임당한 일(삼상6:19)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기 힘(strength)으로 법궤를 통제하려는 거드름을 피우다 죽임당한 꼴이다. 다윗은 그 원인을 파악해 레위의 후손인 고라 자손 오벧에돔(대상26:4)의 집에 3개월간 모시게 했다. 그 후에야 제사장들을 동원해 법궤를 ‘메고’(삼하6:12, 민7:9) 예루살렘에 모셔왔던 것이다.
아무리 선하고 좋은 일이라도 순리대로 따르지 않으면 말썽이 생기는 법이다. 사실 엄마는 그 전부터 땅 이전에 관한 이야기를 종종 꺼냈다. 그런데 형과 충분한 공감대를 이루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형과 나 사이에 의가 상하고 불쾌한 마음까지 들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여태껏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한 상태라, 이제는 등기권리증을 받아 소유권을 이전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것이 부모의 말씀을 받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이스라엘의 중심부인 여부스를 점령하고 평화의 터전을 세우고자 예루살렘으로 명명했다. 그 뒤 법궤도 모셔오고 제사장도 통합해 중앙신전을 세울 단계까지 밟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이 선한 취지였지만 웃사처럼 자기 힘으로 하는 게 아님을 일깨워주신 것이다. 신정국가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어깨에 짊어지고 순종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그것이 하나님의 순리를 따르는 길임을 말이다.
1)https://www.etzion.org.il/en/tanakh/studies-tanakh/core-studies-tanakh/shemini-kiriath-jearim-and-giv%E2%80%99-not-exactly-what-you
2)https://www.blueletterbible.org/lang/lexicon/lexicon.cfm?Strongs=H41&t=KJV
My mother wants to transfer the land.
The consultation between the brothers is important.
Even if David wanted to bring the ark, he had to follow God's o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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